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비동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비동[마을](/topic/마을)의 당제. 금곡리는 청도지역에서 비교적 크고 부유했으며 천왕기의 세력도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마을이었으나 사회 변동 속에서 당제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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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비동[마을](/topic/마을)의 당제. 금곡리는 청도지역에서 비교적 크고 부유했으며 천왕기의 세력도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마을이었으나 사회 변동 속에서 당제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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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정의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비동[마을](/topic/마을)의 당제. 금곡리는 청도지역에서 비교적 크고 부유했으며 천왕기의 세력도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마을이었으나 사회 변동 속에서 당제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정의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비동[마을](/topic/마을)의 당제. 금곡리는 청도지역에서 비교적 크고 부유했으며 천왕기의 세력도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마을이었으나 사회 변동 속에서 당제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참고문헌산간신앙 2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내용1. 제당과 대상 신 : 제당을 당산 또는 [서낭당](/topic/서낭당)이라고 한다. 당산에 있는 제당의 형태는 골[기와](/topic/기와)로 잘 지어진 당집이다. 당산에 모시는 신은 ‘서낭 할배’라고 부른다. 당집에는 [현판](/topic/현판)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으며, 상량에는 ‘崇禎紀元後四戊辰癸亥八月十一日巳時堅主上樑 課癸亥辛酉乙亥辛巳’라고 적혀 있어서 1868년(고종 5)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집은 기와[지붕](/topic/지붕)과 나무로 된 한 칸짜리 목조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220㎝와 측면 190㎝, 지붕은 정면 274㎝와 측면 370㎝, [처마](/topic/처마)까지의 높이는 310㎝이다. 당집에는 한 짝의 [여닫이](/topic/여닫이)문이 있고, 당집 안에는 [제상](/topic/제상)과 [향로](/topic/향로)대가 있다. 내부의 뒤쪽에는 세로로 작은 나무가 있고, 거기에는 [한지](/topic/한지)를 매년 감아두어서 두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한지가 말아져 있는 이 속에는 천왕기가 있다. 예전에는 천왕기를 매년 사용한 다음에 감아 놓았다고 한다. 당집의 양 측면과 뒷면은 기와와 돌로 담이 쳐져 있다. 당집 앞쪽은 낮고 넓게 3단으로 [계단](/topic/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천왕기는 직사각형이고, 밑에는 꼬리가 달려 있다. 천왕기의 바깥 부분은 남색, 안쪽은 홍색이다. 꼬리는 흰색이면서 3개가 있다. 천왕기가 달려 있는 [천왕대](/topic/천왕대)는 예전에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풍각면에서 풍물을 치며 행사할 때 [마을](/topic/마을)에서 앞세워 들고 나온 천왕대 가운데 하나이다. 이 대보름 행사에는 [씨름](/topic/씨름)이나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등을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당집을 짓기 전에는 그곳에 있는 당나무 옆에 서낭으로 여겨지던 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 돌은 당집 바로 옆 담에 세워져 있다. 이 돌은 넓적하고 둥글며, 긴 쪽의 길이가 70㎝ 정도이다.

금곡리 비동 당산의 서낭은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의 서낭과 내외지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다. 금곡리의 서낭이 외서낭이고,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의 서낭은 내서낭이며 ‘연하(軟河)[각시](/topic/각시)’라고 한다. 외서낭과 내서낭은 서로 사이가 좋아서 한 번 천왕대가 붙으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월대보름 행사에서 만났을 때 천왕대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여 힘으로 떼어내려다 천왕대가 부러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신(神)의 힘이 무척 세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 뒤로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제를 통하여 분동(分洞)과 같은 마을 간의 상호 연계성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금곡리에는 원래 지금의 서낭당을 제외하고 ‘앞당’이라는 또 다른 제당이 있다. ‘앞당’은 마을 바로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 자리 잡고 있다. 당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종은 소나무이다. 예전에는 다섯 그루였으나 지금은 세 그루이다. 이 ‘앞당’의 제의에는 메도 없고 [축문](/topic/축문)도 매우 짧을 정도로 간단하다.


2. 제의 절차 : 이 마을의 제의는 ‘당제’라고 부르며, 마을에 질병이 없고 농사가 풍년 들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제는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맞추어 [제관](/topic/제관)을 뽑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기 때문에 1993년부터 반별(班別)로 돌아가면서 교대로 맡아 지내고 있다. 금곡리는 8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제는 음력 정월 열사흗날 자정에 행한다. 당제의 축문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축관이 축문을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축문을 펴 놓고 매구를 치면서 빌기만 할 뿐이다.

제관은 선출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정성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 내지 닷새 전에 마을회의에서 선출된다. 제관은 [헌관](/topic/헌관) 한 명, 축관 한 명, 조비(助裨) 세 명이다. 이들은 20~60세 남자 가운데 선출된다. 헌관과 축관은 모든 가족의 생기복덕에 맞추어 엄격하게 선정한다. 그러나 허드렛일을 돕기 위한 보조원인 조비는 생기복덕과 무관하며, 젊은 사람 가운데에서 선정한다.

제물은 ‘원집’이라고 불리는 집에서 금기를 엄수하며 장만한다. 과거에는 동네 토지를 주어서 경작하게 하고, 그 [수확](/topic/수확)물은 당제를 지내는 데에만 사용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봉토로 한 [마지기](/topic/마지기)를 주었고, 그 이후에는 더 많은 봉토를 주었다. 그러나 주민이 주는 등 사회 변동과 함께 주민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원집’을 서로 맡으려 하지 않게 되었고, 가족 모두의 생기복덕을 맞추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자 점차 혼자 사는 사람을 ‘원집’으로 뽑게 되었다. 1998년에는 마을에 1,750㎡(530평) 정도의 [동답](/topic/동답)(洞畓)이 있지만 경작할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제물은 1일과 6일에 장시가 열리는 풍각 장터를 이용한다. 희생은 소를 사용하였다가 1950년대 중반에 돼지로 바꾸었다고 한다. 돼지는 조비들이 마을 경비로 구입하고, 수퇘지만을 삶아서 제상에 올린다. 소를 제물로 사용할 때에는 풍각면의 소 잡는 사람을 불러 마을 위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조용하고 깨끗한 냇가에서 소를 잡았다. 1920년대 말에는 당제에 사용한 쇠고기의 다른 부위를 마을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지](/topic/가지)고 와서 한 냥의 당제 부조금을 내고 받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즉 당시에는 주민들이 가구당 한 냥의 돈을 추렴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비들이 마을 경비로 수퇘지를 장만하여 삶아서 제상에 올린다. 쇠고기는 생머리, 삶은 살코기, 간을 올렸다. 쇠머리는 원집이 ‘천제(天祭)’를 올리는 제장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돼지머리는 그곳에 묻지 않는다. 이 밖의 제물로는 해삼, 백찜, 탕, 나물, 메 등이 있다.

천제는 음력 정월 열이튿날 밤 11시 30분~12시 사이에 행하며, 원집 내외만 참여한다. 천제는 당제당과 다른 산에 위치한다.

제관들은 당제를 지내기 바로 전에 산신제를 행한다. 절차는 유교식 [묘사](/topic/묘사)(墓祀)의 산신제와 유사하다. 금곡리의 산신제에는 술을 세 번 올리며, 술을 한 번 올릴 때마다 [독축](/topic/독축)을 세 번 한다. 결과적으로 세 번 술을 올리고 아홉 번 독축을 하는 것이다. 제물은 떡이 없고 메, 술, 삼탕, 돼지고기 등이 사용된다.
당제는 원집이 지내는 천제와 제관들이 지내는 산신제가 끝난 뒤에 행한다. 즉 산신제를 지내고 제물을 가지고 원집으로 오면 다시 당제에 쓸 제물을 준비해 서낭당으로 이동하여 제의를 행한다. 당제를 지내고 난 다음에 마을에서 낮에는 대동음복을 행한다. 이때 당제에 대한 결산보고 등을 한다.
참고문헌산간신앙 2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내용1. 제당과 대상 신 : 제당을 당산 또는 [서낭당](/topic/서낭당)이라고 한다. 당산에 있는 제당의 형태는 골[기와](/topic/기와)로 잘 지어진 당집이다. 당산에 모시는 신은 ‘서낭 할배’라고 부른다. 당집에는 [현판](/topic/현판)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으며, 상량에는 ‘崇禎紀元後四戊辰癸亥八月十一日巳時堅主上樑 課癸亥辛酉乙亥辛巳’라고 적혀 있어서 1868년(고종 5)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집은 기와[지붕](/topic/지붕)과 나무로 된 한 칸짜리 목조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220㎝와 측면 190㎝, 지붕은 정면 274㎝와 측면 370㎝, [처마](/topic/처마)까지의 높이는 310㎝이다. 당집에는 한 짝의 [여닫이](/topic/여닫이)문이 있고, 당집 안에는 [제상](/topic/제상)과 [향로](/topic/향로)대가 있다. 내부의 뒤쪽에는 세로로 작은 나무가 있고, 거기에는 [한지](/topic/한지)를 매년 감아두어서 두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한지가 말아져 있는 이 속에는 천왕기가 있다. 예전에는 천왕기를 매년 사용한 다음에 감아 놓았다고 한다. 당집의 양 측면과 뒷면은 기와와 돌로 담이 쳐져 있다. 당집 앞쪽은 낮고 넓게 3단으로 [계단](/topic/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천왕기는 직사각형이고, 밑에는 꼬리가 달려 있다. 천왕기의 바깥 부분은 남색, 안쪽은 홍색이다. 꼬리는 흰색이면서 3개가 있다. 천왕기가 달려 있는 [천왕대](/topic/천왕대)는 예전에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풍각면에서 풍물을 치며 행사할 때 [마을](/topic/마을)에서 앞세워 들고 나온 천왕대 가운데 하나이다. 이 대보름 행사에는 [씨름](/topic/씨름)이나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등을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당집을 짓기 전에는 그곳에 있는 당나무 옆에 서낭으로 여겨지던 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 돌은 당집 바로 옆 담에 세워져 있다. 이 돌은 넓적하고 둥글며, 긴 쪽의 길이가 70㎝ 정도이다.

금곡리 비동 당산의 서낭은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의 서낭과 내외지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다. 금곡리의 서낭이 외서낭이고,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의 서낭은 내서낭이며 ‘연하(軟河)[각시](/topic/각시)’라고 한다. 외서낭과 내서낭은 서로 사이가 좋아서 한 번 천왕대가 붙으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월대보름 행사에서 만났을 때 천왕대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여 힘으로 떼어내려다 천왕대가 부러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신(神)의 힘이 무척 세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 뒤로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제를 통하여 분동(分洞)과 같은 마을 간의 상호 연계성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금곡리에는 원래 지금의 서낭당을 제외하고 ‘앞당’이라는 또 다른 제당이 있다. ‘앞당’은 마을 바로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 자리 잡고 있다. 당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종은 소나무이다. 예전에는 다섯 그루였으나 지금은 세 그루이다. 이 ‘앞당’의 제의에는 메도 없고 [축문](/topic/축문)도 매우 짧을 정도로 간단하다.


2. 제의 절차 : 이 마을의 제의는 ‘당제’라고 부르며, 마을에 질병이 없고 농사가 풍년 들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제는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맞추어 [제관](/topic/제관)을 뽑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기 때문에 1993년부터 반별(班別)로 돌아가면서 교대로 맡아 지내고 있다. 금곡리는 8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제는 음력 정월 열사흗날 자정에 행한다. 당제의 축문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축관이 축문을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축문을 펴 놓고 매구를 치면서 빌기만 할 뿐이다.

제관은 선출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정성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 내지 닷새 전에 마을회의에서 선출된다. 제관은 [헌관](/topic/헌관) 한 명, 축관 한 명, 조비(助裨) 세 명이다. 이들은 20~60세 남자 가운데 선출된다. 헌관과 축관은 모든 가족의 생기복덕에 맞추어 엄격하게 선정한다. 그러나 허드렛일을 돕기 위한 보조원인 조비는 생기복덕과 무관하며, 젊은 사람 가운데에서 선정한다.

제물은 ‘원집’이라고 불리는 집에서 금기를 엄수하며 장만한다. 과거에는 동네 토지를 주어서 경작하게 하고, 그 [수확](/topic/수확)물은 당제를 지내는 데에만 사용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봉토로 한 [마지기](/topic/마지기)를 주었고, 그 이후에는 더 많은 봉토를 주었다. 그러나 주민이 주는 등 사회 변동과 함께 주민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원집’을 서로 맡으려 하지 않게 되었고, 가족 모두의 생기복덕을 맞추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자 점차 혼자 사는 사람을 ‘원집’으로 뽑게 되었다. 1998년에는 마을에 1,750㎡(530평) 정도의 [동답](/topic/동답)(洞畓)이 있지만 경작할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제물은 1일과 6일에 장시가 열리는 풍각 장터를 이용한다. 희생은 소를 사용하였다가 1950년대 중반에 돼지로 바꾸었다고 한다. 돼지는 조비들이 마을 경비로 구입하고, 수퇘지만을 삶아서 제상에 올린다. 소를 제물로 사용할 때에는 풍각면의 소 잡는 사람을 불러 마을 위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조용하고 깨끗한 냇가에서 소를 잡았다. 1920년대 말에는 당제에 사용한 쇠고기의 다른 부위를 마을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지](/topic/가지)고 와서 한 냥의 당제 부조금을 내고 받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즉 당시에는 주민들이 가구당 한 냥의 돈을 추렴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비들이 마을 경비로 수퇘지를 장만하여 삶아서 제상에 올린다. 쇠고기는 생머리, 삶은 살코기, 간을 올렸다. 쇠머리는 원집이 ‘천제(天祭)’를 올리는 제장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돼지머리는 그곳에 묻지 않는다. 이 밖의 제물로는 해삼, 백찜, 탕, 나물, 메 등이 있다.

천제는 음력 정월 열이튿날 밤 11시 30분~12시 사이에 행하며, 원집 내외만 참여한다. 천제는 당제당과 다른 산에 위치한다.

제관들은 당제를 지내기 바로 전에 산신제를 행한다. 절차는 유교식 [묘사](/topic/묘사)(墓祀)의 산신제와 유사하다. 금곡리의 산신제에는 술을 세 번 올리며, 술을 한 번 올릴 때마다 [독축](/topic/독축)을 세 번 한다. 결과적으로 세 번 술을 올리고 아홉 번 독축을 하는 것이다. 제물은 떡이 없고 메, 술, 삼탕, 돼지고기 등이 사용된다.
당제는 원집이 지내는 천제와 제관들이 지내는 산신제가 끝난 뒤에 행한다. 즉 산신제를 지내고 제물을 가지고 원집으로 오면 다시 당제에 쓸 제물을 준비해 서낭당으로 이동하여 제의를 행한다. 당제를 지내고 난 다음에 마을에서 낮에는 대동음복을 행한다. 이때 당제에 대한 결산보고 등을 한다.
역사금곡리는 ‘쇳골’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金谷’이라고 한 것이다. 200가구가 넘는 큰 [마을](/topic/마을)인 때에는 마을에 일꾼이 60명 정도나 되었다고 하지만 100가구 정도뿐인 지금에는 평택 임씨(平澤 林氏)들이 60%를 넘게 차지하고 있다.

마을에는 밀양 변씨(密陽 卞氏)가 처음 들어오고 그다음에 김해 김씨(金海 金氏), 평택 임씨 순으로 입향하였다. 평택 임씨는 1600년대 말에 대구에서 입향했다. 당시 마을 어귀에 심은 느티나무 숲은 일제가 강점기 때 총기 제작을 이유로 베어간 뒤 그 일부만 현재 남아 있다. ‘쑤’라고 하는 이 숲은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숲은 냇물이 직접 흘러 나[가지](/topic/가지) 않고 마을을 돌아서 나가도록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다.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물이 바로 빠져나가는 것은 마을의 복이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마을의 동산(洞山)은 200㏊가 훨씬 넘은 때도 있었지만 현재 160㏊뿐이다. 이처럼 동산이 많은 것은 동재산을 충분히 확보하고 생활과 [농업](/topic/농업)에 필요한 나무와 풀을 충분히 얻기 위함이었다. 신미년(1931) 음력 이월 스무날 마을에 큰 불이 나 여섯 집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탄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초가이던 마을의 집들은 모두 [기와](/topic/기와)와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초군(樵軍)이 있었다. 초군은 마을에서 [머슴](/topic/머슴)이나 [소작](/topic/소작)을 하던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다. 초군은 [농민](/topic/농민)조직으로서 [좌상](/topic/좌상)을 필두로 숫총각들이 조직 구성원이었다. 이들이 천왕기([천왕대](/topic/천왕대))를 들고 풍각면에서 열리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행사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5․16쿠데타(1961)가 일어난 시기에도 존속했지만 [새마을운동](/topic/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때에는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의 작은 돌다리에는 [임경업 [장군](/topic/장군)](/topic/임경업장군)(1594~1646)과 관련한 전설이 있다. “임경업 장군이 그 넓적한 돌을 어깨에 메고 작은 돌은 옆구리에 끼고 가져와서 이곳에 걸쳐 놓은 것이 이 다리이다. 그러나 이 다리의 돌은 1931년 마을에 불이 났을 때 반으로 갈라졌다.”
역사금곡리는 ‘쇳골’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金谷’이라고 한 것이다. 200가구가 넘는 큰 [마을](/topic/마을)인 때에는 마을에 일꾼이 60명 정도나 되었다고 하지만 100가구 정도뿐인 지금에는 평택 임씨(平澤 林氏)들이 60%를 넘게 차지하고 있다.

마을에는 밀양 변씨(密陽 卞氏)가 처음 들어오고 그다음에 김해 김씨(金海 金氏), 평택 임씨 순으로 입향하였다. 평택 임씨는 1600년대 말에 대구에서 입향했다. 당시 마을 어귀에 심은 느티나무 숲은 일제가 강점기 때 총기 제작을 이유로 베어간 뒤 그 일부만 현재 남아 있다. ‘쑤’라고 하는 이 숲은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숲은 냇물이 직접 흘러 나[가지](/topic/가지) 않고 마을을 돌아서 나가도록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다. [풍수](/topic/풍수)지리적으로 물이 바로 빠져나가는 것은 마을의 복이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마을의 동산(洞山)은 200㏊가 훨씬 넘은 때도 있었지만 현재 160㏊뿐이다. 이처럼 동산이 많은 것은 동재산을 충분히 확보하고 생활과 [농업](/topic/농업)에 필요한 나무와 풀을 충분히 얻기 위함이었다. 신미년(1931) 음력 이월 스무날 마을에 큰 불이 나 여섯 집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탄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초가이던 마을의 집들은 모두 [기와](/topic/기와)와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초군(樵軍)이 있었다. 초군은 마을에서 [머슴](/topic/머슴)이나 [소작](/topic/소작)을 하던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다. 초군은 [농민](/topic/농민)조직으로서 [좌상](/topic/좌상)을 필두로 숫총각들이 조직 구성원이었다. 이들이 천왕기([천왕대](/topic/천왕대))를 들고 풍각면에서 열리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행사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5․16쿠데타(1961)가 일어난 시기에도 존속했지만 [새마을운동](/topic/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때에는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의 작은 돌다리에는 [임경업 [장군](/topic/장군)](/topic/임경업장군)(1594~1646)과 관련한 전설이 있다. “임경업 장군이 그 넓적한 돌을 어깨에 메고 작은 돌은 옆구리에 끼고 가져와서 이곳에 걸쳐 놓은 것이 이 다리이다. 그러나 이 다리의 돌은 1931년 마을에 불이 났을 때 반으로 갈라졌다.”
서울대학교 대학원굿상에 투영된 신에 대한 인식이수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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