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의 여러 곳에 세워진 돌장승. 1974년 12월 24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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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유승훈 |
정의 |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의 여러 곳에 세워진 돌장승. 1974년 12월 24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의 여러 곳에 세워진 돌장승. 1974년 12월 24일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가산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아침에 [마을](/topic/마을)의 당산과 석장승에서 동제를 지냈다. 이 제사를 ‘당산제’ 또는 ‘동제 모신다’라고 하였다. 동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음력 정월 초닷새쯤에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따져 [제관](/topic/제관), 축관, 유사를 뽑았다. 제장 주변에는 왼새끼를 꼬아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았다. 제관은 매일같이 목욕재계를하는 등 근신에 들어가야 하며, 제의 비용은 걸립을 통해 마련한다. [제물](/topic/제물)은 유사가 준비하는데 문어, 명태, 과일, 나물 등 40여 [가지](/topic/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특히 살아 있는 수퇘지를 당산 아래에서 도살시켜서 바쳤다. 제사 당일 아침에는 마을 주민들이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10시쯤이 되면 제관 일행이 먼저 당산으로 제물을 들고 가서 제를 올린다. 제차는 강신과 [헌작](/topic/헌작), [독축](/topic/독축), 소지의 순으로 진행된다. 당산제가 끝나면 다시 석장승에 제사를 지내고 ‘신장축(神將祝)’을 독축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장승제까지 모두 끝내야 [음복](/topic/음복)을 할 수 있었다. 모든제의가 끝나면 제관 집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오광대](/topic/오광대) 탈놀이를 하면서 크게 놀았다. 마을 주민들은 개인적으로 장승에 [비손](/topic/비손)을 하거나 간단히 치성을 드렸다. 주로 농사가 잘되거나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당산과 장승의 영험함을 믿었다. 일제강점기 때 징병에 끌려가거나 6·25전쟁 시기 군에 가서도 주민들이 다치는 일이 없었으며, 이는 당산과 장승이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 참고문헌 |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경상남도 (문화재관리국, 1972) 향토문화지 (경상남도, 1989) 경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7) | 내용 | 가산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아침에 [마을](/topic/마을)의 당산과 석장승에서 동제를 지냈다. 이 제사를 ‘당산제’ 또는 ‘동제 모신다’라고 하였다. 동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음력 정월 초닷새쯤에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따져 [제관](/topic/제관), 축관, 유사를 뽑았다. 제장 주변에는 왼새끼를 꼬아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았다. 제관은 매일같이 목욕재계를하는 등 근신에 들어가야 하며, 제의 비용은 걸립을 통해 마련한다. [제물](/topic/제물)은 유사가 준비하는데 문어, 명태, 과일, 나물 등 40여 [가지](/topic/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특히 살아 있는 수퇘지를 당산 아래에서 도살시켜서 바쳤다. 제사 당일 아침에는 마을 주민들이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10시쯤이 되면 제관 일행이 먼저 당산으로 제물을 들고 가서 제를 올린다. 제차는 강신과 [헌작](/topic/헌작), [독축](/topic/독축), 소지의 순으로 진행된다. 당산제가 끝나면 다시 석장승에 제사를 지내고 ‘신장축(神將祝)’을 독축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장승제까지 모두 끝내야 [음복](/topic/음복)을 할 수 있었다. 모든제의가 끝나면 제관 집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오광대](/topic/오광대) 탈놀이를 하면서 크게 놀았다. 마을 주민들은 개인적으로 장승에 [비손](/topic/비손)을 하거나 간단히 치성을 드렸다. 주로 농사가 잘되거나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당산과 장승의 영험함을 믿었다. 일제강점기 때 징병에 끌려가거나 6·25전쟁 시기 군에 가서도 주민들이 다치는 일이 없었으며, 이는 당산과 장승이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 참고문헌 |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경상남도 (문화재관리국, 1972) 향토문화지 (경상남도, 1989) 경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7) | 역사 | 가산리는 가화강과 사천만이 만나는 곳으로 ‘가산창(駕山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설치된 지역이다. 이 때문에 가산리에서 전승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73호인 [가산오광대](/topic/가산오광대)를 ‘조창오광대’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인근 지역 7개 군현의 공물을 조창에 모은 뒤 여수를 거쳐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이때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면서 장승 앞에서도 제물을 차려 놓고 [고사](/topic/고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장승의 제작 연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이 장승은 조창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해운의 무사를 기원하는 대상물이던 것으로 보인다. 조창이 폐지된 이후에는 역병을 퇴치하고 [마을](/topic/마을)을 지키는 민간의 장승으로서 역할을 해 온 것이다. | 역사 | 가산리는 가화강과 사천만이 만나는 곳으로 ‘가산창(駕山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설치된 지역이다. 이 때문에 가산리에서 전승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73호인 [가산오광대](/topic/가산오광대)를 ‘조창오광대’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인근 지역 7개 군현의 공물을 조창에 모은 뒤 여수를 거쳐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이때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면서 장승 앞에서도 제물을 차려 놓고 [고사](/topic/고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장승의 제작 연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이 장승은 조창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해운의 무사를 기원하는 대상물이던 것으로 보인다. 조창이 폐지된 이후에는 역병을 퇴치하고 [마을](/topic/마을)을 지키는 민간의 장승으로서 역할을 해 온 것이다. | 형태 | 사천가산리석장승은 총 8기이며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석장승’ 또는 ‘수호장승’이라고 부른다. 마을 어귀에 남장승 2기와 여장승 2기가 있으며, 마을 중앙의 당산나무 아래에도 남장승 2기와 여장승 2기가 있다. 이 가운데 마을 어귀의 여장승 2기는 도난당하여 1980년 마을 주민이 복원한 것으로, 민속자료 지정에서 제외되었다. 석장승의 크기는 높이82~119㎝, 폭 19~35㎝까지로 다양하다. 마을 어귀의 남장승 2기는 묘 앞의 [문인석](/topic/문인석)과 비슷한 형상으로 관모를 쓰고 [조복](/topic/조복)(朝服)을 입었다. 양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서 홀을 쥐고 있다. 뒷면까지 상세히 조각한 환조(丸彫) 형태로서 옷 주름까지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눈과 귀가 크며, 입은 다물고 있고, 어깨는 약간 올라가 있다. 오른쪽 장승의 키가 더 크며, 왼쪽 장승의 턱에는 굵은 수염이 나 있다. 오랜 세월로 인하여 마멸된 흔적들이 있고, 몸 전체에 돌이끼가 끼어 있다. 마을 중앙의 남녀 석장승은 산비탈의 [계단](/topic/계단)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여장승 2기는 느티나무 아래에 [동자상](/topic/동자상) 형태로 서 있다. 여장승 역시 조복을 입고 손에 홀을 들\었다. 특이하게도 머리에 뿔과 같은 돌출부가 2개 솟아나 있다. 왼쪽 여장승의 오른쪽 뿔은 잘려나간 흔적이 있다. 눈썹이 짙고, 큰 귀를 하고 있으며, 눈과 귀에 비하여 입은작다. 마을 중앙의 남장승 2기는 산비탈 위에 세워져 있다. 남장승이 서 있는 아래쪽에는 벽감(壁龕)을 만들어 두었다. 이 남장승은 전반적으로 마을 어귀의 남장승과 비슷한형태이다. 왼쪽 남장승은 수염이 없지만 오른쪽 남장승은 굵은 수염이 세 줄기로 나 있다. | 형태 | 사천가산리석장승은 총 8기이며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석장승’ 또는 ‘수호장승’이라고 부른다. 마을 어귀에 남장승 2기와 여장승 2기가 있으며, 마을 중앙의 당산나무 아래에도 남장승 2기와 여장승 2기가 있다. 이 가운데 마을 어귀의 여장승 2기는 도난당하여 1980년 마을 주민이 복원한 것으로, 민속자료 지정에서 제외되었다. 석장승의 크기는 높이82~119㎝, 폭 19~35㎝까지로 다양하다. 마을 어귀의 남장승 2기는 묘 앞의 [문인석](/topic/문인석)과 비슷한 형상으로 관모를 쓰고 [조복](/topic/조복)(朝服)을 입었다. 양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서 홀을 쥐고 있다. 뒷면까지 상세히 조각한 환조(丸彫) 형태로서 옷 주름까지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눈과 귀가 크며, 입은 다물고 있고, 어깨는 약간 올라가 있다. 오른쪽 장승의 키가 더 크며, 왼쪽 장승의 턱에는 굵은 수염이 나 있다. 오랜 세월로 인하여 마멸된 흔적들이 있고, 몸 전체에 돌이끼가 끼어 있다. 마을 중앙의 남녀 석장승은 산비탈의 [계단](/topic/계단)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여장승 2기는 느티나무 아래에 [동자상](/topic/동자상) 형태로 서 있다. 여장승 역시 조복을 입고 손에 홀을 들\었다. 특이하게도 머리에 뿔과 같은 돌출부가 2개 솟아나 있다. 왼쪽 여장승의 오른쪽 뿔은 잘려나간 흔적이 있다. 눈썹이 짙고, 큰 귀를 하고 있으며, 눈과 귀에 비하여 입은작다. 마을 중앙의 남장승 2기는 산비탈 위에 세워져 있다. 남장승이 서 있는 아래쪽에는 벽감(壁龕)을 만들어 두었다. 이 남장승은 전반적으로 마을 어귀의 남장승과 비슷한형태이다. 왼쪽 남장승은 수염이 없지만 오른쪽 남장승은 굵은 수염이 세 줄기로 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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