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이나 첫 용날[上辰日] 새벽 첫닭이 울 때 부인들이 [우물](/topic/우물)이나 샘에서 물을 길어오던 풍속. 가장 먼저 용알을 뜨면 그해 운수가 대통한다고 하고, 이 물로 밥을 해 먹으면 무병장수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지역에 따라 용물뜨기, 용알줍기, [새알뜨기](/topic/새알뜨기), [복물뜨기](/topic/복물뜨기), [수복수](/topic/수복수)(壽福水)뜨기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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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Cnt | 0 |
wkorname | 김준기 |
정의 |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이나 첫 용날[上辰日] 새벽 첫닭이 울 때 부인들이 [우물](/topic/우물)이나 샘에서 물을 길어오던 풍속. 가장 먼저 용알을 뜨면 그해 운수가 대통한다고 하고, 이 물로 밥을 해 먹으면 무병장수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지역에 따라 용물뜨기, 용알줍기, [새알뜨기](/topic/새알뜨기), [복물뜨기](/topic/복물뜨기), [수복수](/topic/수복수)(壽福水)뜨기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 정의 |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이나 첫 용날[上辰日] 새벽 첫닭이 울 때 부인들이 [우물](/topic/우물)이나 샘에서 물을 길어오던 풍속. 가장 먼저 용알을 뜨면 그해 운수가 대통한다고 하고, 이 물로 밥을 해 먹으면 무병장수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지역에 따라 용물뜨기, 용알줍기, [새알뜨기](/topic/새알뜨기), [복물뜨기](/topic/복물뜨기), [수복수](/topic/수복수)(壽福水)뜨기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 내용 | 용알뜨기를 행하는 날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정초에 맞이하는 첫 용날에 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행해진다. 간혹 정월 열나흗날이라는 제보도 있는데, 이는 용알을 먼저 뜨면 그해의 운수가 좋다고 하므로 서로 먼저 물을 길어 오려는 경쟁이 치열해져서 시간이 점점 앞당겨진 결과로 보인다. 『[열양세시기](/topic/열양세시기)』,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 등 문헌에는 용알뜨기가 정월대보름날에 행하는 의례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인 김려(金鑢, 1766~1822)가 정월대보름의 다양한 풍속을 노래한 25수 가운데에서 이 용알뜨기의 모습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 용알뜨기가 원래 정월대보름의 대표적인 여성의 민속의례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을](/topic/마을) 각시들 초록[명주](/topic/명주) 차림새로 / [담장](/topic/담장) 밖에 모여서 소곤거리는 말 동이 끼고 패 지어 냇물에 가서 / 용의 알 남실남실 떠 이고 오네. 민간의 속설에 따르면 하늘에 사는 용이 정월대보름날 새벽에 지상으로 내려와 [우물](/topic/우물) 속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물을 첫 번째 긷는 사람만이 물에 낳은 용의 알을 떠 갈 수 있고, 용의 알이 들어간 [정화수](/topic/정화수)로 밥을 해 먹으면 그해 운수가 대통하고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부녀자들은 서로 먼저 용알을 뜨려고 밤을 지새워 가며 우물을 지키거나 아예 [[두레](/topic/두레)박](/topic/두레박)줄을 잡고 버티는 부산스러움을 떨기도 하는 풍속이 생겼다. 그러나 용알은 첫닭이 울어야만 뜰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쟁도 상당한 인내심과 부지런함을 요하는 일이었다. 용알뜨기에서 말하는 용알에 대해서도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다양하다.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은 『[해동죽지](/topic/해동죽지)(海東竹枝)』의 명절풍속 가운데 ‘급용란(汲龍卵)’에서 “옛 풍속에 정월대보름날 새벽에 정화수를 긷는다. 물 위에 방울 거품이 있으면 이것을 용란(龍卵)이라 하고, 이것을 보면 재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용의 알이 뜬다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현장조사를 통해서도 우물이나 샘의 물을 바[가지](/topic/가지)에 따를 때 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온다. 이것을 용알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내용이 많아 예전부터 이 물방울을 용알이라고 보는 견해가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급용란(汲龍卵)’의 이어지는 시에서 “어여쁜 색시 희미한 달빛 비치는 새벽에 정화수를 길으니 / 돌우물 [난간](/topic/난간)머리에서 두레박틀 소리 울려 퍼진다. / 파뿌리 머리의 늙은 어머니 나직한 소리로 묻기를 / 용알 몇 개나 떴느냐?”라고 노래하고 있어 정초 가정신앙으로서 용알뜨기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바가지에 뜬 물방울이 많을수록 좋은 징조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용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차이가 있었다. 경기도 광명지역에서는 정초 용날 새벽에 달이 우물에 가득 비칠 때 가서 물을 떠 왔다는 경우도 있어 우물이나 바가지에 비친 달을 용알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용알뜨기에서 먼저 온 사람이 일단 용알을 뜨게 되면 다음에 오는 사람들은 용알을 뜰 수가 없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먼저 다녀간 사람들은 물을 떠갔다는 표시로 짚으로 똬리를 틀거나 지푸라기를 잘라서 우물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다른 샘이나 우물로 용알을 뜨러 다녔다. 늦게 물을 길어 오면 여름에 농사일을 할 때 비를 자주 맞는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용알을 뜨러 갈 때 [오곡](/topic/오곡)밥이나 [약밥](/topic/약밥)을 뭉쳐 우물에 던져 넣는 경우도 있다. 이는 ‘용알뜨기’와 ‘용왕먹이기’가 결합된 형태이다. ‘용왕먹이기’ 역시 정월대보름이나 첫 용날에 강이나 우물에서 촛불을 밝히고 가족들의 평안과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여성들의 의례이다. 따라서 이 두 의례가 병행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역에 따라 ‘용왕먹이기’는 생쌀이나 팥 등을 우물이나 강에 뿌리기도 한다. | 내용 | 용알뜨기를 행하는 날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정초에 맞이하는 첫 용날에 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행해진다. 간혹 정월 열나흗날이라는 제보도 있는데, 이는 용알을 먼저 뜨면 그해의 운수가 좋다고 하므로 서로 먼저 물을 길어 오려는 경쟁이 치열해져서 시간이 점점 앞당겨진 결과로 보인다. 『[열양세시기](/topic/열양세시기)』,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 등 문헌에는 용알뜨기가 정월대보름날에 행하는 의례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인 김려(金鑢, 1766~1822)가 정월대보름의 다양한 풍속을 노래한 25수 가운데에서 이 용알뜨기의 모습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 용알뜨기가 원래 정월대보름의 대표적인 여성의 민속의례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을](/topic/마을) 각시들 초록[명주](/topic/명주) 차림새로 / [담장](/topic/담장) 밖에 모여서 소곤거리는 말 동이 끼고 패 지어 냇물에 가서 / 용의 알 남실남실 떠 이고 오네. 민간의 속설에 따르면 하늘에 사는 용이 정월대보름날 새벽에 지상으로 내려와 [우물](/topic/우물) 속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물을 첫 번째 긷는 사람만이 물에 낳은 용의 알을 떠 갈 수 있고, 용의 알이 들어간 [정화수](/topic/정화수)로 밥을 해 먹으면 그해 운수가 대통하고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부녀자들은 서로 먼저 용알을 뜨려고 밤을 지새워 가며 우물을 지키거나 아예 [[두레](/topic/두레)박](/topic/두레박)줄을 잡고 버티는 부산스러움을 떨기도 하는 풍속이 생겼다. 그러나 용알은 첫닭이 울어야만 뜰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쟁도 상당한 인내심과 부지런함을 요하는 일이었다. 용알뜨기에서 말하는 용알에 대해서도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다양하다.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은 『[해동죽지](/topic/해동죽지)(海東竹枝)』의 명절풍속 가운데 ‘급용란(汲龍卵)’에서 “옛 풍속에 정월대보름날 새벽에 정화수를 긷는다. 물 위에 방울 거품이 있으면 이것을 용란(龍卵)이라 하고, 이것을 보면 재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용의 알이 뜬다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현장조사를 통해서도 우물이나 샘의 물을 바[가지](/topic/가지)에 따를 때 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온다. 이것을 용알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내용이 많아 예전부터 이 물방울을 용알이라고 보는 견해가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급용란(汲龍卵)’의 이어지는 시에서 “어여쁜 색시 희미한 달빛 비치는 새벽에 정화수를 길으니 / 돌우물 [난간](/topic/난간)머리에서 두레박틀 소리 울려 퍼진다. / 파뿌리 머리의 늙은 어머니 나직한 소리로 묻기를 / 용알 몇 개나 떴느냐?”라고 노래하고 있어 정초 가정신앙으로서 용알뜨기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바가지에 뜬 물방울이 많을수록 좋은 징조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용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차이가 있었다. 경기도 광명지역에서는 정초 용날 새벽에 달이 우물에 가득 비칠 때 가서 물을 떠 왔다는 경우도 있어 우물이나 바가지에 비친 달을 용알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용알뜨기에서 먼저 온 사람이 일단 용알을 뜨게 되면 다음에 오는 사람들은 용알을 뜰 수가 없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먼저 다녀간 사람들은 물을 떠갔다는 표시로 짚으로 똬리를 틀거나 지푸라기를 잘라서 우물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다른 샘이나 우물로 용알을 뜨러 다녔다. 늦게 물을 길어 오면 여름에 농사일을 할 때 비를 자주 맞는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용알을 뜨러 갈 때 [오곡](/topic/오곡)밥이나 [약밥](/topic/약밥)을 뭉쳐 우물에 던져 넣는 경우도 있다. 이는 ‘용알뜨기’와 ‘용왕먹이기’가 결합된 형태이다. ‘용왕먹이기’ 역시 정월대보름이나 첫 용날에 강이나 우물에서 촛불을 밝히고 가족들의 평안과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여성들의 의례이다. 따라서 이 두 의례가 병행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역에 따라 ‘용왕먹이기’는 생쌀이나 팥 등을 우물이나 강에 뿌리기도 한다. | 역사 | 용은 민간신앙에서 물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우물](/topic/우물), 샘, 하천, 바다 등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주한다고 믿어진다. 신라의 국모인 알영이 알천에 사는 계룡의 옆구리에서 출생했다는 혁거세신화나 용의 화상을 그리고 비를 빌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진평왕 조의 기록을 볼 때 용이 고대사회부터 수신으로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현종 조에는 흙으로 용의 상을 만들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기우제는 조선시대에도 토룡제(土龍祭)라 불리며 성행하였고, 현재도 정초에 [용왕제](/topic/용왕제)를 지내는 지역이 많으므로 용신신앙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유래 깊은 신앙임을 알 수 있다. 용물뜨기의 정확한 기원 연대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용신신앙에 기대어 가정의 무병과 풍농을 기원하는 기본적인 신앙 행위이고,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보편적인 민간의례이기 때문에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민간의 풍속이 본격적으로 기록된 조선시대 후기에 요즘과 동일한 형태의 용알뜨기가 민간층에서 성행하였음은 문헌자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열양세시기](/topic/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상원](/topic/상원) 조에는 “이날 꼭두새벽에 [정화수](/topic/정화수) 한 그릇을 긷는 것을 ‘노룡자(撈龍子)’, 깨끗한 종이에 흰 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시](/topic/어부시)(魚鳧施)’라고 한다.”고 하여, 용알뜨기와 [어부심](/topic/어부심) 등 용왕을 모시는 민간층의 의례가 당시에도 성행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상원 조에도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topic/가지)를 가지고 서로 알을 다투어 정화수(井華水)를 길어 온다. 이것을 ‘노룡란(撈龍卵)’이라고 한다. 맨 먼저 긷는 사람이 그해의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하여 정화수 뜨기가 가정마다 행해졌으며 경쟁 의례로서의 특징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노룡자(撈龍子)’, ‘노룡란(撈龍卵)’, ‘급용란(汲龍卵)’ 등 문헌에 나타난 명칭을 통해 볼 때 조선시대 후기 당시의 명칭도 ‘용알뜨기’, ‘용알줍기’ 등과 같은 오늘날의 명칭과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역사 | 용은 민간신앙에서 물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우물](/topic/우물), 샘, 하천, 바다 등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주한다고 믿어진다. 신라의 국모인 알영이 알천에 사는 계룡의 옆구리에서 출생했다는 혁거세신화나 용의 화상을 그리고 비를 빌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진평왕 조의 기록을 볼 때 용이 고대사회부터 수신으로 신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현종 조에는 흙으로 용의 상을 만들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기우제는 조선시대에도 토룡제(土龍祭)라 불리며 성행하였고, 현재도 정초에 [용왕제](/topic/용왕제)를 지내는 지역이 많으므로 용신신앙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유래 깊은 신앙임을 알 수 있다. 용물뜨기의 정확한 기원 연대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용신신앙에 기대어 가정의 무병과 풍농을 기원하는 기본적인 신앙 행위이고,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보편적인 민간의례이기 때문에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민간의 풍속이 본격적으로 기록된 조선시대 후기에 요즘과 동일한 형태의 용알뜨기가 민간층에서 성행하였음은 문헌자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열양세시기](/topic/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상원](/topic/상원) 조에는 “이날 꼭두새벽에 [정화수](/topic/정화수) 한 그릇을 긷는 것을 ‘노룡자(撈龍子)’, 깨끗한 종이에 흰 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시](/topic/어부시)(魚鳧施)’라고 한다.”고 하여, 용알뜨기와 [어부심](/topic/어부심) 등 용왕을 모시는 민간층의 의례가 당시에도 성행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상원 조에도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topic/가지)를 가지고 서로 알을 다투어 정화수(井華水)를 길어 온다. 이것을 ‘노룡란(撈龍卵)’이라고 한다. 맨 먼저 긷는 사람이 그해의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하여 정화수 뜨기가 가정마다 행해졌으며 경쟁 의례로서의 특징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노룡자(撈龍子)’, ‘노룡란(撈龍卵)’, ‘급용란(汲龍卵)’ 등 문헌에 나타난 명칭을 통해 볼 때 조선시대 후기 당시의 명칭도 ‘용알뜨기’, ‘용알줍기’ 등과 같은 오늘날의 명칭과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지역사례 | ‘용알뜨기’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정월의 여성민속이고, 형태나 절차 역시 대동소이한 편이다. 지역별로 대표적인 ‘용알뜨기’의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동두천지역에서는 보름날 주부들은 일찍 일어나 [우물](/topic/우물)에 가서 용알을 떠 왔다. 물을 뜨고 난 뒤에는 짚을 동그랗게 말아서 띄워 두고 온다. 정월 열나흗날 밤 12시가 넘으면 서로 먼저 물을 길어 가려고 서둘렀다. 대보름날에 늦게 물을 길어 오면 농사일을 할 때 비를 맞는다고 한다. 이렇게 새벽 일찍 길어 온 물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아침에는 쌀밥을 해 먹고 밤에는 [섬만두](/topic/섬만두)를 해 먹었다. 섬만두는 벼가 많이 열려 풍년이 되어 쌀섬이 많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평상](/topic/평상)시에 만드는 만두보다 속이 꽉 차게 소를 넣어 크게 만든다. 양주지역에서는 밤에 달이 뜨면 우물에 가서 ‘용알 뜬다’고 하여 물을 길어 왔다. 정월 열나흗날 밤에 떠 온 이 물로 대보름날 아침밥을 지어서 먹었다. 용알을 뜨지 못하고 대보름날 아침에서야 우물에서 물을 떠 오면 일 년 내내 소나기를 자주 맞는다고 한다. 강원도 화천지역에서는 ‘용알떠오기’라고 하며, 정월 열나흗날과 대보름날 아침에 동네 우물에서 일찍 물을 길어 온다. 우물은 세 곳의 우물을 떠 오면 좋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지역에서는 대보름날 새벽에 여성들은 [마을](/topic/마을)의 공동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topic/가지)를 떠 온다. 이날 새벽에 마을 공동우물 세 곳에서 먼저 물을 길어 가면 그 해 농사가 잘된다고 하여 남보다 먼저 우물을 떠가려고 한다. 이것을 ‘용물뜨기’라고 한다. 원래는 열나흗날 자정에 우물을 길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남보다 먼저 길어 가기 위해 자정이 채 되기도 전에 우물물을 길어 가기 일쑤였고 점차 시간이 앞당겨졌다고 한다. 충청북도 제천지역에서는 ‘용물’이나 ‘용알뜨기’라고 하며, 정월 열나흗날에 [찰밥](/topic/찰밥)을 먹고 짚으로 동그란 똬리를 만든다. 예전에는 대보름날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렸다가 가지고 간 똬리를 우물에 넣고 “용알뜨자.”를 세 번하고 우물물 한 바가지를 떠 가지고 와 대보름날 아침밥을 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지역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새벽에 남보다 먼저 떠오는 우물물을 ‘행운의 물’이라고 하여 부녀자들이 새벽 일찍 우물물을 떠 온다. 이 물을 가족들이 마시기도 하고 장광([장독대](/topic/장독대))에 올려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 특징 및 의의 | 용의 고유어는 ‘미르’이다. 어원적으로도 물의 고어 ‘믈’과 연관성이 짙다. 따라 용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전통적 물의 신[水神]임이 분명하다. 이 용에 대한 신앙은 물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심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농경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전통적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이나 가정신앙에서 용왕신앙과 관계있는 의례가 유난히 많았다. ‘용알뜨기’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용알뜨기’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여성들이 물에서 용알을 떠 오는 의례로서 보름달, 물, 알, 여성이라는 생명과 풍요의 원형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민속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대의 주술원리와 상통하는 것이어서 ‘용알뜨기’의 유래가 자못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용알뜨기’는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인 동시에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보편적 여성민속이라는 점에서 가정신앙에 속하기도 한다. ‘용알뜨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용왕은 주로 [마을](/topic/마을)의 [우물](/topic/우물)이나 샘, 강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분명 집 밖에 존재하는 신격이지만 마을신으로서 모셔지는 신격이라기보다 [가신](/topic/가신)(家神)으로서 모셔지는 성격이 짙었다. ‘용알뜨기’의 주체가 집안의 할머니나 어머니였고, 그 내용 또한 가족들의 평안과 가정 단위의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집 안에 존재하는 다른 가신(家神)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용알뜨기’는 용이 낳은 알을 먼저 떠서 가족들이 건강하고 잘되게 해 달라고, 일 년 열두 달 신수가 좋으라고 비는 기복신앙으로서의 민속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 농경사회에서는 정월대보름 이후에는 농사일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근면함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기에 남보다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가 [정화수](/topic/정화수)를 뜨며, 가족과 집안일을 생각하면서 [비손](/topic/비손)하는 ‘용알뜨기’야말로 우리 어머니들의 부지런함과 가족에 대한 정성 및 사랑을 잘 나타내 주는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한국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최상수, 고려서적, 1960) 한국풍속지 (양재연․임동권․장덕순․최길성 공편, 을유문화사, 1971) 한국민속대관 4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1) 경기민속지 Ⅲ-세시풍속, 놀이 (경기도박물관, 2000) 洌陽歲時記, 東國歲時記, 海東竹枝, 강원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충청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경상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속악유희 (최영년, 범우사, 2002) 전라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조선대세시기 Ⅱ (국립민속박물관, 2005) 한국의 가정신앙-상․하 (김명자 외, 민속원, 2005) | 지역사례 | ‘용알뜨기’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정월의 여성민속이고, 형태나 절차 역시 대동소이한 편이다. 지역별로 대표적인 ‘용알뜨기’의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동두천지역에서는 보름날 주부들은 일찍 일어나 [우물](/topic/우물)에 가서 용알을 떠 왔다. 물을 뜨고 난 뒤에는 짚을 동그랗게 말아서 띄워 두고 온다. 정월 열나흗날 밤 12시가 넘으면 서로 먼저 물을 길어 가려고 서둘렀다. 대보름날에 늦게 물을 길어 오면 농사일을 할 때 비를 맞는다고 한다. 이렇게 새벽 일찍 길어 온 물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아침에는 쌀밥을 해 먹고 밤에는 [섬만두](/topic/섬만두)를 해 먹었다. 섬만두는 벼가 많이 열려 풍년이 되어 쌀섬이 많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평상](/topic/평상)시에 만드는 만두보다 속이 꽉 차게 소를 넣어 크게 만든다. 양주지역에서는 밤에 달이 뜨면 우물에 가서 ‘용알 뜬다’고 하여 물을 길어 왔다. 정월 열나흗날 밤에 떠 온 이 물로 대보름날 아침밥을 지어서 먹었다. 용알을 뜨지 못하고 대보름날 아침에서야 우물에서 물을 떠 오면 일 년 내내 소나기를 자주 맞는다고 한다. 강원도 화천지역에서는 ‘용알떠오기’라고 하며, 정월 열나흗날과 대보름날 아침에 동네 우물에서 일찍 물을 길어 온다. 우물은 세 곳의 우물을 떠 오면 좋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지역에서는 대보름날 새벽에 여성들은 [마을](/topic/마을)의 공동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topic/가지)를 떠 온다. 이날 새벽에 마을 공동우물 세 곳에서 먼저 물을 길어 가면 그 해 농사가 잘된다고 하여 남보다 먼저 우물을 떠가려고 한다. 이것을 ‘용물뜨기’라고 한다. 원래는 열나흗날 자정에 우물을 길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남보다 먼저 길어 가기 위해 자정이 채 되기도 전에 우물물을 길어 가기 일쑤였고 점차 시간이 앞당겨졌다고 한다. 충청북도 제천지역에서는 ‘용물’이나 ‘용알뜨기’라고 하며, 정월 열나흗날에 [찰밥](/topic/찰밥)을 먹고 짚으로 동그란 똬리를 만든다. 예전에는 대보름날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렸다가 가지고 간 똬리를 우물에 넣고 “용알뜨자.”를 세 번하고 우물물 한 바가지를 떠 가지고 와 대보름날 아침밥을 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지역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새벽에 남보다 먼저 떠오는 우물물을 ‘행운의 물’이라고 하여 부녀자들이 새벽 일찍 우물물을 떠 온다. 이 물을 가족들이 마시기도 하고 장광([장독대](/topic/장독대))에 올려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 특징 및 의의 | 용의 고유어는 ‘미르’이다. 어원적으로도 물의 고어 ‘믈’과 연관성이 짙다. 따라 용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전통적 물의 신[水神]임이 분명하다. 이 용에 대한 신앙은 물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심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농경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전통적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이나 가정신앙에서 용왕신앙과 관계있는 의례가 유난히 많았다. ‘용알뜨기’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용알뜨기’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여성들이 물에서 용알을 떠 오는 의례로서 보름달, 물, 알, 여성이라는 생명과 풍요의 원형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민속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대의 주술원리와 상통하는 것이어서 ‘용알뜨기’의 유래가 자못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용알뜨기’는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인 동시에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보편적 여성민속이라는 점에서 가정신앙에 속하기도 한다. ‘용알뜨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용왕은 주로 [마을](/topic/마을)의 [우물](/topic/우물)이나 샘, 강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분명 집 밖에 존재하는 신격이지만 마을신으로서 모셔지는 신격이라기보다 [가신](/topic/가신)(家神)으로서 모셔지는 성격이 짙었다. ‘용알뜨기’의 주체가 집안의 할머니나 어머니였고, 그 내용 또한 가족들의 평안과 가정 단위의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집 안에 존재하는 다른 가신(家神)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용알뜨기’는 용이 낳은 알을 먼저 떠서 가족들이 건강하고 잘되게 해 달라고, 일 년 열두 달 신수가 좋으라고 비는 기복신앙으로서의 민속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 농경사회에서는 정월대보름 이후에는 농사일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근면함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기에 남보다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가 [정화수](/topic/정화수)를 뜨며, 가족과 집안일을 생각하면서 [비손](/topic/비손)하는 ‘용알뜨기’야말로 우리 어머니들의 부지런함과 가족에 대한 정성 및 사랑을 잘 나타내 주는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한국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최상수, 고려서적, 1960) 한국풍속지 (양재연․임동권․장덕순․최길성 공편, 을유문화사, 1971) 한국민속대관 4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1) 경기민속지 Ⅲ-세시풍속, 놀이 (경기도박물관, 2000) 洌陽歲時記, 東國歲時記, 海東竹枝, 강원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충청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경상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속악유희 (최영년, 범우사, 2002) 전라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조선대세시기 Ⅱ (국립민속박물관, 2005) 한국의 가정신앙-상․하 (김명자 외, 민속원,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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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ㆍ전라남도 | 진도무속현지조사-채씨자매를 중심으로 | 이종철ㆍ조경만ㆍ이정란ㆍ박주언ㆍ정종수ㆍ황루시 | 1988 | 뿌리깊은나무 | “에이 짠한 사람!” 내가 나보고 그라요 | 박주언 편집 | 1991 | 화산문화 |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 황루시 | 2001 | 비교민속학회 | 서울굿 열두달의 치성의례와 경제성 | 김헌선 | 2004 | 계명대학교출판부 | 진도씻김굿연구 | 박미경 | 2004 | 국립남도국악원 | 진도 단골 채정례 구술 채록 연구 : 채정례의 삶과 예술 | 이숙희 편집 | 2005 | 한국무속학회 | 서울굿의 다양성과 구조 | 김헌선 | 2006 |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서울 무속 죽음의례의 유형과 구조적 상관성 연구 | 김헌선 | 2007 |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동해안 굿의 전승과 변화 | 윤동환 |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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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 용왕에게 올리는 촛불 | 13740 정월 대보름 용왕에게 올리는 촛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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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에 떠놓은 정화수 | 13739 장독에 떠놓은 정화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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