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집집을 돌아다니며 [고사](/topic/고사)와 축원을 해 주고 전곡(錢穀)을 얻는 전문적인 풍물패. 어떤 집단이나 [마을](/topic/마을)의 특별한 경비 마련을 위해 연행하기 때문에 유랑예인적 성격이 있으며 크게 절걸립패와 낭걸립패로 나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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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Cnt | 0 |
wkorname | 시지은 |
특징 | 절걸립패는 주로 절의 신임장인 신표를 보여 주고 집돌이 할 것을 허락받지만 낭걸립패가 [마을](/topic/마을)에 들어올 때의 절차는 훨씬 까다로우며 다양한 형태의 문굿으로 존재한다. 마을 어귀에서 풍물 기량을 보여 준 다음 [잡색](/topic/잡색)인 [대포수](/topic/대포수)가 마을 대표와 걸립의 내용 및 형식을 협의해야 한다거나 걸립패의 재주를 보고 [갈퀴](/topic/갈퀴)를 내주면 입동(入洞)의 허락이요 빗자루를 내주면 입동 불가라든가, 마을 [영기](/topic/영기) 두 개를 [빗장](/topic/빗장)처럼 가로질러 놓았다가 풀어 주면 입동 허락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걸립패가 [나발](/topic/나발)을 각각 일초·이초·삼초 불면 마을에서도 나발로 응대해 주어야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기도 한다. 걸립패 앞에 여러 [가지](/topic/가지) [수수](/topic/수수)께끼나 문제를 내놓고 풀어야 한다든지 어떤 문구나 글을 해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가 한두 가지 또는 서너 가지가 섞여 각 마을에 걸립패가 들어오는 절차인 문굿이 진행되기 때문에 입동의 절차인 문굿은 마을마다 특성이 있다. 마을에서 걸립을 하려는 목적이 있어 걸립패를 부른 것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걸립패의 입동은 허락된 것이지만 입동의 절차인 문굿을 이처럼 까다롭게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걸립패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타동(他洞)에 들어오는 걸립패에 마을의 신성하고 엄격한 기운을 과시하는 동시에 문굿에서 꽃피는 웃음과 박수로 걸립을 마을축제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전초전으로 삼기 위함이기도 하다. 걸립패가 한 마을에 들어와 집집을 돌아다니며 모은 곡식과 돈은 절이나 마을에 필요한 기금이 된다. 이 기금은 절과 걸립패 또는 마을과 걸립패가 일정 정도의 비율로 나누어 가[지게](/topic/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걸립패가 의례적·예능적 활동에 대한 대가로 받은 돈이나 곡식은 걸립패의 생존에 필요한 비용이 될 뿐만 아니라 절에 [시주](/topic/시주)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마을 공사(公事)에 기여함으로써 마을공동체의 성원임을 재확인하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 특징 | 절걸립패는 주로 절의 신임장인 신표를 보여 주고 집돌이 할 것을 허락받지만 낭걸립패가 [마을](/topic/마을)에 들어올 때의 절차는 훨씬 까다로우며 다양한 형태의 문굿으로 존재한다. 마을 어귀에서 풍물 기량을 보여 준 다음 [잡색](/topic/잡색)인 [대포수](/topic/대포수)가 마을 대표와 걸립의 내용 및 형식을 협의해야 한다거나 걸립패의 재주를 보고 [갈퀴](/topic/갈퀴)를 내주면 입동(入洞)의 허락이요 빗자루를 내주면 입동 불가라든가, 마을 [영기](/topic/영기) 두 개를 [빗장](/topic/빗장)처럼 가로질러 놓았다가 풀어 주면 입동 허락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걸립패가 [나발](/topic/나발)을 각각 일초·이초·삼초 불면 마을에서도 나발로 응대해 주어야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기도 한다. 걸립패 앞에 여러 [가지](/topic/가지) [수수](/topic/수수)께끼나 문제를 내놓고 풀어야 한다든지 어떤 문구나 글을 해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가 한두 가지 또는 서너 가지가 섞여 각 마을에 걸립패가 들어오는 절차인 문굿이 진행되기 때문에 입동의 절차인 문굿은 마을마다 특성이 있다. 마을에서 걸립을 하려는 목적이 있어 걸립패를 부른 것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걸립패의 입동은 허락된 것이지만 입동의 절차인 문굿을 이처럼 까다롭게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걸립패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타동(他洞)에 들어오는 걸립패에 마을의 신성하고 엄격한 기운을 과시하는 동시에 문굿에서 꽃피는 웃음과 박수로 걸립을 마을축제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전초전으로 삼기 위함이기도 하다. 걸립패가 한 마을에 들어와 집집을 돌아다니며 모은 곡식과 돈은 절이나 마을에 필요한 기금이 된다. 이 기금은 절과 걸립패 또는 마을과 걸립패가 일정 정도의 비율로 나누어 가[지게](/topic/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걸립패가 의례적·예능적 활동에 대한 대가로 받은 돈이나 곡식은 걸립패의 생존에 필요한 비용이 될 뿐만 아니라 절에 [시주](/topic/시주)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마을 공사(公事)에 기여함으로써 마을공동체의 성원임을 재확인하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 정의 | 집집을 돌아다니며 [고사](/topic/고사)와 축원을 해 주고 전곡(錢穀)을 얻는 전문적인 풍물패. 어떤 집단이나 [마을](/topic/마을)의 특별한 경비 마련을 위해 연행하기 때문에 유랑예인적 성격이 있으며 크게 절걸립패와 낭걸립패로 나뉜다. | 정의 | 집집을 돌아다니며 [고사](/topic/고사)와 축원을 해 주고 전곡(錢穀)을 얻는 전문적인 풍물패. 어떤 집단이나 [마을](/topic/마을)의 특별한 경비 마련을 위해 연행하기 때문에 유랑예인적 성격이 있으며 크게 절걸립패와 낭걸립패로 나뉜다. | 상호참조 | 걸립(51쪽), [지신밟기](/topic/지신밟기)(859쪽) | 참고문헌 | 朝鮮王朝實錄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2) [농악](/topic/농악) (정병호, 열화당, 1986) [평택농악](/topic/평택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이옥전집3 (이옥, 소명출판, 20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동방미디어, 2002) 평택농악 예능보[유자](/topic/유자) 김용래 면담 (2004년 12월 5일) 우리나라 농악의 현주소와 과제 (김헌선, 평택농악발전연구회, 2005) 전 [남[사당](/topic/사당)패](/topic/남사당패) 농악예인 김용문 면담 (2005년 11월 11일) [남사당놀이](/topic/남사당놀이) 전수교육자 지운하 면담 (2005년 9월 27일) 국악예고 강사 임광식 면담 (2010년 5월 14일) 민속촌농악단 단장 정[인삼](/topic/인삼) 면담 (2010년 6월 26일) | 상호참조 | 걸립(51쪽), [지신밟기](/topic/지신밟기)(859쪽) | 참고문헌 | 朝鮮王朝實錄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2) [농악](/topic/농악) (정병호, 열화당, 1986) [평택농악](/topic/평택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이옥전집3 (이옥, 소명출판, 20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동방미디어, 2002) 평택농악 예능보[유자](/topic/유자) 김용래 면담 (2004년 12월 5일) 우리나라 농악의 현주소와 과제 (김헌선, 평택농악발전연구회, 2005) 전 [남[사당](/topic/사당)패](/topic/남사당패) 농악예인 김용문 면담 (2005년 11월 11일) [남사당놀이](/topic/남사당놀이) 전수교육자 지운하 면담 (2005년 9월 27일) 국악예고 강사 임광식 면담 (2010년 5월 14일) 민속촌농악단 단장 정[인삼](/topic/인삼) 면담 (2010년 6월 26일) | 어원 및 유래 | '[걸궁](/topic/걸궁)’, ‘걸량’이라고도 하는 걸립(乞粒)은 집집을 돌아다니며 축원해 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일을 걸량(乞糧)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한 용어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승려들의 걸량(乞糧)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제 중의 [무리](/topic/무리)가 걸량(乞糧) 때문도 아니고 부모를 뵙는 일 때문도 아니면서 부역을 빙자하여 거리에서 천 명 또는 백 명으로 무리를 지어 어깨를 맞대고 소매를 붙잡고서 횡행할 뿐만 아니라 머물러 묵어도 한 사람이라도 금하고 죄를 주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今僧徒不因乞糧, 不因見父母, 憑藉赴役, 街巷之間, 千百爲群, 肩相磨而袂相連, 不徒橫行, 又止宿焉, 未聞禁一人, 而罪一人也) -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1484년(성종 15) 2월 26일 2번째 기사 절의 중수와 창건 등에 대한 일을 두고 성종과 신하들의 의견이 오가던 중에 나온 이 이야기를 통해 걸립과 같은 뜻인 걸량이 조선 초기에 승려들의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걸량이 차츰 풍물패·연희패와 결합되면서 전문적인 걸립패를 구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걸립은 공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topic/마을)풍물패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풍물 실력과 [고사](/topic/고사)축원의 기능을 제대로 갖춘 걸립패가 해야 전곡을 더 많이 걷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집단이나 마을에서 경비 마련이 목적이라면 마을풍물패가 아닌 전문 걸립패를 부르게 마련이다. | 어원 및 유래 | '[걸궁](/topic/걸궁)’, ‘걸량’이라고도 하는 걸립(乞粒)은 집집을 돌아다니며 축원해 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일을 걸량(乞糧)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한 용어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승려들의 걸량(乞糧)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제 중의 [무리](/topic/무리)가 걸량(乞糧) 때문도 아니고 부모를 뵙는 일 때문도 아니면서 부역을 빙자하여 거리에서 천 명 또는 백 명으로 무리를 지어 어깨를 맞대고 소매를 붙잡고서 횡행할 뿐만 아니라 머물러 묵어도 한 사람이라도 금하고 죄를 주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今僧徒不因乞糧, 不因見父母, 憑藉赴役, 街巷之間, 千百爲群, 肩相磨而袂相連, 不徒橫行, 又止宿焉, 未聞禁一人, 而罪一人也) -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1484년(성종 15) 2월 26일 2번째 기사 절의 중수와 창건 등에 대한 일을 두고 성종과 신하들의 의견이 오가던 중에 나온 이 이야기를 통해 걸립과 같은 뜻인 걸량이 조선 초기에 승려들의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걸량이 차츰 풍물패·연희패와 결합되면서 전문적인 걸립패를 구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걸립은 공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topic/마을)풍물패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풍물 실력과 [고사](/topic/고사)축원의 기능을 제대로 갖춘 걸립패가 해야 전곡을 더 많이 걷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집단이나 마을에서 경비 마련이 목적이라면 마을풍물패가 아닌 전문 걸립패를 부르게 마련이다. | 내용 | 걸립패는 [영기](/topic/영기)·[서낭기](/topic/서낭기)를 든 [기수](/topic/기수), [태평소](/topic/태평소)·[나발](/topic/나발)·[꽹과리](/topic/꽹과리)·징·장구·북 등 악기를 치는 [치배](/topic/치배), [대포수](/topic/대포수)·[조리중](/topic/조리중)·창부·[양반](/topic/양반)·[각시](/topic/각시)·[무동](/topic/무동) 등 [잡색](/topic/잡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topic/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들의 기예를 보여 주고 허락을 받는 문굿, 마을에 들어가서 당산에 오르며 치는 들당산굿, 당산에 가서 치는 [당산굿](/topic/당산굿), 공동[우물](/topic/우물)에서 치는 샘굿, 집집마다 쳐 주는 [고사굿](/topic/고사굿)이 있다. 밤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걸립패의 다양한 재주를 보여 주는 [판굿](/topic/판굿)을 친다. 걸립패가 집집을 돌며 치는 고사굿은 지신밟[기와](/topic/기와) 순서 및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집 안에 들어가기 전에 문간에서 치는 문굿, [마당](/topic/마당)에서 여러 [가지](/topic/가지) 기예를 벌이는 [마당굿](/topic/마당굿), [대청](/topic/대청)[마루](/topic/마루)에서 치는 [성주굿](/topic/성주굿), [부엌](/topic/부엌)에서 치는 조왕굿, 뒤꼍에서 치는 터주굿, 우물(샘)에서 치는 우물굿(샘굿) 등의 순서로 친다. 지방에 따라서는 광이나 [외양간](/topic/외양간)·꿀통 등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고사굿을 치기도 한다. 고사굿이 끝나면 날당산굿을 치고 마을을 떠난다. 걸립패가 하는 고사굿은 마을 풍물패가 행하는 지신밟기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마을풍물패에 비해 풍물과 고사덕담의 기량이 다양하고 뛰어나다. 이 기량의 뛰어남으로 인해 집집에서 내놓는 전곡의 양이 훨씬 많아진다는 것이 걸립패가 마을의 지신밟기를 진행하거나 공공기금 마련을 위해 초청되는 이유이다. 이렇게 모인 전곡은 절과 걸립패 또는 마을과 걸립패가 일정 정도의 비율로 나누어 가[지게](/topic/지게) 된다. | 내용 | 걸립패는 [영기](/topic/영기)·[서낭기](/topic/서낭기)를 든 [기수](/topic/기수), [태평소](/topic/태평소)·[나발](/topic/나발)·[꽹과리](/topic/꽹과리)·징·장구·북 등 악기를 치는 [치배](/topic/치배), [대포수](/topic/대포수)·[조리중](/topic/조리중)·창부·[양반](/topic/양반)·[각시](/topic/각시)·[무동](/topic/무동) 등 [잡색](/topic/잡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topic/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들의 기예를 보여 주고 허락을 받는 문굿, 마을에 들어가서 당산에 오르며 치는 들당산굿, 당산에 가서 치는 [당산굿](/topic/당산굿), 공동[우물](/topic/우물)에서 치는 샘굿, 집집마다 쳐 주는 [고사굿](/topic/고사굿)이 있다. 밤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걸립패의 다양한 재주를 보여 주는 [판굿](/topic/판굿)을 친다. 걸립패가 집집을 돌며 치는 고사굿은 지신밟[기와](/topic/기와) 순서 및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집 안에 들어가기 전에 문간에서 치는 문굿, [마당](/topic/마당)에서 여러 [가지](/topic/가지) 기예를 벌이는 [마당굿](/topic/마당굿), [대청](/topic/대청)[마루](/topic/마루)에서 치는 [성주굿](/topic/성주굿), [부엌](/topic/부엌)에서 치는 조왕굿, 뒤꼍에서 치는 터주굿, 우물(샘)에서 치는 우물굿(샘굿) 등의 순서로 친다. 지방에 따라서는 광이나 [외양간](/topic/외양간)·꿀통 등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고사굿을 치기도 한다. 고사굿이 끝나면 날당산굿을 치고 마을을 떠난다. 걸립패가 하는 고사굿은 마을 풍물패가 행하는 지신밟기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마을풍물패에 비해 풍물과 고사덕담의 기량이 다양하고 뛰어나다. 이 기량의 뛰어남으로 인해 집집에서 내놓는 전곡의 양이 훨씬 많아진다는 것이 걸립패가 마을의 지신밟기를 진행하거나 공공기금 마련을 위해 초청되는 이유이다. 이렇게 모인 전곡은 절과 걸립패 또는 마을과 걸립패가 일정 정도의 비율로 나누어 가[지게](/topic/지게) 된다. | 역사 | 걸립패의 활동은 조선시대 문인인 이옥(李鈺, 1760~1812)이 봉성(오늘날 경남 합천 근경)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봉성문여(鳳城文餘)』라는 문집에 남긴「걸공(乞供)」이라는 글을 통해 조선 후기의 걸립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이옥전집 3』에 실린「 걸공」에 대한 기록이다. 매구굿을 치면서 촌락을 돌아다니며 쌀과 돈을 걷는 것을 또한 걸공이라고 한다. 정월 12일에는 큰 뚝 아래에서 걸공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흑의에 [전립](/topic/전립)을 쓰고 푸른 색 기를 들고 앞장섰으며, 한 사람은 종이 갓을 썼는데 갓에는 백로 깃털을 꽂았고 누런 웃옷에 부채를 들었다. 한 사람은 공작의 깃털을 꽂고 흰 웃옷을 입었다. 다섯 사람은 전립을 쓰고 검은 겹옷을 입었으며 북을 들었다. 두 명의 아이는 붉은 깃털 꽂은 전립을 쓰고 검은 겹옷을 걸치고 춤을 추었으며, 두 아이는 전립을 쓰고 [꽹과리](/topic/꽹과리)를 들고, 세 아이는 전립을 쓰고 징을 들었다. 한 사람은 갓을 쓰고 흰옷을 입었는데 큰 죽통을 들었다. 한 사람은 개[가죽](/topic/가죽) [모자](/topic/모자)를 쓰고 짧은 옷에 조총을 들었다. 북ㆍ꽹과리ㆍ징 등을 든 사람은 모두 머리에 한 발가량 되는 흰 천을 달고 있는데 상양이 뛰듯이 걸으면서 징ㆍ꽹과리ㆍ북 등을 치면서 머리를 흔들면, 머리 위에는 [수레](/topic/수레)바퀴와 같은 흰 [무리](/topic/무리)가 생기는데 이를 그들 말로 ‘중피’ 라고 한다. 모두 [마당](/topic/마당)을 돌며 뛰놀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데 징ㆍ꽹과리ㆍ북 등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울린다. 얼마 있다가 백로 깃털의 갓을 쓴 자는 붉은 깃털 장식을 한 아이를 어깨 위에 얹고 달려가는데 이 아이는 어깨를 밟으면서 춤을 춘다. 이것을 ‘동래무’ 라고 한다. 며칠 뒤에 또다시 먼 데서 온 자가 있었는데 또한 그 무리가 매우 많았다. 마당에 들어오기 전에 세 차례에 신포가 울리고 쌍각 [피리](/topic/피리)를 불며 두 개의 큰 깃발을 세우고 있었다. 징과 북이 땅을 울리니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현감은 그 우두머리 세 사람에게 매를 때려 놀이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조창과 [나발](/topic/나발)을 몰수하여 병고에 넣어버렸다. (魅鬼戱之流行村落, 求索米錢者, 亦名曰‘ 乞供’. 正月十二日, 有乞供于大堤下者. 一人黑衣氈笠, 執大靑旗先, 一人紙笠揷鷺羽紙花黃懊執扇, 一人笠揷孔雀羽白懊, 五人氈笠黑#執鼓, 二人童子氈笠垂紅#黑#而舞, 二人童子氈笠執鑼, 三人氈笠執鉦, 一人笠而白懊, 執大竹筩, 一人狗皮帽短衣執鳥鎗. 執鼓執鑼執鉦, 皆頭垂一丈白, 行作商羊步, 鼓且搖其頭, 則頭上暈白如車輪, 曰‘ 衆皮’. 皆遶場而走, 且歌且舞, 鉦鼓鑼, 不敢少間. 須臾, 冠鷺者, 以肩承紅#童子而走, 童子踏肩而舞, 名曰‘東萊舞’. 其後數日, 又有自遠來者, 又甚衆. 未入場, 三響信砲, 吹雙角, 建大旗二, 鉦鼓動地. 邑人皆驚, 太守笞其渠三人, 使不得戱, 沒入其鳥鎗 喇叭於兵庫.) 이옥이 이야기한 ‘걸공(乞供)’은 [걸궁](/topic/걸궁)의 차음일 가능성이 크다. ‘매구굿을 치면서 촌락을 돌아다니며 쌀과 돈을 걷는 것’은 풍물을 치며 쌀과 돈을 걷는 걸립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악기를 치는 [치배](/topic/치배)와 [잡색](/topic/잡색), [소고](/topic/소고)수와 [무동](/topic/무동)들로 구성된 걸립패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립을 하는데 ‘마당을 돌며 뛰놀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일종의 [판굿](/topic/판굿)이 벌어지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무동 태우기로 보이는 ‘동래무’ 역시 이 걸립패의 재주가 매우 다양함을 시사한다. ‘며칠 뒤에 또다시 먼 데서 온 자가 있었는데 또한 그 무리가 매우 많았다’는 것으로 보아 정초에 여러 걸립패가 돌아가며 한 마을에 들어오기도 했으며, 마을에 들어오기 위해 ‘세 차례의 신포가 울리고 쌍각 피리를 부는’ 등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옥의 글을 통해 당시 봉성 지역에는 정초에 여러 걸립패가 돌아가며 마을의 허락을 받아 들어왔으며, 마을에 들어와서는 넓은 마당에서 다양한 재주를 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집집을 돌아다니며 [고사](/topic/고사)축원을 하고 돈과 쌀을 받는 걸립의 형태는 아니지만 걸립패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팔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걸립패의 활동은 당시 봉성 지역 외 다른 지역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옥의 글은 조선 후기 걸립패의 활동을 재구성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로 보인다. 생존하고 있는 여러 [농악](/topic/농악)예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고사를 맘대로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1945년에 광복이 되고 나서 걸립은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절걸립·낭걸립·시장걸립, 심지어 소방서걸립 등 걸립패의 활동이 왕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걸립패의 활동은 거의 소멸되었다. | 역사 | 걸립패의 활동은 조선시대 문인인 이옥(李鈺, 1760~1812)이 봉성(오늘날 경남 합천 근경)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봉성문여(鳳城文餘)』라는 문집에 남긴「걸공(乞供)」이라는 글을 통해 조선 후기의 걸립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이옥전집 3』에 실린「 걸공」에 대한 기록이다. 매구굿을 치면서 촌락을 돌아다니며 쌀과 돈을 걷는 것을 또한 걸공이라고 한다. 정월 12일에는 큰 뚝 아래에서 걸공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흑의에 [전립](/topic/전립)을 쓰고 푸른 색 기를 들고 앞장섰으며, 한 사람은 종이 갓을 썼는데 갓에는 백로 깃털을 꽂았고 누런 웃옷에 부채를 들었다. 한 사람은 공작의 깃털을 꽂고 흰 웃옷을 입었다. 다섯 사람은 전립을 쓰고 검은 겹옷을 입었으며 북을 들었다. 두 명의 아이는 붉은 깃털 꽂은 전립을 쓰고 검은 겹옷을 걸치고 춤을 추었으며, 두 아이는 전립을 쓰고 [꽹과리](/topic/꽹과리)를 들고, 세 아이는 전립을 쓰고 징을 들었다. 한 사람은 갓을 쓰고 흰옷을 입었는데 큰 죽통을 들었다. 한 사람은 개[가죽](/topic/가죽) [모자](/topic/모자)를 쓰고 짧은 옷에 조총을 들었다. 북ㆍ꽹과리ㆍ징 등을 든 사람은 모두 머리에 한 발가량 되는 흰 천을 달고 있는데 상양이 뛰듯이 걸으면서 징ㆍ꽹과리ㆍ북 등을 치면서 머리를 흔들면, 머리 위에는 [수레](/topic/수레)바퀴와 같은 흰 [무리](/topic/무리)가 생기는데 이를 그들 말로 ‘중피’ 라고 한다. 모두 [마당](/topic/마당)을 돌며 뛰놀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데 징ㆍ꽹과리ㆍ북 등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울린다. 얼마 있다가 백로 깃털의 갓을 쓴 자는 붉은 깃털 장식을 한 아이를 어깨 위에 얹고 달려가는데 이 아이는 어깨를 밟으면서 춤을 춘다. 이것을 ‘동래무’ 라고 한다. 며칠 뒤에 또다시 먼 데서 온 자가 있었는데 또한 그 무리가 매우 많았다. 마당에 들어오기 전에 세 차례에 신포가 울리고 쌍각 [피리](/topic/피리)를 불며 두 개의 큰 깃발을 세우고 있었다. 징과 북이 땅을 울리니 [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현감은 그 우두머리 세 사람에게 매를 때려 놀이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조창과 [나발](/topic/나발)을 몰수하여 병고에 넣어버렸다. (魅鬼戱之流行村落, 求索米錢者, 亦名曰‘ 乞供’. 正月十二日, 有乞供于大堤下者. 一人黑衣氈笠, 執大靑旗先, 一人紙笠揷鷺羽紙花黃懊執扇, 一人笠揷孔雀羽白懊, 五人氈笠黑#執鼓, 二人童子氈笠垂紅#黑#而舞, 二人童子氈笠執鑼, 三人氈笠執鉦, 一人笠而白懊, 執大竹筩, 一人狗皮帽短衣執鳥鎗. 執鼓執鑼執鉦, 皆頭垂一丈白, 行作商羊步, 鼓且搖其頭, 則頭上暈白如車輪, 曰‘ 衆皮’. 皆遶場而走, 且歌且舞, 鉦鼓鑼, 不敢少間. 須臾, 冠鷺者, 以肩承紅#童子而走, 童子踏肩而舞, 名曰‘東萊舞’. 其後數日, 又有自遠來者, 又甚衆. 未入場, 三響信砲, 吹雙角, 建大旗二, 鉦鼓動地. 邑人皆驚, 太守笞其渠三人, 使不得戱, 沒入其鳥鎗 喇叭於兵庫.) 이옥이 이야기한 ‘걸공(乞供)’은 [걸궁](/topic/걸궁)의 차음일 가능성이 크다. ‘매구굿을 치면서 촌락을 돌아다니며 쌀과 돈을 걷는 것’은 풍물을 치며 쌀과 돈을 걷는 걸립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악기를 치는 [치배](/topic/치배)와 [잡색](/topic/잡색), [소고](/topic/소고)수와 [무동](/topic/무동)들로 구성된 걸립패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립을 하는데 ‘마당을 돌며 뛰놀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일종의 [판굿](/topic/판굿)이 벌어지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무동 태우기로 보이는 ‘동래무’ 역시 이 걸립패의 재주가 매우 다양함을 시사한다. ‘며칠 뒤에 또다시 먼 데서 온 자가 있었는데 또한 그 무리가 매우 많았다’는 것으로 보아 정초에 여러 걸립패가 돌아가며 한 마을에 들어오기도 했으며, 마을에 들어오기 위해 ‘세 차례의 신포가 울리고 쌍각 피리를 부는’ 등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옥의 글을 통해 당시 봉성 지역에는 정초에 여러 걸립패가 돌아가며 마을의 허락을 받아 들어왔으며, 마을에 들어와서는 넓은 마당에서 다양한 재주를 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집집을 돌아다니며 [고사](/topic/고사)축원을 하고 돈과 쌀을 받는 걸립의 형태는 아니지만 걸립패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팔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걸립패의 활동은 당시 봉성 지역 외 다른 지역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옥의 글은 조선 후기 걸립패의 활동을 재구성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로 보인다. 생존하고 있는 여러 [농악](/topic/농악)예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고사를 맘대로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1945년에 광복이 되고 나서 걸립은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절걸립·낭걸립·시장걸립, 심지어 소방서걸립 등 걸립패의 활동이 왕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걸립패의 활동은 거의 소멸되었다. | 형태 | 걸립패는 연행 목적에 따라 크게 절걸립패와 낭걸립패로 나눌 수 있다. [시주](/topic/시주)걸립이라고도 하는 절걸립은 절의 중수라든가 범종의 주조 등 절의 특별한 경비 마련을 위해 [민가](/topic/민가)를 방문하여 축원과 [염불](/topic/염불)을 해 주고 곡식 등을 얻는 것을 말한다. 절걸립패는 우두머리격인 [화주](/topic/화주)(化主)를 중심으로 [[고사](/topic/고사)소리](/topic/고사소리)를 하는 비나리(축원의 소리를 하는 승려 또는 승려 출신), 화주나 비나리와 부부관계인 젊은 여성인 보살, 풍물잽이, 기예연희자인 산이, [마을](/topic/마을)이나 집에서 받은 곡식을 지고 다니는 탁발(托鉢) 등이 한 패를 이룬다. 절걸립패는 반드시 사찰에서 발행한 신표(信標, 일종의 신임장)를 지니고 다니며, 방문하는 마을이나 집의 허락을 얻는다. 낭걸립패는 깃발에 서낭을 모시고 다니는 특징이 있다. 우두머리인 모갑(某甲)을 중심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안고사를 해 주고 돈이나 곡식을 받는 전문패이다. 마을에 다리를 놓거나 둑을 쌓거나 나룻배를 만들거나 서당을 짓는 등 마을의 공사(公事)를 위한 공동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걸립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마을풍물패가 소박하게 벌이는 다리걸립이나 나루걸립 등도 있지만 전문 걸립패가 벌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낭걸립패는 여러 [가지](/topic/가지) 기예를 인정받아야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에 따라 절걸립패나 낭걸립패가 행하는 걸립은 절이나 마을의 사정에 따라 시기가 다양할 수 있다. 이는 지신밟기가 새해의 안녕과 복덕을 기원하기 위해 주로 정초에 이루어지는 것과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형태 | 걸립패는 연행 목적에 따라 크게 절걸립패와 낭걸립패로 나눌 수 있다. [시주](/topic/시주)걸립이라고도 하는 절걸립은 절의 중수라든가 범종의 주조 등 절의 특별한 경비 마련을 위해 [민가](/topic/민가)를 방문하여 축원과 [염불](/topic/염불)을 해 주고 곡식 등을 얻는 것을 말한다. 절걸립패는 우두머리격인 [화주](/topic/화주)(化主)를 중심으로 [[고사](/topic/고사)소리](/topic/고사소리)를 하는 비나리(축원의 소리를 하는 승려 또는 승려 출신), 화주나 비나리와 부부관계인 젊은 여성인 보살, 풍물잽이, 기예연희자인 산이, [마을](/topic/마을)이나 집에서 받은 곡식을 지고 다니는 탁발(托鉢) 등이 한 패를 이룬다. 절걸립패는 반드시 사찰에서 발행한 신표(信標, 일종의 신임장)를 지니고 다니며, 방문하는 마을이나 집의 허락을 얻는다. 낭걸립패는 깃발에 서낭을 모시고 다니는 특징이 있다. 우두머리인 모갑(某甲)을 중심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안고사를 해 주고 돈이나 곡식을 받는 전문패이다. 마을에 다리를 놓거나 둑을 쌓거나 나룻배를 만들거나 서당을 짓는 등 마을의 공사(公事)를 위한 공동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걸립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마을풍물패가 소박하게 벌이는 다리걸립이나 나루걸립 등도 있지만 전문 걸립패가 벌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낭걸립패는 여러 [가지](/topic/가지) 기예를 인정받아야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에 따라 절걸립패나 낭걸립패가 행하는 걸립은 절이나 마을의 사정에 따라 시기가 다양할 수 있다. 이는 지신밟기가 새해의 안녕과 복덕을 기원하기 위해 주로 정초에 이루어지는 것과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지역사례 | 걸립패가 어떤 [마을](/topic/마을)을 방문하여 걸립으로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었겠지만 지역에 따라 다른 형식으로 연행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경기도나 충청도 지방의 걸립은 절걸립패, 전라도 지방의 경우 낭걸립패에 의해 각각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절걸립패와 낭걸립패가 각 집을 돌며 [걸립굿](/topic/걸립굿)을 하는 순서와 내용은 [지신밟기](/topic/지신밟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굿을 치고 [마당](/topic/마당)에 들어가 터주굿을 비롯하여 샘굿, 조왕굿, [성주굿](/topic/성주굿) 등을 하면서 [고사소리](/topic/고사소리)인 비나리를 하고 상 위에 놓인 곡식이나 돈을 받아 나온다. | 지역사례 | 걸립패가 어떤 [마을](/topic/마을)을 방문하여 걸립으로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었겠지만 지역에 따라 다른 형식으로 연행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경기도나 충청도 지방의 걸립은 절걸립패, 전라도 지방의 경우 낭걸립패에 의해 각각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절걸립패와 낭걸립패가 각 집을 돌며 [걸립굿](/topic/걸립굿)을 하는 순서와 내용은 [지신밟기](/topic/지신밟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굿을 치고 [마당](/topic/마당)에 들어가 터주굿을 비롯하여 샘굿, 조왕굿, [성주굿](/topic/성주굿) 등을 하면서 [고사소리](/topic/고사소리)인 비나리를 하고 상 위에 놓인 곡식이나 돈을 받아 나온다. | 의의 | 전문적인 걸립패는 아니지만 다른 집단의 다양한 걸립의 형태도 존재하였다. 세습무나 창우 집단이 벌인 신청(神廳)걸립, 무당이 [신내림](/topic/신내림)을 받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공수](/topic/공수)를 해 주고 전곡을 받는 걸립 등의 형태이다. 성격과 전문성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 집단은 전문적인 걸립패와 상호 기능적·신앙적 교류로 기예의 질을 높이고 신앙적 대상의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고사소리](/topic/고사소리)와 풍물로 전곡을 비는 절걸립과 낭걸립은 초청한 집단이나 [마을](/topic/마을)을 찾아다니는 유랑적 성격이 있다. 걸립패의 이러한 유랑적 성격은 기예를 전업으로 생활을 유지한 [유랑예인집단](/topic/유랑예인집단)인 [[사당](/topic/사당)패](/topic/사당패)와 [남사당패](/topic/남사당패)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 의의 | 전문적인 걸립패는 아니지만 다른 집단의 다양한 걸립의 형태도 존재하였다. 세습무나 창우 집단이 벌인 신청(神廳)걸립, 무당이 [신내림](/topic/신내림)을 받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공수](/topic/공수)를 해 주고 전곡을 받는 걸립 등의 형태이다. 성격과 전문성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 집단은 전문적인 걸립패와 상호 기능적·신앙적 교류로 기예의 질을 높이고 신앙적 대상의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고사소리](/topic/고사소리)와 풍물로 전곡을 비는 절걸립과 낭걸립은 초청한 집단이나 [마을](/topic/마을)을 찾아다니는 유랑적 성격이 있다. 걸립패의 이러한 유랑적 성격은 기예를 전업으로 생활을 유지한 [유랑예인집단](/topic/유랑예인집단)인 [[사당](/topic/사당)패](/topic/사당패)와 [남사당패](/topic/남사당패)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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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립패의 걸립굿 | 3578 걸립패의 걸립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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