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성비요

한국무속신앙사전
1921년부터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성황제 관련 기록.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13쪽 분량이다. 크기는 가로 21.4㎝×세로 28.5㎝이며, 두께는 0.4㎝으로 세로쓰기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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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부터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성황제 관련 기록.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13쪽 분량이다. 크기는 가로 21.4㎝×세로 28.5㎝이며, 두께는 0.4㎝으로 세로쓰기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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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선
정의1921년부터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성황제 관련 기록.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13쪽 분량이다. 크기는 가로 21.4㎝×세로 28.5㎝이며, 두께는 0.4㎝으로 세로쓰기 되어 있다.
정의1921년부터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성황제 관련 기록.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13쪽 분량이다. 크기는 가로 21.4㎝×세로 28.5㎝이며, 두께는 0.4㎝으로 세로쓰기 되어 있다.
내용『치성비요』의 전체 목차는 치성여비용변비연혁(致誠與費用辨備沿革), 목록(目錄), 제일(祭日), 행사위원(行事委員), 당주(堂主), 용수(用水), 행사절차(行事節次),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 산신제축(山神祭祝), 성황당축(城隍堂祝), 제수물목(祭需物目), 제용기물(祭用器物) 등이다.

『치성비요』 가운데 치성여비용변비연혁은 제의의 방식과 제비 추렴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치성비요가 기술된 당시의 제의방식인 유교식 제의 이전에는 “무녀를 써서 빌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황제가 무당에 의한 [마을](/topic/마을)굿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비 추렴은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달라졌다. 갑오년(甲午年)인 1894년부터는 제비의 추렴 대상이 읍내동(邑內洞)에 국한되었는데, 당시의 제비추렴은 각 가구마다 빈부의 차이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다. 정사년(丁巳年)인 1917년 이후에는 백미와 찹쌀, 팥을 부유한 가구에서 거두고, 대동계(大同契)의 기금으로 돼지머리를 구입해 나머지 제수의 구입비용에 대해서만 빈부의 차이 없이 거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제비 추렴에서 마을 사람들의 경제적 여건이 고려되고, 이것이 실제적인 제비 추렴에 적절하게 반영되기도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제비의 추렴 대상에서 부정(不淨)이 있는 집은 일시적으로 제외되었으며, 제사를 마친 후에 제비를 거두었다. 여기서 부정이란 동제에서 일반적으로 부정한 대상이 되는 상(喪)을 당하거나 출산을 한 가정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사 후에 제비의 추렴이 이루어졌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추렴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그 외 제비의 추렴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대상으로 예수교 등 타 종교의 신봉자들이 있다.

제일(祭日)은 성황제 날짜와 제일(祭日)의 연기에 대한 기록이다. 제일은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이다. 만일 제의를 지내기 하루 전이나 이틀 전에 마을에 상이 나는 부정한 일이 생기면 한 달을 미뤘다가 다시 지냈다. 부정한 일이 생겨 달을 넘겼다가 제사를 지내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하는 것은 동제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의 죽음이 갖는 부정 관념과 연관을 지어 설명할 수도 있지만 상을 당하면 마을 사람들 전체가 3~4일 정도 상가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적인 제약도 함께 고려하여 이해할 수 있다.

가양동의 경우 성황제를 지낼 무렵 출산 예정인 경우 마을 밖으로 나가 다른 곳에서 출산을 해야 했다. 현재는 출산과 관계된 일을 성황제와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에 부정의 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부정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지는 상이 나는 경우 한 달을 미뤘다 다시 성황제를 지내는 원칙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행사위원(行事委員) 부분은 [제관](/topic/제관)의 숫자와 자격에 대한 기록이다. 기록된 제관은 [헌작](/topic/헌작)(獻爵)위원, [독축](/topic/독축)(讀祝)위원, 집사(執事)위원, 간사(幹事)위원 등으로 분류하여 총 10명이다. 이 가운데 헌작은 제단에 나가 잔을 드리고 절을 하는 제관으로 대개는 마을의 유지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주로 맡았다. 또 독축이나 집사는 한학에 밝거나 제사 일을 잘 아는 사람이 맡으므로, 해마다 바뀌기보다는 비교적 고정적인 편이었다. 간사는 주로 소임이라 불리는 이들로, 마을을 다니며 제비를 추렴하거나 제수를 구입하고 제기 등을 챙기는 일을 맡았다. 또 제일 전에 [우물](/topic/우물)이나 당, 당에 오르는 길 등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이들의 몫이었다. 이러한 제관의 자격을 부정한 일이 없는 사람으로 국한시킨 것은 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직접 제사를 준비하여 지내는 제관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부정한 일이 없는 사람이란 개념도 제사 즈음에 부인에게 월경이 없거나 해산을 하지 않은 경우, 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 상갓집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역시 부정의 시간적 범위가 제시되지 않았다.

현재 가양동성황제의 제관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많이 [가지](/topic/가지)고 있는 양천역사보존회와 노인정의 회원, 가양1동의 동장(洞長), 지역유지 등이 맡는다. 이렇게 제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고정화되어가거나 지역의 기관장과 시의원이나 국회의원 등이 참가하는 양상은 여러 지역의 동제에서 두루 접하는 현상이다.

당주(堂主)는 당주의 선정 방법과 자격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당주는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장만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실질적으로는 부부가 함께 선정되었다. 부정한 일이 없는 사람이 당주의 자격요건으로, 당주는 부유한 집 가운데 매년 돌아가면서 수시로 선정하였다. 지금은 가양동 노인정에서 제물 일체를 장만하거나 부녀회에서 맡기 때문에 당주를 선정하지 않는다.

용수(用水)는 당우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듬물로 불리는 당우물은 향교의 우측편으로, 성황산 아래의 골짜기에 있는 것을 쓰고 있다. 본래 깊이는 70~80㎝ 였다. 성황제의 제물 일체는 이 우물을 이용하여 장만하였다. 제사 전날 아침 일찍 우물을 청소하고, 제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우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 우물의 관리는 가양동 노인정에서 맡아 왔다. 지하에 집수시설(集水施設)을 마련해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약수터로 개발하여 사용해 왔으나 식수로 부적격판정을 받아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당우물로서의 역할은 사라졌다.

행사절차(行事節次)는 제의의 진행과 제의 후 [음복](/topic/음복)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성황제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산신제 후 성황제를 드리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는 성황제로 통칭되는 제의가 실제로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현재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성황당 옆에 설치된 천막 아래서 음복이 진행되었다. 성황당에 가지고 올라왔던 제물은 당 아래로 가져가지 않기 때문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줄 반기용 떡은 성황당으로 가져오지 않고 노인정에 두었다가 나누어 준다.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는 제수와 제물의 차림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소개된 제물은 떡, 메, [정화수](/topic/정화수)(청수), 후추차, 산자, [식혜](/topic/식혜), 탕, 과일(세 접시), 채(나물), 돼지머리, 두부이다. [진설도](/topic/진설도) 밑에 부기된 내용에 의하면 산신제와 성황제의 제물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산신제에는 돼지머리나 쇠머리를 진설하지만 성황제에는 돼지머리나 쇠머리 대신 두부를 진설하는 점이다.

『치성비요』의 진설도에 소개된 성황제의 제물 가운데는 육류에 해당의 제물이 없다. 이것을 통해 성황제에 모셔지는 신령인 도당할머니가 제물을 ‘소로 받는’ 신령으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기를 제물로 받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육으로 받는’ 표현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말로, 고기 대신 채소 등의 제물을 받는 신령임을 뜻한다. 2004년 성황제의 경우 제물은 돼지머리, 쇠고기적, 떡, 메, 포, 청수, 과일(5종류 5접시), 산자, 다시마튀각, 식혜, 탕, [누름적](/topic/누름적), 술 등이었다. 제물진설도에 등장하는 두부적이나 후추차가 현재는 제물로 오르지 않고, 누룩으로 하루 전에 담갔다 걸러 쓰던 술도 막걸리를 구입하여 대신한다.

이후 [축문](/topic/축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산신제축(山神祭祝)과 성황당축(城隍堂祝) 두 가지이다. 산신제와 성황제 모두 한문으로 쓴 것과 한글로 옮겨 쓴 두 종류이다. 두 종류의 축문 모두 전문을 한글로 옮겨 적은 종이를 덧붙이고 이후 축문의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그 외 제수물목(祭需物目)과 제용기물(祭用器物)의 부분이 있는데 각각 백미(白米)를 비롯한 제수물목 21건과 수통(水桶) 외 제용기물 21건에 대한 기록이다.
내용『치성비요』의 전체 목차는 치성여비용변비연혁(致誠與費用辨備沿革), 목록(目錄), 제일(祭日), 행사위원(行事委員), 당주(堂主), 용수(用水), 행사절차(行事節次),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 산신제축(山神祭祝), 성황당축(城隍堂祝), 제수물목(祭需物目), 제용기물(祭用器物) 등이다.

『치성비요』 가운데 치성여비용변비연혁은 제의의 방식과 제비 추렴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치성비요가 기술된 당시의 제의방식인 유교식 제의 이전에는 “무녀를 써서 빌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황제가 무당에 의한 [마을](/topic/마을)굿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비 추렴은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달라졌다. 갑오년(甲午年)인 1894년부터는 제비의 추렴 대상이 읍내동(邑內洞)에 국한되었는데, 당시의 제비추렴은 각 가구마다 빈부의 차이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다. 정사년(丁巳年)인 1917년 이후에는 백미와 찹쌀, 팥을 부유한 가구에서 거두고, 대동계(大同契)의 기금으로 돼지머리를 구입해 나머지 제수의 구입비용에 대해서만 빈부의 차이 없이 거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제비 추렴에서 마을 사람들의 경제적 여건이 고려되고, 이것이 실제적인 제비 추렴에 적절하게 반영되기도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제비의 추렴 대상에서 부정(不淨)이 있는 집은 일시적으로 제외되었으며, 제사를 마친 후에 제비를 거두었다. 여기서 부정이란 동제에서 일반적으로 부정한 대상이 되는 상(喪)을 당하거나 출산을 한 가정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사 후에 제비의 추렴이 이루어졌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추렴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그 외 제비의 추렴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대상으로 예수교 등 타 종교의 신봉자들이 있다.

제일(祭日)은 성황제 날짜와 제일(祭日)의 연기에 대한 기록이다. 제일은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이다. 만일 제의를 지내기 하루 전이나 이틀 전에 마을에 상이 나는 부정한 일이 생기면 한 달을 미뤘다가 다시 지냈다. 부정한 일이 생겨 달을 넘겼다가 제사를 지내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하는 것은 동제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의 죽음이 갖는 부정 관념과 연관을 지어 설명할 수도 있지만 상을 당하면 마을 사람들 전체가 3~4일 정도 상가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적인 제약도 함께 고려하여 이해할 수 있다.

가양동의 경우 성황제를 지낼 무렵 출산 예정인 경우 마을 밖으로 나가 다른 곳에서 출산을 해야 했다. 현재는 출산과 관계된 일을 성황제와 결부시키지 않기 때문에 부정의 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부정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지는 상이 나는 경우 한 달을 미뤘다 다시 성황제를 지내는 원칙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행사위원(行事委員) 부분은 [제관](/topic/제관)의 숫자와 자격에 대한 기록이다. 기록된 제관은 [헌작](/topic/헌작)(獻爵)위원, [독축](/topic/독축)(讀祝)위원, 집사(執事)위원, 간사(幹事)위원 등으로 분류하여 총 10명이다. 이 가운데 헌작은 제단에 나가 잔을 드리고 절을 하는 제관으로 대개는 마을의 유지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주로 맡았다. 또 독축이나 집사는 한학에 밝거나 제사 일을 잘 아는 사람이 맡으므로, 해마다 바뀌기보다는 비교적 고정적인 편이었다. 간사는 주로 소임이라 불리는 이들로, 마을을 다니며 제비를 추렴하거나 제수를 구입하고 제기 등을 챙기는 일을 맡았다. 또 제일 전에 [우물](/topic/우물)이나 당, 당에 오르는 길 등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이들의 몫이었다. 이러한 제관의 자격을 부정한 일이 없는 사람으로 국한시킨 것은 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직접 제사를 준비하여 지내는 제관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부정한 일이 없는 사람이란 개념도 제사 즈음에 부인에게 월경이 없거나 해산을 하지 않은 경우, 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 상갓집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역시 부정의 시간적 범위가 제시되지 않았다.

현재 가양동성황제의 제관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많이 [가지](/topic/가지)고 있는 양천역사보존회와 노인정의 회원, 가양1동의 동장(洞長), 지역유지 등이 맡는다. 이렇게 제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고정화되어가거나 지역의 기관장과 시의원이나 국회의원 등이 참가하는 양상은 여러 지역의 동제에서 두루 접하는 현상이다.

당주(堂主)는 당주의 선정 방법과 자격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당주는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장만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실질적으로는 부부가 함께 선정되었다. 부정한 일이 없는 사람이 당주의 자격요건으로, 당주는 부유한 집 가운데 매년 돌아가면서 수시로 선정하였다. 지금은 가양동 노인정에서 제물 일체를 장만하거나 부녀회에서 맡기 때문에 당주를 선정하지 않는다.

용수(用水)는 당우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듬물로 불리는 당우물은 향교의 우측편으로, 성황산 아래의 골짜기에 있는 것을 쓰고 있다. 본래 깊이는 70~80㎝ 였다. 성황제의 제물 일체는 이 우물을 이용하여 장만하였다. 제사 전날 아침 일찍 우물을 청소하고, 제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우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 우물의 관리는 가양동 노인정에서 맡아 왔다. 지하에 집수시설(集水施設)을 마련해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약수터로 개발하여 사용해 왔으나 식수로 부적격판정을 받아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당우물로서의 역할은 사라졌다.

행사절차(行事節次)는 제의의 진행과 제의 후 [음복](/topic/음복)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성황제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산신제 후 성황제를 드리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는 성황제로 통칭되는 제의가 실제로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현재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성황당 옆에 설치된 천막 아래서 음복이 진행되었다. 성황당에 가지고 올라왔던 제물은 당 아래로 가져가지 않기 때문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줄 반기용 떡은 성황당으로 가져오지 않고 노인정에 두었다가 나누어 준다.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는 제수와 제물의 차림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소개된 제물은 떡, 메, [정화수](/topic/정화수)(청수), 후추차, 산자, [식혜](/topic/식혜), 탕, 과일(세 접시), 채(나물), 돼지머리, 두부이다. [진설도](/topic/진설도) 밑에 부기된 내용에 의하면 산신제와 성황제의 제물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산신제에는 돼지머리나 쇠머리를 진설하지만 성황제에는 돼지머리나 쇠머리 대신 두부를 진설하는 점이다.

『치성비요』의 진설도에 소개된 성황제의 제물 가운데는 육류에 해당의 제물이 없다. 이것을 통해 성황제에 모셔지는 신령인 도당할머니가 제물을 ‘소로 받는’ 신령으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기를 제물로 받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육으로 받는’ 표현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말로, 고기 대신 채소 등의 제물을 받는 신령임을 뜻한다. 2004년 성황제의 경우 제물은 돼지머리, 쇠고기적, 떡, 메, 포, 청수, 과일(5종류 5접시), 산자, 다시마튀각, 식혜, 탕, [누름적](/topic/누름적), 술 등이었다. 제물진설도에 등장하는 두부적이나 후추차가 현재는 제물로 오르지 않고, 누룩으로 하루 전에 담갔다 걸러 쓰던 술도 막걸리를 구입하여 대신한다.

이후 [축문](/topic/축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산신제축(山神祭祝)과 성황당축(城隍堂祝) 두 가지이다. 산신제와 성황제 모두 한문으로 쓴 것과 한글로 옮겨 쓴 두 종류이다. 두 종류의 축문 모두 전문을 한글로 옮겨 적은 종이를 덧붙이고 이후 축문의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그 외 제수물목(祭需物目)과 제용기물(祭用器物)의 부분이 있는데 각각 백미(白米)를 비롯한 제수물목 21건과 수통(水桶) 외 제용기물 21건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전체 기록 가운데 산신제 [축문](/topic/축문)과 성황당 축문이 기록된 쪽에는 한글축문을 적은 종이가 덧붙여져 있다. 이것은 한자로 쓰인 『치성비요(致誠備要)』의 본문에 작은 글씨로 한글음을 표기해 놓고 사용하다 추후 한글로 옮긴 축문을 덧붙여 사용하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또 맨 마지막 장은 잉크로 기록한 제수물목(祭需物目) 부분이 있는데, 치성비요와 글씨체가 다르고 사용된 필기구가 다른 것으로 보아 1921년 이후 가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전체 기록 가운데 산신제 [축문](/topic/축문)과 성황당 축문이 기록된 쪽에는 한글축문을 적은 종이가 덧붙여져 있다. 이것은 한자로 쓰인 『치성비요(致誠備要)』의 본문에 작은 글씨로 한글음을 표기해 놓고 사용하다 추후 한글로 옮긴 축문을 덧붙여 사용하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또 맨 마지막 장은 잉크로 기록한 제수물목(祭需物目) 부분이 있는데, 치성비요와 글씨체가 다르고 사용된 필기구가 다른 것으로 보아 1921년 이후 가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의의『치성비요』는 제사의 연혁과 제의절차, 제수물목, [제관](/topic/제관), 당[우물](/topic/우물), [축문](/topic/축문), [제물](/topic/제물)의 진설, 제사용 기물 등 성황제 전반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담고 있다. 지역 사례로서 성황제 전반을 살필 수 있는 기록으로서뿐 아니라 성황제 위상의 변화와 제비의 추렴 양상, 의례 형태 등의 변화를 담고 있어 성황제의 역사와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참고문헌강서구 가양동 성황제 관련자료 『치성비요』 (오문선, 도시역사문화 3 서울역사박물관 연구논문집, 서울역사박물관, 2005)
고을수령의 국가제사, [마을](/topic/마을)제사가 되다 (서울역사박물관, 2005, 기록영화)
의의『치성비요』는 제사의 연혁과 제의절차, 제수물목, [제관](/topic/제관), 당[우물](/topic/우물), [축문](/topic/축문), [제물](/topic/제물)의 진설, 제사용 기물 등 성황제 전반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담고 있다. 지역 사례로서 성황제 전반을 살필 수 있는 기록으로서뿐 아니라 성황제 위상의 변화와 제비의 추렴 양상, 의례 형태 등의 변화를 담고 있어 성황제의 역사와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참고문헌강서구 가양동 성황제 관련자료 『치성비요』 (오문선, 도시역사문화 3 서울역사박물관 연구논문집, 서울역사박물관, 2005)
고을수령의 국가제사, [마을](/topic/마을)제사가 되다 (서울역사박물관, 2005, 기록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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