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명석자웅석

한국무속신앙사전
진주명석자웅석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 있는 성숭배 신앙의 대상인 한 쌍의 암수 바위. 1988년 12월 23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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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 있는 성숭배 신앙의 대상인 한 쌍의 암수 바위. 1988년 12월 23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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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박
정의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 있는 성숭배 신앙의 대상인 한 쌍의 암수 바위. 1988년 12월 23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정의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 있는 성숭배 신앙의 대상인 한 쌍의 암수 바위. 1988년 12월 23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지역 사람들은 ‘운돌’ 또는 ‘명석(鳴石)’이라고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시대 때부터 이 암석을 숭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성숭배의 대상물로 숭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읍지 같은 문헌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돼 있다. 1231년(고려 고종 18)에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일설에는 고려 [공민왕](/topic/공민왕) 때 여진 및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쌓을 때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다. 이 지역 광제암(廣濟庵)의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급히 걸어오는 한 쌍의 돌을 만나서 “무령석물(無靈石物)이 어디로 가느냐?”하고 물으니 돌들이 “진주성 부역에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려고 성 돌이 되고자 갑니다.”하고 답하였다. 이미 성을 다 쌓았다고 하자 돌들이 애석하여 크게 울며 전신에 눈물을 흘리더니 그 자리에 섰다. 그 뜻이 가상하여 이 자웅석을 ‘운돌’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또 스님이 감복하여 “거룩한 보국충석(輔國忠石)이여!”하며 아홉 번 절을 하였다고 하여 그 위 골짜기를 구배곡(九拜谷) 또는 구복곡(九伏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 명사 두사충(杜思忠)은 “크나큰 그 돌/ 낭랑한 그 울음이여/ 그 이름의 크고 장함/ 천만년 빛나리(磊磊維石 琅琅其鳴 其名宏大 於千萬齡)”라고 「자웅석찬(雌雄石讚)」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국가 대사가 있을 것 같으면 운돌의 눈물인듯 암석 표면에 물이 흐르며 예언의 징조를 보인다고 한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 300m 지점의 논두렁에 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 500m 지점의 하천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것을 1970년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1973년에 명석각을 준공하여 모셨다.

매년 음력 삼짇날 정오(낮 12시)에 명석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제례를 지낸다. 이 자웅석과 삼짇날이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날이 첫 봄의 명절이어서 자웅석을 이전하고 제의일로 삼았다고 한다. 관심이 있는 면민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제관](/topic/제관) 세 명, 집사 두 명, 축관 한 명, [독축](/topic/독축) 한 명이 주관하여 유교식 제의를 치른다. [초헌](/topic/초헌)관, [아헌](/topic/아헌)관, [종헌](/topic/종헌)관 등 제관은 민(民)과 관(官)이 해마다 교대로 맡는다. 민이 맡을 때는 명석면 노인회장 등 지역의 원로와 출향 인사가 제관이 되고, 관이 맡을 때는 면장·학교장·파출소장 등이 제관이 된다. 제를 마치면 제장 앞 [마당](/topic/마당)에서 참여자들이 [음복](/topic/음복)을 하고 각종 [민속놀이](/topic/민속놀이)를 하면서 면민의 봄축제를 벌인다. 제를 지내는 목적은 보국충석을 기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런 제의는 [마을](/topic/마을)공동체가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성기 형상석인 ‘운돌[鳴石]’을 바탕으로 ‘명석면(鳴石面)’이라는 면 이름이 생겼기 때문에 특이하게 면 공동체 단위의 제의가 되었다.
내용지역 사람들은 ‘운돌’ 또는 ‘명석(鳴石)’이라고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시대 때부터 이 암석을 숭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성숭배의 대상물로 숭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읍지 같은 문헌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돼 있다. 1231년(고려 고종 18)에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일설에는 고려 [공민왕](/topic/공민왕) 때 여진 및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쌓을 때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다. 이 지역 광제암(廣濟庵)의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급히 걸어오는 한 쌍의 돌을 만나서 “무령석물(無靈石物)이 어디로 가느냐?”하고 물으니 돌들이 “진주성 부역에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려고 성 돌이 되고자 갑니다.”하고 답하였다. 이미 성을 다 쌓았다고 하자 돌들이 애석하여 크게 울며 전신에 눈물을 흘리더니 그 자리에 섰다. 그 뜻이 가상하여 이 자웅석을 ‘운돌’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또 스님이 감복하여 “거룩한 보국충석(輔國忠石)이여!”하며 아홉 번 절을 하였다고 하여 그 위 골짜기를 구배곡(九拜谷) 또는 구복곡(九伏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 명사 두사충(杜思忠)은 “크나큰 그 돌/ 낭랑한 그 울음이여/ 그 이름의 크고 장함/ 천만년 빛나리(磊磊維石 琅琅其鳴 其名宏大 於千萬齡)”라고 「자웅석찬(雌雄石讚)」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국가 대사가 있을 것 같으면 운돌의 눈물인듯 암석 표면에 물이 흐르며 예언의 징조를 보인다고 한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 300m 지점의 논두렁에 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 500m 지점의 하천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것을 1970년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1973년에 명석각을 준공하여 모셨다.

매년 음력 삼짇날 정오(낮 12시)에 명석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제례를 지낸다. 이 자웅석과 삼짇날이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날이 첫 봄의 명절이어서 자웅석을 이전하고 제의일로 삼았다고 한다. 관심이 있는 면민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제관](/topic/제관) 세 명, 집사 두 명, 축관 한 명, [독축](/topic/독축) 한 명이 주관하여 유교식 제의를 치른다. [초헌](/topic/초헌)관, [아헌](/topic/아헌)관, [종헌](/topic/종헌)관 등 제관은 민(民)과 관(官)이 해마다 교대로 맡는다. 민이 맡을 때는 명석면 노인회장 등 지역의 원로와 출향 인사가 제관이 되고, 관이 맡을 때는 면장·학교장·파출소장 등이 제관이 된다. 제를 마치면 제장 앞 [마당](/topic/마당)에서 참여자들이 [음복](/topic/음복)을 하고 각종 [민속놀이](/topic/민속놀이)를 하면서 면민의 봄축제를 벌인다. 제를 지내는 목적은 보국충석을 기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런 제의는 [마을](/topic/마을)공동체가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성기 형상석인 ‘운돌[鳴石]’을 바탕으로 ‘명석면(鳴石面)’이라는 면 이름이 생겼기 때문에 특이하게 면 공동체 단위의 제의가 되었다.
형태숫돌은 높이 87㎝, 밑둘레 214㎝의 자연석이다. 위에 귀두같이 볼록하게 된 부분이 있어 남자 성기 형상을 하고 있다. 높이 77㎝, 밑둘레 147㎝의 자연석으로 된 암돌은 모습이 여자가 [족두리](/topic/족두리)를 쓴 형상을 하고 있다. 명석각(鳴石閣)이라는 석각(石閣) 안에 자웅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형태숫돌은 높이 87㎝, 밑둘레 214㎝의 자연석이다. 위에 귀두같이 볼록하게 된 부분이 있어 남자 성기 형상을 하고 있다. 높이 77㎝, 밑둘레 147㎝의 자연석으로 된 암돌은 모습이 여자가 [족두리](/topic/족두리)를 쓴 형상을 하고 있다. 명석각(鳴石閣)이라는 석각(石閣) 안에 자웅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의의이 자웅석은 본래 성기숭배의 대상물이었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신격과 제의 목적이 변하면서 전설이 형성되어 계속 숭배해 왔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 형상석에 고통 받는 민중의 현실적 부담을 덜고자 하는 소원이 부가되어 운돌 전설’이 형성되었고, 보국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 조선시대에는 보국안민의 주제가 부각된 전설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보국충석으로 관민 모두의 관심을 끌면서 면 이름으로 삼게 되고 면 단위의 제의를 행하게 되었다. 이 자웅석은 주민의 인식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신격과 기능이 변화하거나 첨가되면서 계속 숭배하여 온 한국 성숭배 [변이](/topic/변이)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晉州通誌 (一鵬精舍, 1964)
한국구비문학대계-진주시·진양군편 (정상박·류종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성기암설화의 [변이](/topic/변이)전승 고찰 (정상박, 석당논총 17, 동아대학교, 1991)
전설의 사회사 (정상박, 민속원, 2000)
의의이 자웅석은 본래 성기숭배의 대상물이었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신격과 제의 목적이 변하면서 전설이 형성되어 계속 숭배해 왔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 형상석에 고통 받는 민중의 현실적 부담을 덜고자 하는 소원이 부가되어 운돌 전설’이 형성되었고, 보국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 조선시대에는 보국안민의 주제가 부각된 전설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보국충석으로 관민 모두의 관심을 끌면서 면 이름으로 삼게 되고 면 단위의 제의를 행하게 되었다. 이 자웅석은 주민의 인식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신격과 기능이 변화하거나 첨가되면서 계속 숭배하여 온 한국 성숭배 [변이](/topic/변이)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晉州通誌 (一鵬精舍, 1964)
한국구비문학대계-진주시·진양군편 (정상박·류종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성기암설화의 [변이](/topic/변이)전승 고찰 (정상박, 석당논총 17, 동아대학교, 1991)
전설의 사회사 (정상박, 민속원, 2000)
국립문화재연구소무·굿과 음식 1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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