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용진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 제창[마을](/topic/마을) 당제. 마을의 액운 방지와 안녕, [풍수](/topic/풍수)해 예방 등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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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 제창[마을](/topic/마을) 당제. 마을의 액운 방지와 안녕, [풍수](/topic/풍수)해 예방 등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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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 제창[마을](/topic/마을) 당제. 마을의 액운 방지와 안녕, [풍수](/topic/풍수)해 예방 등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신앙.
정의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 제창[마을](/topic/마을) 당제. 마을의 액운 방지와 안녕, [풍수](/topic/풍수)해 예방 등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신앙.
내용1. 제당의 구성 :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열흘날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3시 사이에 지낸다. 당제를 모시는 제당은 모두 다섯 곳이다. 당집은 [마을](/topic/마을) 위쪽에 있고, 마을 주위 네 곳에 당산나무가 있다. 당집은 한 칸의 맞배[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이며 주변에 [돌담](/topic/돌담)이 있다. 당할아버지 [영정](/topic/영정)이 당집 안 전면에 모셔져 있고, 그 앞에 [제상](/topic/제상)이 있으며, 왼쪽 벽에는 당제를 모실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4당산은 나무의 이름을 붙여 부른다. 당집 앞에 있는 팽나무는 본당산, 마을회관 옆에 있는 느티나무(수령 350년, 수고 20m,나무둘레 3.3m)는 정자나무당산, 마을 서쪽의 양묘장 건너편의 느티나무(수령 350년, 수고 20m, 나무둘레 3.2m)는 느티나무당산, 마을 동쪽에 있는 팽나무는 윗당산 또는 솔당산이라고 각각 부른다. 느티나무당산 아래에는 입석 1기가 있다. 여기서 정자나무당산이 남성의 휴게공간이라면 윗당산은 마을의 뒤에 위치한 관계로 여성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2. 당제 준비 [제관](/topic/제관)은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회의를 개최하여 선정한다. 회의 참석자는 주로 각 가정을 대표하는 남자들이며 이들이 제관 6명을 선정한다. 제관은 깨끗한 사람으로선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먼저 회의 참석자들은 제관을 맡을 수 있는 사람들을 추천하고, 추천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여러 [가지](/topic/가지)를 감안해 선정한다. 특히 초상난집이거나 산모가 있으면 우선 제외하고, 심지어 젖먹이 아이가 있거나 처녀가 있는 집도 제외한다. 그러다 보니 주로 나이 많은 사람이 있는 집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제관은 도유사와 제관 4명으로 구성된다. 도유사는 당제와 관련된 일체의 일을 책임지며, 제물을 준비하거나 제사 비용을 거출하고 결산하는 일 등 제사의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도유사는매년 추석 전에 당집을 청소하고 주변의 풀을 베어 정리한다. 이것을 ‘[벌초](/topic/벌초)한다’라고 부른다. 제관 4명은 도유사와 함께 당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나면 각자 제상을 4곳의 당산으로 옮겨 가서 각자가 각각의 당산나무에 가서 제사를 모시는 역할을 한다.

제비(祭費)는 당제와 관련된 마을기금을 사용한다. 예전에는 논 660여 ㎡와 약간의 밭이 있었지만 마을회의를 통해 이들 논과 밭을 처분하여 발생한 자금을 모아 마을기금으로 적립해 놓고 제사를 지낼 때 활용한다고 한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나 객지에 나간 사람들이 정성으로 돈을 내어 당제의 비용에 보태기도 한다.

도유사와 제관의 선정이 끝나면 정월 초닷새 즈음에 마을에서 깨끗한 집을 선정하여 제주(祭酒)를 담근다. 제주를 담그는 집은 주로 도유사나 제관의 집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제주를 담글 때 제주가 완성되기까지 일정한 장소에 둔다. 그곳은 [안방](/topic/안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그 집안에 살고 있는 가족들은 안방을 드나들 수 없고 거주할 수도없다. 제주를 앉히기에 앞서 초나흗날 저녁에 당샘을 청소한다. 청소가 끝난 뒤 [금줄](/topic/금줄)을 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샘물을 사용할 수 없다. 제주를 담글 물을 사용하고 나면 잠시 금줄을 거두어 두었다가 초아흐렛날에 다시 금줄을 친다. 제물을 준비할 때 필요한 물도 이 샘물을 길어다 사용한다.

제물이 준비되기 시작하면 제관은 당연히 소변을 본 뒤에 손을 씻고, 대변을 본 뒤에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 또 제관은 초닷샛날부터 당제를 모실 때까지 상갓집에 가는 등 궂은일을 보거나 궂은 곳에 가서는 안 되며, 부부 동침도 안 된다. 제관들의 집 앞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깔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당집 입구에는 [농악](/topic/농악)의 [영기](/topic/영기)를 양쪽에 세워둔다. 당제를 모시기 전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초상집에 금줄을 치고 상주들은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마을 사람 역시 상갓집에 가기를 꺼리며, 부득이 문상을 한 사람은당제에 참여할 수 없다. 마을에서 출산이 있으면 마을 밖에서 아기를 낳아야 하며, 심지어 소나 돼지, 개 등 [가축](/topic/가축)의 출산도 마을 밖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제물은 제주를 담근 집에서 준비한다. 제물은 당제를 모시는 당일에 준비하고, 장을 보는 것은 제사 [직전](/topic/직전)에 영산포나 나주 장을 이용한다. 장보러 가는 것은 도유사와 제관들의 몫이며, 품목은 [대추](/topic/대추), 밤, 두부, 무, 미역, 김, 포, [미나리](/topic/미나리), 명태, [백지](/topic/백지), 쇠고기 등이다. 장을 보면서는 물건 값을 깎지 않는다. 장을 다 보면 그것을 제물 준비하는 집으로 가져간다. 제물을 준비할 때에는 제관들만 참여한다. 이때 이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입마개를 하고, 제물에는 양념은 물론 소금도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물의간을 봐서도 안 된다. 그리고 제물을 준비하면서 돼지를 잡는다. 돼지는 깨끗한 집에서 고른 수컷이면서 검어야 한다. 돼지를 잡으면 당제 준비는 어느 정도 마[무리](/topic/무리)된다.

3. 당제 진행 당제를 지내는 날부터 풍물굿을 치기 시작한다. 당제의 시작은 오후 5~6시에 제물을 장만한 집에서 당집으로 제물을 옮기면서부터이다. 제물을 운반할 때에는 당집에 보관된 운반구를 이용하고, 풍물패와 더불어 제관 일행이 뒤따른다. 제물이 당집에 도착하면 제관들만 당집으로 들어가 제물을 진설한다. 당집에는 풍물패나 마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다. 풍물패는 당집 주변을 돌면서 굿을 치고, 마을 사람들은 밖에서 대기한다. 제상은 [민가](/topic/민가)의 [기제사](/topic/기제사)상과 큰 차이가 없다. 음식으로는 삼색실과, [삼채](/topic/삼채), 탕, 포, 과자,메, 팥 등이다. 제사는 진설-[분향](/topic/분향)-[초헌](/topic/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독축](/topic/독축)-[헌식](/topic/헌식)-[음복](/topic/음복)-소지-[철상](/topic/철상) 순으로 이루어진다. 당집에서 마을 사람 모두를 위해 소지를 올리고, 제물과 제비를 희사한 사람들은가족 수만큼 소지를 올려준다. 당집에서 제사가 끝나면 네 당산을 모시는 제관들이 각자 준비된 제물을 들고 네 당산으로 향한다. 제관들은 제물을 당산나무 앞에 차리고 간단하게 술을 올린 다음 재배한다. 그런 뒤 제물을 백지에 싸서 그 옆에 묻고 본인과 가족의 소지를 올리면 끝난다. 당제 의식이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하면서 결산을 한다. 이때 마을에 기금을 낸 사람에 대해 공표하고 제사 일체를 정리한다. 예전에는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내용1. 제당의 구성 :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열흘날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3시 사이에 지낸다. 당제를 모시는 제당은 모두 다섯 곳이다. 당집은 [마을](/topic/마을) 위쪽에 있고, 마을 주위 네 곳에 당산나무가 있다. 당집은 한 칸의 맞배[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이며 주변에 [돌담](/topic/돌담)이 있다. 당할아버지 [영정](/topic/영정)이 당집 안 전면에 모셔져 있고, 그 앞에 [제상](/topic/제상)이 있으며, 왼쪽 벽에는 당제를 모실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4당산은 나무의 이름을 붙여 부른다. 당집 앞에 있는 팽나무는 본당산, 마을회관 옆에 있는 느티나무(수령 350년, 수고 20m,나무둘레 3.3m)는 정자나무당산, 마을 서쪽의 양묘장 건너편의 느티나무(수령 350년, 수고 20m, 나무둘레 3.2m)는 느티나무당산, 마을 동쪽에 있는 팽나무는 윗당산 또는 솔당산이라고 각각 부른다. 느티나무당산 아래에는 입석 1기가 있다. 여기서 정자나무당산이 남성의 휴게공간이라면 윗당산은 마을의 뒤에 위치한 관계로 여성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2. 당제 준비 [제관](/topic/제관)은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회의를 개최하여 선정한다. 회의 참석자는 주로 각 가정을 대표하는 남자들이며 이들이 제관 6명을 선정한다. 제관은 깨끗한 사람으로선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먼저 회의 참석자들은 제관을 맡을 수 있는 사람들을 추천하고, 추천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여러 [가지](/topic/가지)를 감안해 선정한다. 특히 초상난집이거나 산모가 있으면 우선 제외하고, 심지어 젖먹이 아이가 있거나 처녀가 있는 집도 제외한다. 그러다 보니 주로 나이 많은 사람이 있는 집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제관은 도유사와 제관 4명으로 구성된다. 도유사는 당제와 관련된 일체의 일을 책임지며, 제물을 준비하거나 제사 비용을 거출하고 결산하는 일 등 제사의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도유사는매년 추석 전에 당집을 청소하고 주변의 풀을 베어 정리한다. 이것을 ‘[벌초](/topic/벌초)한다’라고 부른다. 제관 4명은 도유사와 함께 당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나면 각자 제상을 4곳의 당산으로 옮겨 가서 각자가 각각의 당산나무에 가서 제사를 모시는 역할을 한다.

제비(祭費)는 당제와 관련된 마을기금을 사용한다. 예전에는 논 660여 ㎡와 약간의 밭이 있었지만 마을회의를 통해 이들 논과 밭을 처분하여 발생한 자금을 모아 마을기금으로 적립해 놓고 제사를 지낼 때 활용한다고 한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나 객지에 나간 사람들이 정성으로 돈을 내어 당제의 비용에 보태기도 한다.

도유사와 제관의 선정이 끝나면 정월 초닷새 즈음에 마을에서 깨끗한 집을 선정하여 제주(祭酒)를 담근다. 제주를 담그는 집은 주로 도유사나 제관의 집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제주를 담글 때 제주가 완성되기까지 일정한 장소에 둔다. 그곳은 [안방](/topic/안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그 집안에 살고 있는 가족들은 안방을 드나들 수 없고 거주할 수도없다. 제주를 앉히기에 앞서 초나흗날 저녁에 당샘을 청소한다. 청소가 끝난 뒤 [금줄](/topic/금줄)을 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샘물을 사용할 수 없다. 제주를 담글 물을 사용하고 나면 잠시 금줄을 거두어 두었다가 초아흐렛날에 다시 금줄을 친다. 제물을 준비할 때 필요한 물도 이 샘물을 길어다 사용한다.

제물이 준비되기 시작하면 제관은 당연히 소변을 본 뒤에 손을 씻고, 대변을 본 뒤에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 또 제관은 초닷샛날부터 당제를 모실 때까지 상갓집에 가는 등 궂은일을 보거나 궂은 곳에 가서는 안 되며, 부부 동침도 안 된다. 제관들의 집 앞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깔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당집 입구에는 [농악](/topic/농악)의 [영기](/topic/영기)를 양쪽에 세워둔다. 당제를 모시기 전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초상집에 금줄을 치고 상주들은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마을 사람 역시 상갓집에 가기를 꺼리며, 부득이 문상을 한 사람은당제에 참여할 수 없다. 마을에서 출산이 있으면 마을 밖에서 아기를 낳아야 하며, 심지어 소나 돼지, 개 등 [가축](/topic/가축)의 출산도 마을 밖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제물은 제주를 담근 집에서 준비한다. 제물은 당제를 모시는 당일에 준비하고, 장을 보는 것은 제사 [직전](/topic/직전)에 영산포나 나주 장을 이용한다. 장보러 가는 것은 도유사와 제관들의 몫이며, 품목은 [대추](/topic/대추), 밤, 두부, 무, 미역, 김, 포, [미나리](/topic/미나리), 명태, [백지](/topic/백지), 쇠고기 등이다. 장을 보면서는 물건 값을 깎지 않는다. 장을 다 보면 그것을 제물 준비하는 집으로 가져간다. 제물을 준비할 때에는 제관들만 참여한다. 이때 이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입마개를 하고, 제물에는 양념은 물론 소금도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물의간을 봐서도 안 된다. 그리고 제물을 준비하면서 돼지를 잡는다. 돼지는 깨끗한 집에서 고른 수컷이면서 검어야 한다. 돼지를 잡으면 당제 준비는 어느 정도 마[무리](/topic/무리)된다.

3. 당제 진행 당제를 지내는 날부터 풍물굿을 치기 시작한다. 당제의 시작은 오후 5~6시에 제물을 장만한 집에서 당집으로 제물을 옮기면서부터이다. 제물을 운반할 때에는 당집에 보관된 운반구를 이용하고, 풍물패와 더불어 제관 일행이 뒤따른다. 제물이 당집에 도착하면 제관들만 당집으로 들어가 제물을 진설한다. 당집에는 풍물패나 마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다. 풍물패는 당집 주변을 돌면서 굿을 치고, 마을 사람들은 밖에서 대기한다. 제상은 [민가](/topic/민가)의 [기제사](/topic/기제사)상과 큰 차이가 없다. 음식으로는 삼색실과, [삼채](/topic/삼채), 탕, 포, 과자,메, 팥 등이다. 제사는 진설-[분향](/topic/분향)-[초헌](/topic/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독축](/topic/독축)-[헌식](/topic/헌식)-[음복](/topic/음복)-소지-[철상](/topic/철상) 순으로 이루어진다. 당집에서 마을 사람 모두를 위해 소지를 올리고, 제물과 제비를 희사한 사람들은가족 수만큼 소지를 올려준다. 당집에서 제사가 끝나면 네 당산을 모시는 제관들이 각자 준비된 제물을 들고 네 당산으로 향한다. 제관들은 제물을 당산나무 앞에 차리고 간단하게 술을 올린 다음 재배한다. 그런 뒤 제물을 백지에 싸서 그 옆에 묻고 본인과 가족의 소지를 올리면 끝난다. 당제 의식이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하면서 결산을 한다. 이때 마을에 기금을 낸 사람에 대해 공표하고 제사 일체를 정리한다. 예전에는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역사제창[마을](/topic/마을)은 영산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 전주 이씨(全州 李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밀양 손씨(密陽 孫氏) 등이 살고 있다. 제창이라는 마을 이름은 1763년 흉년을 대비하여 삼남지방에 양곡을 [저장](/topic/저장)할 창고 터를 정할 때 전라우창으로 제민창(濟民倉)이 설치되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 제민창은 나주, 남평, 영암, 무안, 광주, 함평 등지의 빈민 구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세곡을 운반하고 물산을 운송할 수 있는 수운의 통로인 영산강이 흐르는 곳이다. 이 때문에 제창마을은 영산강의 수운을활용해 교역이 활발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을 때는 700여 가구에 이르렀다. 그만큼 제창마을은 제창포라는 나루가 있어 고깃배와소금배 등이 들어와 정박하곤 했고, 나루 주변에 상점들이 들어[서고](/topic/서고) 외지에서 장사꾼이 많이 몰려와 번성하였다고 한다. 제창포가 쇠락하면서 마을은 점차 축소되어 지금은 4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영산강과 인접해 있어서 여름에 비가 오면 상습적으로 침수돼 매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특히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하면 벼를 [수확](/topic/수확)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으며, 예전에는 2년에 한 번 이러한 피해를 보다가 영산강 하굿둑이 조성되면서 피해가 줄었다고 한다.
역사제창[마을](/topic/마을)은 영산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 전주 이씨(全州 李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밀양 손씨(密陽 孫氏) 등이 살고 있다. 제창이라는 마을 이름은 1763년 흉년을 대비하여 삼남지방에 양곡을 [저장](/topic/저장)할 창고 터를 정할 때 전라우창으로 제민창(濟民倉)이 설치되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 제민창은 나주, 남평, 영암, 무안, 광주, 함평 등지의 빈민 구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세곡을 운반하고 물산을 운송할 수 있는 수운의 통로인 영산강이 흐르는 곳이다. 이 때문에 제창마을은 영산강의 수운을활용해 교역이 활발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을 때는 700여 가구에 이르렀다. 그만큼 제창마을은 제창포라는 나루가 있어 고깃배와소금배 등이 들어와 정박하곤 했고, 나루 주변에 상점들이 들어[서고](/topic/서고) 외지에서 장사꾼이 많이 몰려와 번성하였다고 한다. 제창포가 쇠락하면서 마을은 점차 축소되어 지금은 4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영산강과 인접해 있어서 여름에 비가 오면 상습적으로 침수돼 매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특히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하면 벼를 [수확](/topic/수확)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으며, 예전에는 2년에 한 번 이러한 피해를 보다가 영산강 하굿둑이 조성되면서 피해가 줄었다고 한다.
의의나주용진당제는 전형적인 강변지역 [마을](/topic/마을)신앙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고을 단위 공동체신앙이 마을신앙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시](/topic/통시)적인 민속신앙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특히 마을신앙의 신체와 신격의 변화 양상은 마을신앙의 변동 양상을 연구하는 데 종교사적 가치가 있고, 제창마을의 생태적 조건의 변화와 역사적 환경의 영향으로 마을신앙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향토사 및 지역사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참고문헌광주·전남의 당산제 연구 (나경수, 남도민속연구 5, 남도민속학회, 1999)
의의나주용진당제는 전형적인 강변지역 [마을](/topic/마을)신앙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고을 단위 공동체신앙이 마을신앙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시](/topic/통시)적인 민속신앙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특히 마을신앙의 신체와 신격의 변화 양상은 마을신앙의 변동 양상을 연구하는 데 종교사적 가치가 있고, 제창마을의 생태적 조건의 변화와 역사적 환경의 영향으로 마을신앙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향토사 및 지역사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참고문헌광주·전남의 당산제 연구 (나경수, 남도민속연구 5, 남도민속학회, 1999)
유래이 [마을](/topic/마을) 위쪽의 당을 지신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집의 [현판](/topic/현판)이「 용진당(龍津堂)」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신당이 곧 용진당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나주 목사가 고려 때부터 제단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으며, 영산강을 따라 내려가 제주도·진도·흑산도로 건너가거나 멀리 중국 사행길을 떠나는 배들이모두 해난 사고가 없게 해 달라고 용왕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용진당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집 총각이 부잣집 딸과 사랑을 나누었으나 부잣집에서 결혼을 반대해 그만 총각은 물에 빠져 죽어구렁이가 되었다. 그러자 처녀는 거의 반미치광이가되었다. 부잣집에서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죽은 총각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바위 위에서 무당굿을 벌였다.이때 구렁이가 나타나 바위 가에 앉아 있던 처녀의몸을 휘감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해난 사고가자주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은 이 모두가 처녀와 총각이 품은 원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용진당을 세웠다.

이처럼 처음에는 용진당에서 제사를 모시다가 후대에 지신당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신당의 제당은 주위에 [돌담](/topic/돌담)이 있었고, 정면 한 칸과 측면 한 칸에 앞에는 퇴주(退柱)를 둔 맞배[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 건물이다. [상량문](/topic/상량문)에 1930년에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옛 건물이 이때 재건축된 것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대폭우로 당집이 붕괴된 뒤 그 안에서 1836년(헌종 2)이라고 기록된 당할아버지 [영정](/topic/영정)과 제물을 운반할 때 쓰이는 각종 도구 및 제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89년에 중수했다. 현판은「 산신당(山神堂)」이라 했고, 영정은 1981년에 도난당하여 당시 전라도 광주에 사는 화가가 다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유래이 [마을](/topic/마을) 위쪽의 당을 지신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집의 [현판](/topic/현판)이「 용진당(龍津堂)」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신당이 곧 용진당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나주 목사가 고려 때부터 제단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으며, 영산강을 따라 내려가 제주도·진도·흑산도로 건너가거나 멀리 중국 사행길을 떠나는 배들이모두 해난 사고가 없게 해 달라고 용왕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용진당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집 총각이 부잣집 딸과 사랑을 나누었으나 부잣집에서 결혼을 반대해 그만 총각은 물에 빠져 죽어구렁이가 되었다. 그러자 처녀는 거의 반미치광이가되었다. 부잣집에서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죽은 총각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바위 위에서 무당굿을 벌였다.이때 구렁이가 나타나 바위 가에 앉아 있던 처녀의몸을 휘감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해난 사고가자주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은 이 모두가 처녀와 총각이 품은 원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용진당을 세웠다.

이처럼 처음에는 용진당에서 제사를 모시다가 후대에 지신당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신당의 제당은 주위에 [돌담](/topic/돌담)이 있었고, 정면 한 칸과 측면 한 칸에 앞에는 퇴주(退柱)를 둔 맞배[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 건물이다. [상량문](/topic/상량문)에 1930년에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옛 건물이 이때 재건축된 것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대폭우로 당집이 붕괴된 뒤 그 안에서 1836년(헌종 2)이라고 기록된 당할아버지 [영정](/topic/영정)과 제물을 운반할 때 쓰이는 각종 도구 및 제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89년에 중수했다. 현판은「 산신당(山神堂)」이라 했고, 영정은 1981년에 도난당하여 당시 전라도 광주에 사는 화가가 다시 그린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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