밧칠성

한국무속신앙사전
밧칠성
제주도 토산 출신 사람들이 위하는, 집안의 부를 지켜주는 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살아야 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일만 팔천이나 되는 신들을 모시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뱀을 신(神)으로 숭배하는 풍습을 지켜 왔다. 특히 1521년(중종 16) 김정(金淨)은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몹시 숭배하여 심방이 많았다. 사람에게 재앙과 불행한 일이 생기면 제물을 올리고 소리 지르고 조롱하면서 두렵게 위협한다. 명절이나 삭망(朔望), 이렛날에는 짐승을 희생으로 음사(淫祠)를 위하였는데, 300여 곳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더욱이 “풍속에 몹시 뱀[蛇]을 꺼리고 이를 신이라 여겨 받들면서 위하는데, 뱀을 보면 주문을 외우고 술로 위하며 신성한 신으로 여겨 쫓아내거나 죽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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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토산 출신 사람들이 위하는, 집안의 부를 지켜주는 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살아야 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일만 팔천이나 되는 신들을 모시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뱀을 신(神)으로 숭배하는 풍습을 지켜 왔다. 특히 1521년(중종 16) 김정(金淨)은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몹시 숭배하여 심방이 많았다. 사람에게 재앙과 불행한 일이 생기면 제물을 올리고 소리 지르고 조롱하면서 두렵게 위협한다. 명절이나 삭망(朔望), 이렛날에는 짐승을 희생으로 음사(淫祠)를 위하였는데, 300여 곳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더욱이 “풍속에 몹시 뱀[蛇]을 꺼리고 이를 신이라 여겨 받들면서 위하는데, 뱀을 보면 주문을 외우고 술로 위하며 신성한 신으로 여겨 쫓아내거나 죽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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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섭
정의제주도 토산 출신 사람들이 위하는, 집안의 부를 지켜주는 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살아야 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일만 팔천이나 되는 신들을 모시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뱀을 신(神)으로 숭배하는 풍습을 지켜 왔다. 특히 1521년(중종 16) 김정(金淨)은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몹시 숭배하여 심방이 많았다. 사람에게 재앙과 불행한 일이 생기면 제물을 올리고 소리 지르고 조롱하면서 두렵게 위협한다. 명절이나 삭망(朔望), 이렛날에는 짐승을 희생으로 음사(淫祠)를 위하였는데, 300여 곳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더욱이 “풍속에 몹시 뱀[蛇]을 꺼리고 이를 신이라 여겨 받들면서 위하는데, 뱀을 보면 주문을 외우고 술로 위하며 신성한 신으로 여겨 쫓아내거나 죽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였다.
정의제주도 토산 출신 사람들이 위하는, 집안의 부를 지켜주는 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살아야 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일만 팔천이나 되는 신들을 모시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뱀을 신(神)으로 숭배하는 풍습을 지켜 왔다. 특히 1521년(중종 16) 김정(金淨)은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몹시 숭배하여 심방이 많았다. 사람에게 재앙과 불행한 일이 생기면 제물을 올리고 소리 지르고 조롱하면서 두렵게 위협한다. 명절이나 삭망(朔望), 이렛날에는 짐승을 희생으로 음사(淫祠)를 위하였는데, 300여 곳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더욱이 “풍속에 몹시 뱀[蛇]을 꺼리고 이를 신이라 여겨 받들면서 위하는데, 뱀을 보면 주문을 외우고 술로 위하며 신성한 신으로 여겨 쫓아내거나 죽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였다.
내용큰굿 때 집안의 각처를 관장하고 수호하는 신에게 기원하는 제차(祭次)로 각도비념을 하게 된다. 이때 집안의 신들을 위한다. 신들 가운데 ‘밧칠성’은 집 뒤에 모셔진다. 집안의 부(富)를 수호하는 신도 위한다.

여드렛당은 그 제일이 매 8일(8일, 18일, 28일)인 데서 명명됐다. 이 당들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의 ‘여드렛당’이 확대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토산당’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당은 사신을 모시는 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당신은 [단골](/topic/단골)의 딸에서 딸로 나오며, 이 신을 숭앙하다가 중단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널리 이야기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 집안에 장가들기를 꺼린다. 모른 채 장가든 경우 이 신을 모시지 않으면 앓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셔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신앙인이 많아지면 공동 제당이 이루어져서 오늘날 여드렛당은 거의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이 당신들은 본향당신이나 칠일당신처럼 계보를 설명하는 데가 없이 토산 팔일당신의 분파라고 이야기한다. 제의는 매달 8일에 소규모의 축원 무의를 하고, 6월 8일에 당굿으로 크게 하는 데가 많다. 신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주 영산 금성산에 일 년에 한 번 처녀를 제물로 받는 신이 있었다. 이 고을에 목사가 부임하면 해마다 파직이 되어 다들 목사로 가길 꺼리는데 어떤 한 사람이 자원하여 부임하였다. 부임 도중 금성산 앞을 지나려니 통인이 이 산엔 신령이 있으니 곧 하마하셔야 하며, 그대로 지나치면 말이 발을 전다고 하였다. 이에 목사는 그 신을 보기 위하여 무녀를 불러 굿을 치게 했다. 굿을 치니 웬 처녀가 나타났다. 목사가 참된 신령을 보이라고 야단을 치자 이번엔 한 아가리는 하늘에 붙고 한 아가리는 땅에 붙은 대망(이무기)이 나타났다. 목사는 여의주를 물지 않았으니 신이 아니라 하여 포수를 시켜 쏘아 죽이고 이를 불살랐다.

그러자 뱀은 바둑돌로 변하여 서울 종로 네거리로 날아갔다. 때마침 제주에서는 강씨형방, 한씨이방, 오씨형방 세 사람이 서울에 진상을 갔다가 이 바둑돌을 주웠다. 바둑돌을 줍자 진상도 수월히 잘되고 보답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배를 타고 돌아올 때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여 바둑돌을 던져 버렸더니 갑자기 태풍이 일어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다. 문점 후 서낭굿을 하니 순풍이 불었다. 그렇게 오다 보니 어느 샌가 바둑돌이 뱃장 밑에 와 있었다.

배가 제주도의 성산읍 온평리에 닿자 바둑돌은 여인으로 변하였다. 그는 곧 온평리 본향당신인 맹호부인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맹호부인은 모든 [마을](/topic/마을)에 신이 있고 토산리가 하나 비었으니 거기로 가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맹호부인의 사신 문씨영감의 안내를 받아 하토산리로 내려가 좌정했다. 하루는 계집종을 데리고 삼만오리소에 빨래를 하러 갔더니 마침 앞바다를 지나다 파선당하여 표착한 왜놈이 이 부인을 발견하고 쫓아오므로 도망가 묵은각단밭에 숨었다가 발각이 되어 윤간을 당하고 죽었다.

시체는 토산리 신산마루에 묻었는데 얼마 후 가시리 강당장집 외딸아기가 유월 [방아](/topic/방아)를 찧다가 하품을 하며 광증(狂症)을 일으켜 죽게 됐다. 문점을 하니 토산당신의 탓이라 하므로 큰굿을 차려 하니 병자가 “나를 위한 굿이면 궷문을 열어 [명주](/topic/명주)를 풀어보라.”고 했다. 명주 속에 말라붙은 뱀이 있었다. 이 명주를 풀어 헤쳐 굿을 하니 따님이 파릇파릇 살아났다. 그런 연유로 해서 이 신을 위하게 되었고, 이 신이 주는 재해에는 명주로 다리를 삼아 굿을 한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일(巳日)을 ‘배염(뱀)날’, 뱀을 달리 ‘진 것’이라고도 말한다. ‘배염이 꿈에 보이민 임신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민이 생각하는 뱀에 대한 관념이 좋지도 궂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속에서는 [뱀날](/topic/뱀날)에는 ‘사불원행(巳不遠行)’이라 해서 ‘먼 길을 떠나지 않는 날’로 이해하고 있다. 또 ‘출행파일’이라고도 하여 ‘무엇을 하든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날’이라고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에 뱀을 ‘칠성배염’이라고 해 귀신으로 위하고, 때려잡거나 손가락질하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신령으로 여긴다. [기후](/topic/기후)가 온화한 제주도지역의 풍토에서 뱀이 많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를 ‘칠성배염’이니 ‘칠성한집’이라 하여 모시는가 하면 ‘칠성눌’이니 ‘뒷할망’이라고 하여 뱀신으로 위하기도 한다. 혹시라도 뱀에게 위협을 가하였을 때에는 그 집안 아이가 아프거나 어른이 죽게 되는 등 반드시 흉사가 생긴다. 이런 때 그 집에서는 심방을 청해서 굿을 해야 그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내용큰굿 때 집안의 각처를 관장하고 수호하는 신에게 기원하는 제차(祭次)로 각도비념을 하게 된다. 이때 집안의 신들을 위한다. 신들 가운데 ‘밧칠성’은 집 뒤에 모셔진다. 집안의 부(富)를 수호하는 신도 위한다.

여드렛당은 그 제일이 매 8일(8일, 18일, 28일)인 데서 명명됐다. 이 당들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의 ‘여드렛당’이 확대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토산당’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당은 사신을 모시는 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당신은 [단골](/topic/단골)의 딸에서 딸로 나오며, 이 신을 숭앙하다가 중단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널리 이야기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 집안에 장가들기를 꺼린다. 모른 채 장가든 경우 이 신을 모시지 않으면 앓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셔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신앙인이 많아지면 공동 제당이 이루어져서 오늘날 여드렛당은 거의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이 당신들은 본향당신이나 칠일당신처럼 계보를 설명하는 데가 없이 토산 팔일당신의 분파라고 이야기한다. 제의는 매달 8일에 소규모의 축원 무의를 하고, 6월 8일에 당굿으로 크게 하는 데가 많다. 신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주 영산 금성산에 일 년에 한 번 처녀를 제물로 받는 신이 있었다. 이 고을에 목사가 부임하면 해마다 파직이 되어 다들 목사로 가길 꺼리는데 어떤 한 사람이 자원하여 부임하였다. 부임 도중 금성산 앞을 지나려니 통인이 이 산엔 신령이 있으니 곧 하마하셔야 하며, 그대로 지나치면 말이 발을 전다고 하였다. 이에 목사는 그 신을 보기 위하여 무녀를 불러 굿을 치게 했다. 굿을 치니 웬 처녀가 나타났다. 목사가 참된 신령을 보이라고 야단을 치자 이번엔 한 아가리는 하늘에 붙고 한 아가리는 땅에 붙은 대망(이무기)이 나타났다. 목사는 여의주를 물지 않았으니 신이 아니라 하여 포수를 시켜 쏘아 죽이고 이를 불살랐다.

그러자 뱀은 바둑돌로 변하여 서울 종로 네거리로 날아갔다. 때마침 제주에서는 강씨형방, 한씨이방, 오씨형방 세 사람이 서울에 진상을 갔다가 이 바둑돌을 주웠다. 바둑돌을 줍자 진상도 수월히 잘되고 보답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배를 타고 돌아올 때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여 바둑돌을 던져 버렸더니 갑자기 태풍이 일어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다. 문점 후 서낭굿을 하니 순풍이 불었다. 그렇게 오다 보니 어느 샌가 바둑돌이 뱃장 밑에 와 있었다.

배가 제주도의 성산읍 온평리에 닿자 바둑돌은 여인으로 변하였다. 그는 곧 온평리 본향당신인 맹호부인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맹호부인은 모든 [마을](/topic/마을)에 신이 있고 토산리가 하나 비었으니 거기로 가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맹호부인의 사신 문씨영감의 안내를 받아 하토산리로 내려가 좌정했다. 하루는 계집종을 데리고 삼만오리소에 빨래를 하러 갔더니 마침 앞바다를 지나다 파선당하여 표착한 왜놈이 이 부인을 발견하고 쫓아오므로 도망가 묵은각단밭에 숨었다가 발각이 되어 윤간을 당하고 죽었다.

시체는 토산리 신산마루에 묻었는데 얼마 후 가시리 강당장집 외딸아기가 유월 [방아](/topic/방아)를 찧다가 하품을 하며 광증(狂症)을 일으켜 죽게 됐다. 문점을 하니 토산당신의 탓이라 하므로 큰굿을 차려 하니 병자가 “나를 위한 굿이면 궷문을 열어 [명주](/topic/명주)를 풀어보라.”고 했다. 명주 속에 말라붙은 뱀이 있었다. 이 명주를 풀어 헤쳐 굿을 하니 따님이 파릇파릇 살아났다. 그런 연유로 해서 이 신을 위하게 되었고, 이 신이 주는 재해에는 명주로 다리를 삼아 굿을 한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일(巳日)을 ‘배염(뱀)날’, 뱀을 달리 ‘진 것’이라고도 말한다. ‘배염이 꿈에 보이민 임신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민이 생각하는 뱀에 대한 관념이 좋지도 궂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속에서는 [뱀날](/topic/뱀날)에는 ‘사불원행(巳不遠行)’이라 해서 ‘먼 길을 떠나지 않는 날’로 이해하고 있다. 또 ‘출행파일’이라고도 하여 ‘무엇을 하든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날’이라고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에 뱀을 ‘칠성배염’이라고 해 귀신으로 위하고, 때려잡거나 손가락질하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신령으로 여긴다. [기후](/topic/기후)가 온화한 제주도지역의 풍토에서 뱀이 많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를 ‘칠성배염’이니 ‘칠성한집’이라 하여 모시는가 하면 ‘칠성눌’이니 ‘뒷할망’이라고 하여 뱀신으로 위하기도 한다. 혹시라도 뱀에게 위협을 가하였을 때에는 그 집안 아이가 아프거나 어른이 죽게 되는 등 반드시 흉사가 생긴다. 이런 때 그 집에서는 심방을 청해서 굿을 해야 그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지역사례밧칠성은 보통 대대(代代)로 이어져 오면서 신앙했던 것으로 이를 모시는 집은 별도로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밧칠성은 고팡에 모시는 [안칠성](/topic/안칠성)과 달리 바깥에 모신다. 김영옥(여, 1933년생)에 의하면 주젱이를 덮었다가 그것을 갈아 덮는데 정초에 택일하여 별도로 행했었다고 한다. 제주시 아라동에서도 밧칠성을 모시는 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이런 제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의 오영종(남, 1931년생) 씨에 의하면 위하는 집에서는 해마다 정초에 [철[갈이](/topic/갈이)](/topic/철갈이)를 하면서 택일하여 심방을 불러 별도로 위하였다. 이때 [주저리](/topic/주저리) 안의 기왓장과 [오곡](/topic/오곡)도 교체하고 주저리도 새것으로 교체하였다고 한다.

제주시 삼양 지역에서는 경우 밧칠성은 남군 토산에서 모시는 것이라고 해서 ‘뱀굿’이라고도 하는데, 강춘생(여, 1928년생)에 의하면 이를 모시는 집이 삼양에도 3집 가량 있었다고 한다. 이 신은 잘 위하여 모시면 부자가 되게 해 주지만, 잘못 모실 경우 더욱 큰 해(害)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선뜻 모시기를 어려워했다고 했다.

서귀포 해안 [마을](/topic/마을)인 보목에서도 밧칠성은 신앙된 것으로 보인다. 보통은 집안 뒤쪽 깨끗한 곳에 돌 하나를 놓고, 그 바깥에 주젱이로 덮어 ‘눌’을 만들어 세웠다. 비가 와도 세지 않도록 [고깔](/topic/고깔)같이 만들어 덮은 형태였다. 이용식(남, 1924년생)에 의하면 보목에서도 15호 정도의 집안에서 이렇게 밧칠성을 모시고 신앙하였다고 한다. 주젱이는 1년 한 번 철갈이라고 해서 갈아 덮어 주었는데, 밧칠성을 잘 위하면 부자로 살지만, 잘 위하지 않으면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1974년 현지 조사된 오조리의 경우 철갈이는 일명 [문전철갈이](/topic/문전철갈이) 또는 벨롱갱이, 문전버들개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대개 정월에 심방을 빌어서 행하게 되는데, 문전(門前) 신을 주신(主神)으로 삼아 신년의 가내 안녕(安寧)을 빌고 이어서 조왕, 안칠성, 밧칠성 등 가내(家內)에 좌정하고 있는 여러 신들에게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다. 특히, 이날 집 뒤에 밧칠성을 모셔놓은 집안에서는 칠성눌을 갈아 덮기도 했다고 한다. 칠성눌은 집 뒤 공지에 주젱이를 덮어 놓은 것인데 이 안에는 기와 2장이 겹쳐 있고 그 안에는 조, 콩, 팥, [옥수수](/topic/옥수수) 등 잡곡과 소라껍질이 들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기와 대신 항아리로 하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철갈이 때는 밧칠성에 의례를 하고 그 기와 속에 잡곡(雜穀)과 소라껍질을 갈아 넣고 주젱이를 새 것으로 갈아 덮는 것으로, 집안이나 가문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어류 곧 명태, 생선 따위를 많이 올렸다고 한다. 1973년 현지조사한 기록을 보아도 우도에서도 철갈이를 문절철갈이 또는 벨롱겡이라 하고 문절비들래기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오조리에서와는 달리 우도에서는 철갈이를 정월 15일에 심방을 불러서 행했다고 한다.
참고문헌제주풍토록 (김정, 홍정표 역, 탐라문헌집, 제주도 교육위원회, 1976)
남국의 민속 (진성기, 교학사, 1980)
제주도무속연구 (현용준, 집문당, 1986)
제주도부락지 3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전래[농기구](/topic/농기구) (김동섭, 민속원, 2004)
여성[농업](/topic/농업)인의 삶과 전통 (김동섭 외, 여성농업인중앙회, 2005)
한국의 가정신앙-제주도 (김동섭 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제주유식[마을](/topic/마을)제의 전승양상 (김동섭, 제주도, 2009)
제주민속문화이해 (김동섭, 거마문화사, 2010)
지역사례밧칠성은 보통 대대(代代)로 이어져 오면서 신앙했던 것으로 이를 모시는 집은 별도로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밧칠성은 고팡에 모시는 [안칠성](/topic/안칠성)과 달리 바깥에 모신다. 김영옥(여, 1933년생)에 의하면 주젱이를 덮었다가 그것을 갈아 덮는데 정초에 택일하여 별도로 행했었다고 한다. 제주시 아라동에서도 밧칠성을 모시는 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이런 제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의 오영종(남, 1931년생) 씨에 의하면 위하는 집에서는 해마다 정초에 [철[갈이](/topic/갈이)](/topic/철갈이)를 하면서 택일하여 심방을 불러 별도로 위하였다. 이때 [주저리](/topic/주저리) 안의 기왓장과 [오곡](/topic/오곡)도 교체하고 주저리도 새것으로 교체하였다고 한다.

제주시 삼양 지역에서는 경우 밧칠성은 남군 토산에서 모시는 것이라고 해서 ‘뱀굿’이라고도 하는데, 강춘생(여, 1928년생)에 의하면 이를 모시는 집이 삼양에도 3집 가량 있었다고 한다. 이 신은 잘 위하여 모시면 부자가 되게 해 주지만, 잘못 모실 경우 더욱 큰 해(害)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선뜻 모시기를 어려워했다고 했다.

서귀포 해안 [마을](/topic/마을)인 보목에서도 밧칠성은 신앙된 것으로 보인다. 보통은 집안 뒤쪽 깨끗한 곳에 돌 하나를 놓고, 그 바깥에 주젱이로 덮어 ‘눌’을 만들어 세웠다. 비가 와도 세지 않도록 [고깔](/topic/고깔)같이 만들어 덮은 형태였다. 이용식(남, 1924년생)에 의하면 보목에서도 15호 정도의 집안에서 이렇게 밧칠성을 모시고 신앙하였다고 한다. 주젱이는 1년 한 번 철갈이라고 해서 갈아 덮어 주었는데, 밧칠성을 잘 위하면 부자로 살지만, 잘 위하지 않으면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1974년 현지 조사된 오조리의 경우 철갈이는 일명 [문전철갈이](/topic/문전철갈이) 또는 벨롱갱이, 문전버들개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대개 정월에 심방을 빌어서 행하게 되는데, 문전(門前) 신을 주신(主神)으로 삼아 신년의 가내 안녕(安寧)을 빌고 이어서 조왕, 안칠성, 밧칠성 등 가내(家內)에 좌정하고 있는 여러 신들에게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다. 특히, 이날 집 뒤에 밧칠성을 모셔놓은 집안에서는 칠성눌을 갈아 덮기도 했다고 한다. 칠성눌은 집 뒤 공지에 주젱이를 덮어 놓은 것인데 이 안에는 기와 2장이 겹쳐 있고 그 안에는 조, 콩, 팥, [옥수수](/topic/옥수수) 등 잡곡과 소라껍질이 들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기와 대신 항아리로 하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철갈이 때는 밧칠성에 의례를 하고 그 기와 속에 잡곡(雜穀)과 소라껍질을 갈아 넣고 주젱이를 새 것으로 갈아 덮는 것으로, 집안이나 가문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어류 곧 명태, 생선 따위를 많이 올렸다고 한다. 1973년 현지조사한 기록을 보아도 우도에서도 철갈이를 문절철갈이 또는 벨롱겡이라 하고 문절비들래기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오조리에서와는 달리 우도에서는 철갈이를 정월 15일에 심방을 불러서 행했다고 한다.
참고문헌제주풍토록 (김정, 홍정표 역, 탐라문헌집, 제주도 교육위원회, 1976)
남국의 민속 (진성기, 교학사, 1980)
제주도무속연구 (현용준, 집문당, 1986)
제주도부락지 3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0)
제주전래[농기구](/topic/농기구) (김동섭, 민속원, 2004)
여성[농업](/topic/농업)인의 삶과 전통 (김동섭 외, 여성농업인중앙회, 2005)
한국의 가정신앙-제주도 (김동섭 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제주유식[마을](/topic/마을)제의 전승양상 (김동섭, 제주도, 2009)
제주민속문화이해 (김동섭, 거마문화사, 2010)
유래사신(蛇神)인 칠성의 내력담이 신화로 전해져 불리고 있다. 이를 라고 한다. 는 신화의 명칭인 동시에 [칠성신](/topic/칠성신)에게 기원하는 제차(祭次)의 명칭이기도 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칠성의 아버지는 장나라 장설용이고 어머니는 송나라 송설룡이다. 옛날옛적 장나라 장설룡과 송나라 송설룡이 부부가 되어 살았다. 집안이 천하거부여서 생활은 유복했으나 한 [가지](/topic/가지) 걱정은 쉰 살이 가깝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부부는 동관음사(東觀音寺)에 가 석 달 열흘 백일 동안 자식 낳기를 빌었다. 불공을 마치는 날 스님은 보시가 백 근이 못 차 딸자식을 점지하신다고 일러 주었다. 과연 태기가 있어 여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기씨가 일곱 살이 되는 해였다. 아버지 장설룡은 천하공사, 어머니 송설룡은 지하공사 벼슬살이를 가게 되었다. 부모는 딸자식이 걱정이었다. 아들자식 같으면 데리고 가서 벼룻물이나 떠 놓도록 하지만 딸자식이 되어서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단단히 잠그고 그 안에 가두어 놓고 가기로 했다. 아기씨를 방 안에 놓고 사방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러고는 느진덕정하님을 불러 구멍으로 밥을 주고 구멍으로 옷을 주며 잘 키우고 있으면 벼슬살이 끝마치고 와서 종 문서를 돌려주겠다고 당부했다.

부부는 벼슬살이를 떠났다. 느진덕정하님은 구멍으로 밥을 주고 구멍으로 옷을 주며 아기씨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레째 되는 날 느진덕정하님이 구멍으로 밥을 주려고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기씨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느진덕정하님은 그날부터 동서 순력 연사흘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아기씨 소문은 요만큼도 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상전에게 편지를 띄웠다. 사실 그때 아기씨는 부모님이 그리워 뒤를 쫓아가려고 구멍으로 살짝 빠져나와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길은 끝이 없고 지쳐서 아기씨는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스님 셋이 아기씨 곁을 지나게 되었다. 스님들은 아기씨가 자신들 법당에 와서 불공 드려 탄생한 아기씨임을 알고 아기씨를 돌돌 싸서 장나라로 내려왔다.

이럴 즈음 장설룡 대감 부부는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동서로 순력하며 아기씨를 찾아봐도 찾지 못하고 허허탄식을 하고 있었다. 이때 스님이 아기씨를 데리고 다니며 희롱하다가 문 밖의 노둣돌 밑에 숨겨놓고 장설룡 대감 부부를 찾아갔다. 장설룡 대감은 아기씨가 어디쯤 있는지 점부터 쳐 보라고 다가들었다. 이에 스님이 말했다.

“예, 아기씨는 부르면 들릴 듯 외치면 알 듯한 곳에 있을 듯합니다. 노둣돌 밑에나 보옵소서.”

이 말에 화가 난 대감은 야단치며 중을 잡아들이려 하는데, 스님은 술법을 써서 천릿길을 뛰어가 버렸다. 노둣돌 밑을 헤쳐 보니 과연 아기씨가 있었다. 얼굴엔 기미가 거멓게 끼었고, 몸은 마치 뱀처럼 아롱다롱, 배를 보니 심상치 않게 불룩해져 있는 것이다. 임신 중임이 첫눈에 드러나는 것이다. 장설룡 대감 부부는 크게 화를 내며 며칠을 의논한 끝에 아기씨를 무쇠석함에 담아서 동해바다에 띄워버리기로 했다.

무쇠석함은 이리저리 떠돌다 함덕리 서무오름 밑에 이르렀는데 그곳이 그나마 보던 중 제일 올라갈 만한 곳이었다. 무쇠석함은 서무오름 밑의 썩은 개로 올라갔다. 그때는 함덕리(咸德里)와 신흥리(新興里)를 합쳐 열네 가호에 일곱 잠수(潛嫂)가 살던 때였다. 어느 날 일곱 잠수는 테왁에 물망사리를 어깨에 메고, 바다에 들려고 하여 썩은 개에 왔다가 이 무쇠석함을 발견했다.

일곱 잠수는 서로 그것을 갖겠다고 다투었다. 이것을 본 함덕리의 송첨지 영감은 그리 싸우지 말고 그 안에 든 것을 나누어 가지고 무쇠석함이나 자신에게 주라고 했다. 그래서 송첨지 영감이 무쇠석함을 세 번을 메어치니 저절로 뚜껑이 열렸다. 그 안을 보니 혀는 맬록, 눈은 팰롱, 몸뚱이가 아롱다롱한 뱀 여덟 마리가 누워 있었다. 임신한 아기씨가 뱀 일곱 마리를 낳고 뱀으로 환생한 것이다. 이것이 칠성이다.

이들은 재수 없다 하면서 이것을 이리저리 헤쳐 버렸다. 그날부터 일곱 잠수와 송첨지 영감은 몸이 아파 드러눕고 사경을 헤맸다. 하도 답답하고 괴로워 점을 치러 갔더니 ‘남의 나라에서 들어온 신을 박대한 죄목이 되니 그 신을 청하여 굿을 하라.’는 점괘가 나왔다. 일곱 잠수와 송첨지 영감이 심방을 불러다 큰굿을 했더니 [신병](/topic/신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동서로 재물이 물밀듯이 들어와 일시에 거부가 되었다. 일곱 잠수와 송첨지 영감은 서무오름 앞에 칠성당을 만들고 이 신을 계속 위했다. 이것을 본 [마을](/topic/마을) 사람들도 너도나도 모여들어 위하니 함덕마을이 삽시에 부촌이 되었다.

칠성들은 무쇠석함에 담겨 와 여기서 이만큼 얻어먹으니 좋았다. 그러나 이 함덕 마을도 한도가 있어 오래 있을 만한 곳이 못 되었다. 아무래도 제주성 안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성들은 함덕 마을을 떠나 성으로 향하였다. 성 안으로 들어와 산지(山地) 금산물 가에서 한숨 쉬고 있는데 이때 칠성골 송대장 부인이 아침 물을 길으러 왔다가 물 어귀에 누워 있는 뱀을 발견했다. 미심쩍게 생각하며 입구에 [치마](/topic/치마)를 벗어 두고 물을 길으러 들어갔다. 물을 긷고 나와 보니 치맛자락에 뱀들이 들어가 누워 있었다.

“나에게 내려진 조상님이거든 어서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송대장 부인은 뱀을 치맛자락에 싸서 고방에 갖다 모셨다. 그 뒤로 송대장 집은 부자가 되었다. 칠성이 제주성 안에 들어와 맨 처음에 송대장 집에 좌정했기 때문에 그 [골목](/topic/골목)을 ‘칠성골’이라고 부른다.

하루는 이 칠성들이 동산에 가서 누워 있는데 어떤 관원이 지나가다가 보고는 누추하고 더럽다며 침을 뱉었다. 그날부터 이 관원은 입 안이 헐어 터지고 온몸이 아파 꼭 죽게 되었다. 무녀를 불러 점을 쳐 보았더니 ‘외국에서 들어온 신을 보고 입으로 속절없는 소리를 한 죄목이니 굿을 해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관원은 그날로 제물을 차리고 굿을 시작하여 칠성을 잘 위했다. 칠성들은 잘 얻어먹고 배가 불렀다. 그래서 그 동산을 ‘배부른 동산’으로 이름 짓게 되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다니며 얻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헤어지기로 했다. 큰딸은 추수할머니, 둘째 딸은 이방과 형방 차지, 셋째 딸은 옥지기, 넷째 딸은 과원할머니, 다섯째 딸은 창[고지](/topic/고지)기, 여섯째 딸은 광청할머니로 각각 들어갔다. 그리고 일곱째 막내딸이 말했다.

“어머님, 저는 집 후원 귤나무 밑에 [주저리](/topic/주저리) 덮고 그 밑에 청기와 흑기와 속으로 부군칠성이 되어 들어가서 구시월이 되면 귤을 진상 받겠습니다. 어머님, 우리 일곱 자매를 낳아 기르려고 하니 가슴인들 답답하지 아니했겠습니까? 시원한 귤을 받아 올리거든 답답한 어머님 가슴이나 시원섭섭히 가라앉히십시오.”

일곱째 딸은 집 뒤 억대 부군칠성으로 들어서 밧칠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곡식을 지키는 고팡의 [안칠성](/topic/안칠성)으로 들어서서 모든 곡식을 거두어 지켜 주는 신이 되었다.
유래사신(蛇神)인 칠성의 내력담이 신화로 전해져 불리고 있다. 이를 라고 한다. 는 신화의 명칭인 동시에 [칠성신](/topic/칠성신)에게 기원하는 제차(祭次)의 명칭이기도 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칠성의 아버지는 장나라 장설용이고 어머니는 송나라 송설룡이다. 옛날옛적 장나라 장설룡과 송나라 송설룡이 부부가 되어 살았다. 집안이 천하거부여서 생활은 유복했으나 한 [가지](/topic/가지) 걱정은 쉰 살이 가깝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부부는 동관음사(東觀音寺)에 가 석 달 열흘 백일 동안 자식 낳기를 빌었다. 불공을 마치는 날 스님은 보시가 백 근이 못 차 딸자식을 점지하신다고 일러 주었다. 과연 태기가 있어 여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기씨가 일곱 살이 되는 해였다. 아버지 장설룡은 천하공사, 어머니 송설룡은 지하공사 벼슬살이를 가게 되었다. 부모는 딸자식이 걱정이었다. 아들자식 같으면 데리고 가서 벼룻물이나 떠 놓도록 하지만 딸자식이 되어서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단단히 잠그고 그 안에 가두어 놓고 가기로 했다. 아기씨를 방 안에 놓고 사방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러고는 느진덕정하님을 불러 구멍으로 밥을 주고 구멍으로 옷을 주며 잘 키우고 있으면 벼슬살이 끝마치고 와서 종 문서를 돌려주겠다고 당부했다.

부부는 벼슬살이를 떠났다. 느진덕정하님은 구멍으로 밥을 주고 구멍으로 옷을 주며 아기씨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레째 되는 날 느진덕정하님이 구멍으로 밥을 주려고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기씨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느진덕정하님은 그날부터 동서 순력 연사흘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아기씨 소문은 요만큼도 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상전에게 편지를 띄웠다. 사실 그때 아기씨는 부모님이 그리워 뒤를 쫓아가려고 구멍으로 살짝 빠져나와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길은 끝이 없고 지쳐서 아기씨는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스님 셋이 아기씨 곁을 지나게 되었다. 스님들은 아기씨가 자신들 법당에 와서 불공 드려 탄생한 아기씨임을 알고 아기씨를 돌돌 싸서 장나라로 내려왔다.

이럴 즈음 장설룡 대감 부부는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동서로 순력하며 아기씨를 찾아봐도 찾지 못하고 허허탄식을 하고 있었다. 이때 스님이 아기씨를 데리고 다니며 희롱하다가 문 밖의 노둣돌 밑에 숨겨놓고 장설룡 대감 부부를 찾아갔다. 장설룡 대감은 아기씨가 어디쯤 있는지 점부터 쳐 보라고 다가들었다. 이에 스님이 말했다.

“예, 아기씨는 부르면 들릴 듯 외치면 알 듯한 곳에 있을 듯합니다. 노둣돌 밑에나 보옵소서.”

이 말에 화가 난 대감은 야단치며 중을 잡아들이려 하는데, 스님은 술법을 써서 천릿길을 뛰어가 버렸다. 노둣돌 밑을 헤쳐 보니 과연 아기씨가 있었다. 얼굴엔 기미가 거멓게 끼었고, 몸은 마치 뱀처럼 아롱다롱, 배를 보니 심상치 않게 불룩해져 있는 것이다. 임신 중임이 첫눈에 드러나는 것이다. 장설룡 대감 부부는 크게 화를 내며 며칠을 의논한 끝에 아기씨를 무쇠석함에 담아서 동해바다에 띄워버리기로 했다.

무쇠석함은 이리저리 떠돌다 함덕리 서무오름 밑에 이르렀는데 그곳이 그나마 보던 중 제일 올라갈 만한 곳이었다. 무쇠석함은 서무오름 밑의 썩은 개로 올라갔다. 그때는 함덕리(咸德里)와 신흥리(新興里)를 합쳐 열네 가호에 일곱 잠수(潛嫂)가 살던 때였다. 어느 날 일곱 잠수는 테왁에 물망사리를 어깨에 메고, 바다에 들려고 하여 썩은 개에 왔다가 이 무쇠석함을 발견했다.

일곱 잠수는 서로 그것을 갖겠다고 다투었다. 이것을 본 함덕리의 송첨지 영감은 그리 싸우지 말고 그 안에 든 것을 나누어 가지고 무쇠석함이나 자신에게 주라고 했다. 그래서 송첨지 영감이 무쇠석함을 세 번을 메어치니 저절로 뚜껑이 열렸다. 그 안을 보니 혀는 맬록, 눈은 팰롱, 몸뚱이가 아롱다롱한 뱀 여덟 마리가 누워 있었다. 임신한 아기씨가 뱀 일곱 마리를 낳고 뱀으로 환생한 것이다. 이것이 칠성이다.

이들은 재수 없다 하면서 이것을 이리저리 헤쳐 버렸다. 그날부터 일곱 잠수와 송첨지 영감은 몸이 아파 드러눕고 사경을 헤맸다. 하도 답답하고 괴로워 점을 치러 갔더니 ‘남의 나라에서 들어온 신을 박대한 죄목이 되니 그 신을 청하여 굿을 하라.’는 점괘가 나왔다. 일곱 잠수와 송첨지 영감이 심방을 불러다 큰굿을 했더니 [신병](/topic/신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동서로 재물이 물밀듯이 들어와 일시에 거부가 되었다. 일곱 잠수와 송첨지 영감은 서무오름 앞에 칠성당을 만들고 이 신을 계속 위했다. 이것을 본 [마을](/topic/마을) 사람들도 너도나도 모여들어 위하니 함덕마을이 삽시에 부촌이 되었다.

칠성들은 무쇠석함에 담겨 와 여기서 이만큼 얻어먹으니 좋았다. 그러나 이 함덕 마을도 한도가 있어 오래 있을 만한 곳이 못 되었다. 아무래도 제주성 안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성들은 함덕 마을을 떠나 성으로 향하였다. 성 안으로 들어와 산지(山地) 금산물 가에서 한숨 쉬고 있는데 이때 칠성골 송대장 부인이 아침 물을 길으러 왔다가 물 어귀에 누워 있는 뱀을 발견했다. 미심쩍게 생각하며 입구에 [치마](/topic/치마)를 벗어 두고 물을 길으러 들어갔다. 물을 긷고 나와 보니 치맛자락에 뱀들이 들어가 누워 있었다.

“나에게 내려진 조상님이거든 어서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송대장 부인은 뱀을 치맛자락에 싸서 고방에 갖다 모셨다. 그 뒤로 송대장 집은 부자가 되었다. 칠성이 제주성 안에 들어와 맨 처음에 송대장 집에 좌정했기 때문에 그 [골목](/topic/골목)을 ‘칠성골’이라고 부른다.

하루는 이 칠성들이 동산에 가서 누워 있는데 어떤 관원이 지나가다가 보고는 누추하고 더럽다며 침을 뱉었다. 그날부터 이 관원은 입 안이 헐어 터지고 온몸이 아파 꼭 죽게 되었다. 무녀를 불러 점을 쳐 보았더니 ‘외국에서 들어온 신을 보고 입으로 속절없는 소리를 한 죄목이니 굿을 해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관원은 그날로 제물을 차리고 굿을 시작하여 칠성을 잘 위했다. 칠성들은 잘 얻어먹고 배가 불렀다. 그래서 그 동산을 ‘배부른 동산’으로 이름 짓게 되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다니며 얻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헤어지기로 했다. 큰딸은 추수할머니, 둘째 딸은 이방과 형방 차지, 셋째 딸은 옥지기, 넷째 딸은 과원할머니, 다섯째 딸은 창[고지](/topic/고지)기, 여섯째 딸은 광청할머니로 각각 들어갔다. 그리고 일곱째 막내딸이 말했다.

“어머님, 저는 집 후원 귤나무 밑에 [주저리](/topic/주저리) 덮고 그 밑에 청기와 흑기와 속으로 부군칠성이 되어 들어가서 구시월이 되면 귤을 진상 받겠습니다. 어머님, 우리 일곱 자매를 낳아 기르려고 하니 가슴인들 답답하지 아니했겠습니까? 시원한 귤을 받아 올리거든 답답한 어머님 가슴이나 시원섭섭히 가라앉히십시오.”

일곱째 딸은 집 뒤 억대 부군칠성으로 들어서 밧칠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곡식을 지키는 고팡의 [안칠성](/topic/안칠성)으로 들어서서 모든 곡식을 거두어 지켜 주는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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