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목계별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topic/마을)에서 남한강 상권의 강화와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정기적으로 치른 축제형 마을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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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topic/마을)에서 남한강 상권의 강화와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정기적으로 치른 축제형 마을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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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식
정의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topic/마을)에서 남한강 상권의 강화와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정기적으로 치른 축제형 마을제사.
정의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topic/마을)에서 남한강 상권의 강화와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정기적으로 치른 축제형 마을제사.
내용목계별신제는 당고사-배고사-별신제-[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등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당고사는 성황제의 제의 양상을 띠고 있다. 제장은 목계인도교 옆 봉제산(봉산, 부엉산, 부흥산 등)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양식의 부흥당(富興堂)이다. 당내에는 가운데 정면에 서낭각시도, 오른쪽에 용신도(龍神圖), 왼쪼에 산신도(山神圖)를 각각 [봉안](/topic/봉안)하고 있다. 당고사는 원래 정월 초닷샛날부터 초열흘날까지 지속되었다. 정월 초닷새 즈음에 [단골](/topic/단골)무당이 [광대](/topic/광대)와 [악사](/topic/악사)를 대동하고 사흘 동안 광대놀이를 하였다. 정월 초아흐렛날에는 아침부터 각 가정을 돌며 지신을 밟는 등으로 축원을 하였으며, 밤에는 [제관](/topic/제관)의 집에서 안반굿(案盤-)을 하였다.

그러나 남한강의 수운이 쇠퇴하면서 지역의 경기가 침체되자, 1960년대에 [마을](/topic/마을)회의를 열어 제일을 정월 초아흐렛날로 고정하였다. 오늘날에는 제관의 선출이 엄격하지 않다. 한 해 동안 특별하게 부정한 일이 없으면 관례적으로 마을 최고 원로와 이장[구장]이 맡는다. 제물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2000년쯤만 해도 무당이 ‘조배술’을 당 안에서 직접 담그는 등 진설의 원칙에 충실했지만 오늘날에는 여느 지역의 동제와 마찬[가지](/topic/가지)로 약식의 제물을 진설한다.

제의 당일 해질 무렵 오후 7~8시에 마을원로 및 제관 등이 복색을 갖추고 무당과 함께 제장으로 올라 촛불을 밝히고 향을 지핀 다음 본격적으로 의례를 행한다. 유교식 예법에 따라 제물을 진설한 뒤 무당이 를 구송하여 제장을 정화시킨다. 제차(祭次)는 시종 엄숙하며,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재배-축-소지 순으로 유교식 진행이다. 제의 후 약간의 떡을 떼어 놓고 하산한다.


2. 배고사는 남한강의 용신을 대상 신격으로 하여 ‘운항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이 때문에 제장을 용신과 조우할 수 있는 목계강변의 나루터[선착장]로 삼았다. 제일은 정월 열나흗날로 고정하였다. 정월에 당고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뱃사람은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의 제의를 통해 자신들의 기원을 용왕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에 따라 선주나 뱃사람이 직접 제관 역할을 하였다.

제일 보름 전부터 나루터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이곳을 통과하는 뱃사람들에게 경비를 갹출하여 제물을 마련하였다. 참고로 목계나루가 한창 활기를 띠고 있던 1909년의 자료를 살펴보면 한 해에 목계지역을 통과한 배는 무려 827척이었다. 이 가운데 441척은 청풍, 71척은 단양, 65척은 영월을 넘어 영춘까지 각각 왕래하였다.

행례는 제일 보름 전에 선착장에 금줄을 둘러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전통신앙의 관념 속에서 뱃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관장하고 있는 용왕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운항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모두가 제의에 참여했다. 유교식 제차에 의해 의례를 마친 뒤 약간의 음식을 떼어내 놓는 식의 진행이었지만 누구든 용왕에게 배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따라 당고사보다 훨씬 성대하고 요란했다.


3. 별신제는 지역의 상권 활성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제의이다. 보통 3~4년을 주기로 사월초파일을 전후한 2~3일 동안 영신굿-오신굿-송신굿 순으로 굿판을 벌였다. 지역의 동회장을 중심으로 중원 지역은 물론 전국 팔도의 무당들이 제의를 주관하였다. 무엇보다 팔도의 명무(名巫)들이 자신들의 기예를 선보이면서 다양한 축원을 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지역민은 물론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던 상인, 인근 지역의 외지인들까지 한데 어울려 흥청댈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목계별신제가 제공했다. 중원의 모든 무당이 별신제를 주관했다는 김춘식의 1985년 기록자료를 통해 별신제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근대화가 진척되면서 원형을 갖춘 별신제가 단절되었다. 1925~1930년에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와 충주~조치원 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는 점차 시들어져 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별신제의 명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4. 줄다리기는 3년을 주기로 2월 말경에서 3월 초순 사이에 4~5일 동안 행하였다. 인근의 각 동리뿐만 아니라 충주, 원주, 장호원 등지에서 [[농악](/topic/농악)기](/topic/농악기)를 앞세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줄은 정월 [농한기](/topic/농한기)를 이용하여 짚으로 꼬았다. 동편[동계․내계]은 동편, 서편[서계]은 서편에서 각각 짚을 마련하였다. 약 800더미의 짚을 마련하였으며, 짚을 마련하는 데에만 20여 일이 소요되었다. 동편은 평산, 서편은 샘터산에서 각각 10여 일 동안 줄을 꼬았다. 일단 상속회(원줄)만 꼰 뒤에 강변으로 나가서 종속회[매기수염]를 꼬았다. 상속회를 꼴 때는 산자틀을 이용하였다. 비녀목은 남성을 상징하는 동편에서 마련하였다. 재질은 소나무 내지 향나무를 사용하였다. 줄[용신]은 한쪽의 길이가 100여 척에 이르는 쌍줄이었으며, 표면에는 상중석회를 붙였다. 상속에서 종속회[매기수염]를 한 가닥씩 뽑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상속회가 가늘어졌다. 용두[용마루․용머리]의 길이는 7척가량이었으며, 용목의 굵기는 1~1.5척 되었다. 곁줄의 굵기는 5㎝쯤 되었으며, 칡을 합해 묶었다. 이렇게 꼰 줄의 한쪽 길이가 70~80m였다.

연행 공간은 남한강변의 공터를 삼았다. 이곳을 흔히 ‘줄터’라고 불렀다. 편은 동과 서로 나누었다. 동편은 동계와 내계를 아울러 구성하였으며, 서편은 서계 단독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동남서녀(東男西女) 및 남청여홍(男靑女紅)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엄격하였기 때문에 동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겼다. 각 편에서 두세 명의 편장을 선출하였고, 이들 가운데에서 도편장을 선출하였다. 줄다리기 경합에 앞서, 이장[구장] 및 마을원로가 주축이 되어 약식의 당고사를 지냈다.

줄꾼들이 도편장의 지휘에 따라 일정 지점까지 이동하여 양편이 마주서게 되면 본격적으로 용두를 걸었다. 양편의 줄꾼들이 어느 정도 다가서면 한 편의 도편장이 ‘술렁수’를 띄웠다. 이때 상대편에서는 “꼴레꼴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암줄과 숫줄이 처음으로 맞닿게 되면 양편의 줄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이런 과정을 보통 세 번 거치고 나서야 “줄을 걸자”는 도편장의 구호가 떨어지며, 이어 “눕혀! 당겨!” 하는 등의 지시에 따라 용두를 걸게 된다. 양편의 승강이가 때로는 [석전](/topic/석전)(石戰)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줄을 당기기 시작하면 남성을 상징하는 동편[동계와 내계]의 승리가 이미 보장되었더라도 줄꾼들은 온 힘을 다해 줄을 당겼다. 더욱이 승벽이 매우 심해 동편은 “서편은 동에 똥물 먹고 죽어라!”, 서편은 “동편은 서에 똥물 먹고 죽어라!”며 서로 상대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여성들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치마](/topic/치마)폭에 자갈을 싸안으면서까지 악착같이 줄을 당길 정도였다. 줄의 움직임에 따라 도편장이 휴전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때 불리한 쪽에서는 경기 지역이나 강원 지역에 청병을 하기도 하였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그대로 두어 장마에 용처럼 떠내려가도록 하였다.
참고문헌목계지역의 민속고 (류덕균, 중원어문학 1,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회, 1976)
한국민속종합보고서-충청북도 (문화재관리국, 1978)
중원의 역사와 문화유적 (김현길, 청지사, 1984)
목계 부흥당 당고사 (이노영, 전통문화발굴, 예성문화동호회, 1994)
충북의 민속문화 (이창식, 충청북도·忠北學硏究所, 2001)
한국의 보부상 (이창식, 밀알, 2001)
목계의 정신과 문화 (김경렬, 목계향우회, 2002)
東國文獻備考,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목계별신제 조사연구 (이창식, 충주문화원, 2004)
내용목계별신제는 당고사-배고사-별신제-[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등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당고사는 성황제의 제의 양상을 띠고 있다. 제장은 목계인도교 옆 봉제산(봉산, 부엉산, 부흥산 등)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양식의 부흥당(富興堂)이다. 당내에는 가운데 정면에 서낭각시도, 오른쪽에 용신도(龍神圖), 왼쪼에 산신도(山神圖)를 각각 [봉안](/topic/봉안)하고 있다. 당고사는 원래 정월 초닷샛날부터 초열흘날까지 지속되었다. 정월 초닷새 즈음에 [단골](/topic/단골)무당이 [광대](/topic/광대)와 [악사](/topic/악사)를 대동하고 사흘 동안 광대놀이를 하였다. 정월 초아흐렛날에는 아침부터 각 가정을 돌며 지신을 밟는 등으로 축원을 하였으며, 밤에는 [제관](/topic/제관)의 집에서 안반굿(案盤-)을 하였다.

그러나 남한강의 수운이 쇠퇴하면서 지역의 경기가 침체되자, 1960년대에 [마을](/topic/마을)회의를 열어 제일을 정월 초아흐렛날로 고정하였다. 오늘날에는 제관의 선출이 엄격하지 않다. 한 해 동안 특별하게 부정한 일이 없으면 관례적으로 마을 최고 원로와 이장[구장]이 맡는다. 제물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2000년쯤만 해도 무당이 ‘조배술’을 당 안에서 직접 담그는 등 진설의 원칙에 충실했지만 오늘날에는 여느 지역의 동제와 마찬[가지](/topic/가지)로 약식의 제물을 진설한다.

제의 당일 해질 무렵 오후 7~8시에 마을원로 및 제관 등이 복색을 갖추고 무당과 함께 제장으로 올라 촛불을 밝히고 향을 지핀 다음 본격적으로 의례를 행한다. 유교식 예법에 따라 제물을 진설한 뒤 무당이 를 구송하여 제장을 정화시킨다. 제차(祭次)는 시종 엄숙하며,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재배-축-소지 순으로 유교식 진행이다. 제의 후 약간의 떡을 떼어 놓고 하산한다.


2. 배고사는 남한강의 용신을 대상 신격으로 하여 ‘운항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이 때문에 제장을 용신과 조우할 수 있는 목계강변의 나루터[선착장]로 삼았다. 제일은 정월 열나흗날로 고정하였다. 정월에 당고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뱃사람은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의 제의를 통해 자신들의 기원을 용왕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에 따라 선주나 뱃사람이 직접 제관 역할을 하였다.

제일 보름 전부터 나루터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이곳을 통과하는 뱃사람들에게 경비를 갹출하여 제물을 마련하였다. 참고로 목계나루가 한창 활기를 띠고 있던 1909년의 자료를 살펴보면 한 해에 목계지역을 통과한 배는 무려 827척이었다. 이 가운데 441척은 청풍, 71척은 단양, 65척은 영월을 넘어 영춘까지 각각 왕래하였다.

행례는 제일 보름 전에 선착장에 금줄을 둘러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전통신앙의 관념 속에서 뱃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관장하고 있는 용왕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운항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모두가 제의에 참여했다. 유교식 제차에 의해 의례를 마친 뒤 약간의 음식을 떼어내 놓는 식의 진행이었지만 누구든 용왕에게 배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따라 당고사보다 훨씬 성대하고 요란했다.


3. 별신제는 지역의 상권 활성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제의이다. 보통 3~4년을 주기로 사월초파일을 전후한 2~3일 동안 영신굿-오신굿-송신굿 순으로 굿판을 벌였다. 지역의 동회장을 중심으로 중원 지역은 물론 전국 팔도의 무당들이 제의를 주관하였다. 무엇보다 팔도의 명무(名巫)들이 자신들의 기예를 선보이면서 다양한 축원을 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지역민은 물론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던 상인, 인근 지역의 외지인들까지 한데 어울려 흥청댈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목계별신제가 제공했다. 중원의 모든 무당이 별신제를 주관했다는 김춘식의 1985년 기록자료를 통해 별신제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근대화가 진척되면서 원형을 갖춘 별신제가 단절되었다. 1925~1930년에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와 충주~조치원 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는 점차 시들어져 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별신제의 명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4. 줄다리기는 3년을 주기로 2월 말경에서 3월 초순 사이에 4~5일 동안 행하였다. 인근의 각 동리뿐만 아니라 충주, 원주, 장호원 등지에서 [[농악](/topic/농악)기](/topic/농악기)를 앞세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줄은 정월 [농한기](/topic/농한기)를 이용하여 짚으로 꼬았다. 동편[동계․내계]은 동편, 서편[서계]은 서편에서 각각 짚을 마련하였다. 약 800더미의 짚을 마련하였으며, 짚을 마련하는 데에만 20여 일이 소요되었다. 동편은 평산, 서편은 샘터산에서 각각 10여 일 동안 줄을 꼬았다. 일단 상속회(원줄)만 꼰 뒤에 강변으로 나가서 종속회[매기수염]를 꼬았다. 상속회를 꼴 때는 산자틀을 이용하였다. 비녀목은 남성을 상징하는 동편에서 마련하였다. 재질은 소나무 내지 향나무를 사용하였다. 줄[용신]은 한쪽의 길이가 100여 척에 이르는 쌍줄이었으며, 표면에는 상중석회를 붙였다. 상속에서 종속회[매기수염]를 한 가닥씩 뽑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상속회가 가늘어졌다. 용두[용마루․용머리]의 길이는 7척가량이었으며, 용목의 굵기는 1~1.5척 되었다. 곁줄의 굵기는 5㎝쯤 되었으며, 칡을 합해 묶었다. 이렇게 꼰 줄의 한쪽 길이가 70~80m였다.

연행 공간은 남한강변의 공터를 삼았다. 이곳을 흔히 ‘줄터’라고 불렀다. 편은 동과 서로 나누었다. 동편은 동계와 내계를 아울러 구성하였으며, 서편은 서계 단독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동남서녀(東男西女) 및 남청여홍(男靑女紅)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엄격하였기 때문에 동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겼다. 각 편에서 두세 명의 편장을 선출하였고, 이들 가운데에서 도편장을 선출하였다. 줄다리기 경합에 앞서, 이장[구장] 및 마을원로가 주축이 되어 약식의 당고사를 지냈다.

줄꾼들이 도편장의 지휘에 따라 일정 지점까지 이동하여 양편이 마주서게 되면 본격적으로 용두를 걸었다. 양편의 줄꾼들이 어느 정도 다가서면 한 편의 도편장이 ‘술렁수’를 띄웠다. 이때 상대편에서는 “꼴레꼴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암줄과 숫줄이 처음으로 맞닿게 되면 양편의 줄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이런 과정을 보통 세 번 거치고 나서야 “줄을 걸자”는 도편장의 구호가 떨어지며, 이어 “눕혀! 당겨!” 하는 등의 지시에 따라 용두를 걸게 된다. 양편의 승강이가 때로는 [석전](/topic/석전)(石戰)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줄을 당기기 시작하면 남성을 상징하는 동편[동계와 내계]의 승리가 이미 보장되었더라도 줄꾼들은 온 힘을 다해 줄을 당겼다. 더욱이 승벽이 매우 심해 동편은 “서편은 동에 똥물 먹고 죽어라!”, 서편은 “동편은 서에 똥물 먹고 죽어라!”며 서로 상대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여성들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치마](/topic/치마)폭에 자갈을 싸안으면서까지 악착같이 줄을 당길 정도였다. 줄의 움직임에 따라 도편장이 휴전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때 불리한 쪽에서는 경기 지역이나 강원 지역에 청병을 하기도 하였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그대로 두어 장마에 용처럼 떠내려가도록 하였다.
참고문헌목계지역의 민속고 (류덕균, 중원어문학 1,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회, 1976)
한국민속종합보고서-충청북도 (문화재관리국, 1978)
중원의 역사와 문화유적 (김현길, 청지사, 1984)
목계 부흥당 당고사 (이노영, 전통문화발굴, 예성문화동호회, 1994)
충북의 민속문화 (이창식, 충청북도·忠北學硏究所, 2001)
한국의 보부상 (이창식, 밀알, 2001)
목계의 정신과 문화 (김경렬, 목계향우회, 2002)
東國文獻備考,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목계별신제 조사연구 (이창식, 충주문화원, 2004)
역사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topic/마을)은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목계마을이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로 떠올라 성황을 누릴 수 있은 원인은 ‘가흥창(嘉興倉)의 설치와 존속’에 있다. 가흥창은 지금의 목계교에서 하류로 약간 내려간 지점의 강변에 있던 조선시대 조창(租倉)으로, 1465(세조 11)에 설치되어 개항 전까지 존속했다. 가흥창에 수납된 세곡은 남한강 물길을 따라 서울의 용산창까지 운송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부터 대부분의 장시가 5일장의 정기성을 띠게 되자 목계마을의 경우 고려 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속된 관 주도에 의한 상업활동에 기반을 두고 민간에 의한 상업활동이 보태지면서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대단위 장시가 형성되었다.

목계마을 장시의 확대는 새로운 장시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누구든 이곳에 모여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면서 현실적 억압을 풀었고, 잔치를 벌이거나 공동 놀이를 통해 결속을 다지면서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났다. 주색잡기와 음주가무가 부합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투전](/topic/투전)이나 [골패](/topic/골패) 등 도박은 물론 상업적 성격이 강한 유흥 공간이 마련되었다. 기녀의 [노랫가락](/topic/노랫가락)이 우선하였지만 봉건사회의 분화에 따라 토지를 잃고 유랑하며 걸식하는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광대](/topic/광대)짓을 하는 [[사당](/topic/사당)패](/topic/사당패)나 [걸립패](/topic/걸립패)도 목계마을 장시의 유흥을 돋우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들의 연희에 상업적인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부상이나 객주들의 참여가 이루어짐으로써 장시의 활성화는 물론 유흥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목계마을의 장시는 근대화 과정의 발달과 비례하여 쇠퇴하였다. 1925~1930년에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와 충주~조치원 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는 점차 시들어졌고, 1973년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되면서 나룻배도 사라졌다. 더욱이 이 지역을 통째로 휩쓸고 간 1936년의 대홍수에 의해 장시의 건물 200여 채가 파손되었다. 한 해 뱃길의 무사와 상권의 활성화를 기원하던 배고사나 별신제도 사라졌고, 대규모의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나 남사당놀음도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삼거리에 세워 놓은 ‘목계 줄다리기와 별신제 유래비’를 통해 이전의 번성함을 짐작할 뿐이다. 전문에는 내륙 팔도에서 가장 흥청댄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중원문화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다는 지역적 자부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도시가 융성한 만큼 상권의 활성화 및 그 보존을 위한 당고사·배고사·별신제를 올렸으며, 난장을 벌여 놓고 [남사당패](/topic/남사당패)를 불러들인 가운데 대규모의 줄다리기를 행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는 목계문화역사마을가꾸기를 통해 주민들 중심으로 문화체험관과 마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topic/마을)은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목계마을이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로 떠올라 성황을 누릴 수 있은 원인은 ‘가흥창(嘉興倉)의 설치와 존속’에 있다. 가흥창은 지금의 목계교에서 하류로 약간 내려간 지점의 강변에 있던 조선시대 조창(租倉)으로, 1465(세조 11)에 설치되어 개항 전까지 존속했다. 가흥창에 수납된 세곡은 남한강 물길을 따라 서울의 용산창까지 운송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부터 대부분의 장시가 5일장의 정기성을 띠게 되자 목계마을의 경우 고려 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속된 관 주도에 의한 상업활동에 기반을 두고 민간에 의한 상업활동이 보태지면서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대단위 장시가 형성되었다.

목계마을 장시의 확대는 새로운 장시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누구든 이곳에 모여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면서 현실적 억압을 풀었고, 잔치를 벌이거나 공동 놀이를 통해 결속을 다지면서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났다. 주색잡기와 음주가무가 부합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투전](/topic/투전)이나 [골패](/topic/골패) 등 도박은 물론 상업적 성격이 강한 유흥 공간이 마련되었다. 기녀의 [노랫가락](/topic/노랫가락)이 우선하였지만 봉건사회의 분화에 따라 토지를 잃고 유랑하며 걸식하는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광대](/topic/광대)짓을 하는 [[사당](/topic/사당)패](/topic/사당패)나 [걸립패](/topic/걸립패)도 목계마을 장시의 유흥을 돋우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들의 연희에 상업적인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부상이나 객주들의 참여가 이루어짐으로써 장시의 활성화는 물론 유흥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목계마을의 장시는 근대화 과정의 발달과 비례하여 쇠퇴하였다. 1925~1930년에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와 충주~조치원 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는 점차 시들어졌고, 1973년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되면서 나룻배도 사라졌다. 더욱이 이 지역을 통째로 휩쓸고 간 1936년의 대홍수에 의해 장시의 건물 200여 채가 파손되었다. 한 해 뱃길의 무사와 상권의 활성화를 기원하던 배고사나 별신제도 사라졌고, 대규모의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나 남사당놀음도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삼거리에 세워 놓은 ‘목계 줄다리기와 별신제 유래비’를 통해 이전의 번성함을 짐작할 뿐이다. 전문에는 내륙 팔도에서 가장 흥청댄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중원문화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다는 지역적 자부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도시가 융성한 만큼 상권의 활성화 및 그 보존을 위한 당고사·배고사·별신제를 올렸으며, 난장을 벌여 놓고 [남사당패](/topic/남사당패)를 불러들인 가운데 대규모의 줄다리기를 행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는 목계문화역사마을가꾸기를 통해 주민들 중심으로 문화체험관과 마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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