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두호마을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부산광역시 [기장](/topic/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topic/마을)의 공동체가 주관하여 한 해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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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topic/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topic/마을)의 공동체가 주관하여 한 해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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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찬
특징부산 지방의 당제 가운데 두호[마을](/topic/마을)의 당산할매제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당산할매제에 성주제와 시주제를 함께 모신다. 일반 가정에서 차례를 지낼 때 차례에 앞서 차례상 옆에서 주부가 [성주상](/topic/성주상)을 차리고 [비손](/topic/비손)하는 경우는 있지만 당산할매제 때 할매제와 더불어 성주제상과 시주(세존)[제상](/topic/제상)을 진설하는 예는 없다. 그리고 조화를 꽂는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를 놓고 지난해 놓은 것을 끄집어내는 행위와 소지를 올리지 않는 행위는 다른 지방의 당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할매제 때 할매당 앞뜰에 [용왕제](/topic/용왕제)상을 차리고 할매당 뒤의 제단에 천왕제상을 차리고 술을 한 잔 올리는 의례도 독특한 예라 할 수 있다. 어사암에서 작은 오쟁이에 제물로 쓴 메와 나물 등을 조금씩 담아 바다로 띄워 보내는 의례행위는 재액을 일으키는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을 멀리 떠나보내고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로 행하는 것이다. 이는 잡귀잡신에 대한 [헌식](/topic/헌식) 의례의 한 [가지](/topic/가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기장](/topic/기장)현읍지 (경상남도지 편찬위원회, 경상남도여지집성, 1963)
[마을](/topic/마을)신앙의 사회사 (이필영, 웅진, 1994)
동신당 (김태곤, 민속원, 1999)
부산의 당제 (김승찬 외,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특징부산 지방의 당제 가운데 두호[마을](/topic/마을)의 당산할매제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당산할매제에 성주제와 시주제를 함께 모신다. 일반 가정에서 차례를 지낼 때 차례에 앞서 차례상 옆에서 주부가 [성주상](/topic/성주상)을 차리고 [비손](/topic/비손)하는 경우는 있지만 당산할매제 때 할매제와 더불어 성주제상과 시주(세존)[제상](/topic/제상)을 진설하는 예는 없다. 그리고 조화를 꽂는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를 놓고 지난해 놓은 것을 끄집어내는 행위와 소지를 올리지 않는 행위는 다른 지방의 당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할매제 때 할매당 앞뜰에 [용왕제](/topic/용왕제)상을 차리고 할매당 뒤의 제단에 천왕제상을 차리고 술을 한 잔 올리는 의례도 독특한 예라 할 수 있다. 어사암에서 작은 오쟁이에 제물로 쓴 메와 나물 등을 조금씩 담아 바다로 띄워 보내는 의례행위는 재액을 일으키는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을 멀리 떠나보내고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로 행하는 것이다. 이는 잡귀잡신에 대한 [헌식](/topic/헌식) 의례의 한 [가지](/topic/가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기장](/topic/기장)현읍지 (경상남도지 편찬위원회, 경상남도여지집성, 1963)
[마을](/topic/마을)신앙의 사회사 (이필영, 웅진, 1994)
동신당 (김태곤, 민속원, 1999)
부산의 당제 (김승찬 외,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정의부산광역시 [기장](/topic/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topic/마을)의 공동체가 주관하여 한 해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
정의부산광역시 [기장](/topic/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topic/마을)의 공동체가 주관하여 한 해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
내용당제를 지내는 날은 옛날에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과 시월 열나흗날 자정으로 일 년에 두 차례 지냈으나 요사이에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낮 11시쯤 썰물 때에 한 차례만 지낸다.제주(祭主)도 옛날에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쯤에 무당을 불러와 [대잡이](/topic/대잡이)를 하여 선정했으나 요사이에는 음력 정월 닷샛날쯤에 이장, 어촌계장, 동부수협의 대의원 두 명, 동부산농협 대의원 한 명이 윤번제로 한 명씩 제주가 되어 제의를 주관한다. 제주가 되면 그날부터 음력 정월 말까지 금기생활을 해야 한다. 부부관계를 금해야 하며, 길흉사에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 심지어 집안 사람이 상(喪)을 당하여도 문상을 [가지](/topic/가지) 않으며, [동물](/topic/동물)의 주검 같은 것도 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옛날에는 제의 사흘 전부터 변소를 갔다 와도 찬물에 목욕재계를 하고 정결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하지만 요사이에는 하지 않는다. 아흐렛날에는 고두밥에 누룩을 버무려 그 위에 물을 붓고 제의에 사용할 제주(祭酒)를 만들어 할매당에 갖다 둔다. 열하룻날에는 왼새끼로 만든 [금줄](/topic/금줄)에 [길지](/topic/길지)(吉紙)를 20㎝ 간격으로 끼워 할매당·할배당·거릿대[장군](/topic/장군)당·공동[우물](/topic/우물)과 자기집 앞에 치고, [황토](/topic/황토)도 각 제당과 자기집 출입구 양쪽에 한 줌씩 놓는다. 열사흗날에는 [기장](/topic/기장)읍 장에 가서 제수를 사고, 가게 주인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고 와서 할매당에서 조리한다. 조리는[마을](/topic/마을) 부녀자들이 전담하되 부정을 탈까 봐 간도 보지 않고 조리한다. 제의의 차례는 할매당, 공동우물, 할배당, 가릿대장군당, 풍어제 터, 어사암 순서로 한다. 풍어제 터는‘두모포 풍어제’라는 깃발을 세우고 풍어제를 지내던 곳으로, 마을 앞 해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폭 105㎝, 높이 170㎝의 바위에 ‘두모포 풍어제터’라 음각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어사암의 본래 이름은 매바위(鷹岩)였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형승(形勝)조에 따르면 1883년(고종 20)에 수의어사(繡衣御史)인 이도재(李道宰)가 관기 월매와 여기에서 놀았다 하여 매바위를 어사암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대보름날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가 썰물 때여서 이때 마을에서 어사암까지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제의 절차는 할매당의 경우 제단에 제수를 진설하러 들어갈 때 금줄을 걷어 치우고 간다. 할매당 안에 있는 하나의 제단에 세 [제상](/topic/제상)을 진설한다. 중앙에 할매제상, 왼편에 [시주](/topic/시주)(또는 세존)제상, 오른편에 성주제상을 진설하되 시주제상에는 비린내 나는 육고[기와](/topic/기와) 어물고기는 진설하지 않는다. 신위 앞 첫 줄에는 돼지고기·수저·국·메·[시루떡](/topic/시루떡), 둘째줄에는 술잔, 셋째 줄에는 생선·[배추](/topic/배추)전·탕·[미나리](/topic/미나리)전·계란, 넷째 줄에는 [시금치](/topic/시금치)나물·무나물·고사리나물·도라지나물, 다섯째 줄에는 건어포·[대추](/topic/대추)·밤·곶감·배·[사과](/topic/사과)·귤 등을 차례로 진열한다. 먼저 세 신위 앞에 놓인 조화를 꽂은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를 한 장씩 놓은 다음 ‘나씨할매신위’라 쓴 지방을 붙인다(시주제상과 성주제상 앞에는 지방을 붙이지 않음). 제단 양쪽 가에 촛불을 밝힌 뒤 제단 아래 [향로](/topic/향로)에 향을 사르고 [헌작](/topic/헌작)한 다음 재배하고 나서 개반삽시(開飯揷匙, 메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 바닥이 오른쪽을 향하도록 꽂고 젓가락을 동쪽으로 향하게 올려놓음)하고, 잠시 있다가 다시 헌작하고 참석자 일동과 재배한 뒤에 철시부반(撤匙覆飯, 수저를 거두고 메그릇 뚜껑을 닫음)하고 [철상](/topic/철상)한다. [축문](/topic/축문)은 없다. 제주가 할매제를 올릴 때 마을의 유지 한 사람은 제당 앞에 [용왕제](/topic/용왕제)상, 또 한 사람은 제당 뒤의 돌 제단에 천왕제상을 각각 간단하게 차리고 술을 한 잔 올린 다음 재배한 뒤 철상한다. 할매당의 제의가 끝나면 지방을 태우고, [한지](/topic/한지)에 주먹밥을 여섯 개 싸서 마을 앞의 황학대 뒤쪽 포구를 향해 여섯 곳에던진다. 그다음 할배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공동우물에 술을 한 잔 올리고 할배당으로 간다. 옛날에는 제수를 [지게](/topic/지게)로 옮겼으나 요사이에는 차량을 이용한다.

할배당에 도착해서는 할매당에서 한 것처럼 제주가 금줄을 걷어 소나무에 매어 놓고, 신위 앞에 놓인 조화를 꽂은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를 한장 놓은 다음 ‘국수당할배신위’라는 지방을 붙이고 제의를 베푼다. 절차는 할매당과 같으나 한지에 주먹밥을 싸서 던지는 의례 행위는 하지 않는다. 거릿대장군당에서의 제의도 제주가 제당 앞에 친 금줄을 걷어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에 매어 놓은 뒤 신위 앞에 놓인 조화를 꽂은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 한장을 놓고 지방 없이 할미당의 제의 절차대로 행한다. 풍어제굿터는 2005년부터 제의를 베풀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주가 어포와 과실을 제단에 놓고서 절은 하지 않고 술만 한 잔 올린다. 마지막으로 어사암에서는 [주과포](/topic/주과포)를 간단히 차려서 제주가 술을 한 잔 올리고 재배한 뒤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을 떠나보내기 위해 작은 오쟁이에 제물로 쓴 메와 나물 등을 조금씩 담아 바다로 띄워 보내는 [헌식](/topic/헌식) 의례만 행한다.

모든 제의가 끝나면 할매당 앞에서 부정이 없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음복](/topic/음복)을 하면서 그해에 집집마다 고기도 많이 잡고 미역 채취가 잘되기를 [덕담](/topic/덕담)으로 나눈다. 이는 새해인사인 동시에 지연적 유대감을 돈독히 하는 행위이다. 뒷놀이는 하지 않는다. 제의 행사가 모두 끝나면 제주는 자기 집에 쳐 둔 금줄을 거두어 태워 없앤다. 2009년의 제수 구입비는 약 100만 원이 들었다. 이 경비는 마을개발위원회와 어촌계에서 반반씩 갹출하며, 결산은 음복할 때나 날을 받아 행한다. 두모마을에서는 5년에 한 번 축제적 성격을띤 풍어제([별신굿](/topic/별신굿))를 정월 초순에 행한다.
내용당제를 지내는 날은 옛날에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과 시월 열나흗날 자정으로 일 년에 두 차례 지냈으나 요사이에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낮 11시쯤 썰물 때에 한 차례만 지낸다.제주(祭主)도 옛날에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쯤에 무당을 불러와 [대잡이](/topic/대잡이)를 하여 선정했으나 요사이에는 음력 정월 닷샛날쯤에 이장, 어촌계장, 동부수협의 대의원 두 명, 동부산농협 대의원 한 명이 윤번제로 한 명씩 제주가 되어 제의를 주관한다. 제주가 되면 그날부터 음력 정월 말까지 금기생활을 해야 한다. 부부관계를 금해야 하며, 길흉사에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 심지어 집안 사람이 상(喪)을 당하여도 문상을 [가지](/topic/가지) 않으며, [동물](/topic/동물)의 주검 같은 것도 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옛날에는 제의 사흘 전부터 변소를 갔다 와도 찬물에 목욕재계를 하고 정결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하지만 요사이에는 하지 않는다. 아흐렛날에는 고두밥에 누룩을 버무려 그 위에 물을 붓고 제의에 사용할 제주(祭酒)를 만들어 할매당에 갖다 둔다. 열하룻날에는 왼새끼로 만든 [금줄](/topic/금줄)에 [길지](/topic/길지)(吉紙)를 20㎝ 간격으로 끼워 할매당·할배당·거릿대[장군](/topic/장군)당·공동[우물](/topic/우물)과 자기집 앞에 치고, [황토](/topic/황토)도 각 제당과 자기집 출입구 양쪽에 한 줌씩 놓는다. 열사흗날에는 [기장](/topic/기장)읍 장에 가서 제수를 사고, 가게 주인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고 와서 할매당에서 조리한다. 조리는[마을](/topic/마을) 부녀자들이 전담하되 부정을 탈까 봐 간도 보지 않고 조리한다. 제의의 차례는 할매당, 공동우물, 할배당, 가릿대장군당, 풍어제 터, 어사암 순서로 한다. 풍어제 터는‘두모포 풍어제’라는 깃발을 세우고 풍어제를 지내던 곳으로, 마을 앞 해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폭 105㎝, 높이 170㎝의 바위에 ‘두모포 풍어제터’라 음각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어사암의 본래 이름은 매바위(鷹岩)였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형승(形勝)조에 따르면 1883년(고종 20)에 수의어사(繡衣御史)인 이도재(李道宰)가 관기 월매와 여기에서 놀았다 하여 매바위를 어사암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대보름날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가 썰물 때여서 이때 마을에서 어사암까지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제의 절차는 할매당의 경우 제단에 제수를 진설하러 들어갈 때 금줄을 걷어 치우고 간다. 할매당 안에 있는 하나의 제단에 세 [제상](/topic/제상)을 진설한다. 중앙에 할매제상, 왼편에 [시주](/topic/시주)(또는 세존)제상, 오른편에 성주제상을 진설하되 시주제상에는 비린내 나는 육고[기와](/topic/기와) 어물고기는 진설하지 않는다. 신위 앞 첫 줄에는 돼지고기·수저·국·메·[시루떡](/topic/시루떡), 둘째줄에는 술잔, 셋째 줄에는 생선·[배추](/topic/배추)전·탕·[미나리](/topic/미나리)전·계란, 넷째 줄에는 [시금치](/topic/시금치)나물·무나물·고사리나물·도라지나물, 다섯째 줄에는 건어포·[대추](/topic/대추)·밤·곶감·배·[사과](/topic/사과)·귤 등을 차례로 진열한다. 먼저 세 신위 앞에 놓인 조화를 꽂은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를 한 장씩 놓은 다음 ‘나씨할매신위’라 쓴 지방을 붙인다(시주제상과 성주제상 앞에는 지방을 붙이지 않음). 제단 양쪽 가에 촛불을 밝힌 뒤 제단 아래 [향로](/topic/향로)에 향을 사르고 [헌작](/topic/헌작)한 다음 재배하고 나서 개반삽시(開飯揷匙, 메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 바닥이 오른쪽을 향하도록 꽂고 젓가락을 동쪽으로 향하게 올려놓음)하고, 잠시 있다가 다시 헌작하고 참석자 일동과 재배한 뒤에 철시부반(撤匙覆飯, 수저를 거두고 메그릇 뚜껑을 닫음)하고 [철상](/topic/철상)한다. [축문](/topic/축문)은 없다. 제주가 할매제를 올릴 때 마을의 유지 한 사람은 제당 앞에 [용왕제](/topic/용왕제)상, 또 한 사람은 제당 뒤의 돌 제단에 천왕제상을 각각 간단하게 차리고 술을 한 잔 올린 다음 재배한 뒤 철상한다. 할매당의 제의가 끝나면 지방을 태우고, [한지](/topic/한지)에 주먹밥을 여섯 개 싸서 마을 앞의 황학대 뒤쪽 포구를 향해 여섯 곳에던진다. 그다음 할배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공동우물에 술을 한 잔 올리고 할배당으로 간다. 옛날에는 제수를 [지게](/topic/지게)로 옮겼으나 요사이에는 차량을 이용한다.

할배당에 도착해서는 할매당에서 한 것처럼 제주가 금줄을 걷어 소나무에 매어 놓고, 신위 앞에 놓인 조화를 꽂은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를 한장 놓은 다음 ‘국수당할배신위’라는 지방을 붙이고 제의를 베푼다. 절차는 할매당과 같으나 한지에 주먹밥을 싸서 던지는 의례 행위는 하지 않는다. 거릿대장군당에서의 제의도 제주가 제당 앞에 친 금줄을 걷어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에 매어 놓은 뒤 신위 앞에 놓인 조화를 꽂은 오지그릇 밑에 1,000원짜리 새 지폐 한장을 놓고 지방 없이 할미당의 제의 절차대로 행한다. 풍어제굿터는 2005년부터 제의를 베풀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주가 어포와 과실을 제단에 놓고서 절은 하지 않고 술만 한 잔 올린다. 마지막으로 어사암에서는 [주과포](/topic/주과포)를 간단히 차려서 제주가 술을 한 잔 올리고 재배한 뒤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을 떠나보내기 위해 작은 오쟁이에 제물로 쓴 메와 나물 등을 조금씩 담아 바다로 띄워 보내는 [헌식](/topic/헌식) 의례만 행한다.

모든 제의가 끝나면 할매당 앞에서 부정이 없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음복](/topic/음복)을 하면서 그해에 집집마다 고기도 많이 잡고 미역 채취가 잘되기를 [덕담](/topic/덕담)으로 나눈다. 이는 새해인사인 동시에 지연적 유대감을 돈독히 하는 행위이다. 뒷놀이는 하지 않는다. 제의 행사가 모두 끝나면 제주는 자기 집에 쳐 둔 금줄을 거두어 태워 없앤다. 2009년의 제수 구입비는 약 100만 원이 들었다. 이 경비는 마을개발위원회와 어촌계에서 반반씩 갹출하며, 결산은 음복할 때나 날을 받아 행한다. 두모마을에서는 5년에 한 번 축제적 성격을띤 풍어제([별신굿](/topic/별신굿))를 정월 초순에 행한다.
역사1510년(중종 5)에 두모포영(豆毛浦營)이 죽성리에 설치되었다가 1592년(선조 25)에 부산 수정동 해안으로 옮겨졌으며, 17세기 중엽에 나씨(羅氏) 할매가 죽성리의 이곳에 들어와 두호(두모)[마을](/topic/마을)을 일으켰다고 한다. 마을을 일으킨 나씨 할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마을의 동북쪽 바닷가에 맞배[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에 블록으로 벽을 쌓은 면적3.3㎡ 정도의 할매당을 지어 받들어 모시게 된 데서 당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뒤 마을 뒤편 국수봉에 국태민안과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맞배기와지붕에 돌과 시멘트로 벽을 쌓은 면적 1.7㎡ 정도의 할배당을 지었다. 할배당은 ‘국수당’ 또는 ‘국시당’이라고도 칭한다. 당집 뒤에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0호’인 수령 230여 년으로 추정되는 해송 네 그루가 한 그루처럼 서 있다. 또 월전마을에서 두호마을로 들어오는 길 옆에는 역질과 잡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장승을 세웠다가 1933년에 장승 대신 면적 1.7㎡ 정도의 맞배기와지붕에 블록으로 벽을 쌓은 거릿대[장군](/topic/장군)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할매당·할배당·거릿대장군당이 낡아 [기장](/topic/기장)군청의 지원을 받아 할매당은 2005년 2월, 할배당과 거릿대 장군당은 2007년 7월에 각각 원형을 살려 새롭게 보수하였다. 본래 제단은 나무판이었으나 보수하면서 대리석판으로 바꾼 것만 다르다.
역사1510년(중종 5)에 두모포영(豆毛浦營)이 죽성리에 설치되었다가 1592년(선조 25)에 부산 수정동 해안으로 옮겨졌으며, 17세기 중엽에 나씨(羅氏) 할매가 죽성리의 이곳에 들어와 두호(두모)[마을](/topic/마을)을 일으켰다고 한다. 마을을 일으킨 나씨 할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마을의 동북쪽 바닷가에 맞배[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에 블록으로 벽을 쌓은 면적3.3㎡ 정도의 할매당을 지어 받들어 모시게 된 데서 당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뒤 마을 뒤편 국수봉에 국태민안과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맞배기와지붕에 돌과 시멘트로 벽을 쌓은 면적 1.7㎡ 정도의 할배당을 지었다. 할배당은 ‘국수당’ 또는 ‘국시당’이라고도 칭한다. 당집 뒤에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0호’인 수령 230여 년으로 추정되는 해송 네 그루가 한 그루처럼 서 있다. 또 월전마을에서 두호마을로 들어오는 길 옆에는 역질과 잡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장승을 세웠다가 1933년에 장승 대신 면적 1.7㎡ 정도의 맞배기와지붕에 블록으로 벽을 쌓은 거릿대[장군](/topic/장군)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할매당·할배당·거릿대장군당이 낡아 [기장](/topic/기장)군청의 지원을 받아 할매당은 2005년 2월, 할배당과 거릿대 장군당은 2007년 7월에 각각 원형을 살려 새롭게 보수하였다. 본래 제단은 나무판이었으나 보수하면서 대리석판으로 바꾼 것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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