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작곡리 작평[마을](/topic/마을)에서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제당과 의례가 현재까지 잘 유지되고 [축문](/topic/축문)과 문서가 잘 보관되고 있는 서낭제. |
---|---|
mp3Cnt | 0 |
wkorname | 이기태 |
정의 |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작곡리 작평[마을](/topic/마을)에서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제당과 의례가 현재까지 잘 유지되고 [축문](/topic/축문)과 문서가 잘 보관되고 있는 서낭제. | 정의 |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작곡리 작평[마을](/topic/마을)에서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제당과 의례가 현재까지 잘 유지되고 [축문](/topic/축문)과 문서가 잘 보관되고 있는 서낭제. | 내용 | 작평[마을](/topic/마을)서낭제의 제당은 나무[기둥](/topic/기둥)과 돌로 쌓은 벽체, 양철[지붕](/topic/지붕)으로 된 [서낭당](/topic/서낭당)이다. 당 내부에는 두꺼운 나무판자로 된 제단과 그 앞에 ‘작평성황 배성황 배동막성황신위(鵲坪城隍 配城隍 配東幕城隍神位)’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원래 이 서낭당은 나무였는데 1992년 2월 10일에 중수하면서 시멘트와 블록을 이용해 현재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서낭당은 1867년(고종 4)에 산꼭대기에 있던 것을 아랫마을 옆에 위치한 작은 산의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신이 셋인 것은 이웃마을인 동막(東幕)에서 모시지 않는다는 신을 이 마을로 모셔 와서 본래부터 모시던 두 [서낭신](/topic/서낭신)과 함께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1936년)는 [별신굿](/topic/별신굿)을 하면서 모셔 왔다고 한다. 제의 명칭은 서낭제[城隍祭]이다. 제의는 음력 정월 열엿샛날 0시에 행한다. 정월 초열흘이 되면 도가와 유사를 선정하고, 도가에 금색([금줄](/topic/금줄))을 친다. 서낭제 때 [초헌](/topic/초헌)은 도가가 맡는다. [아헌](/topic/아헌)관과 [종헌](/topic/종헌)관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낮에 서낭당에 금색을 치고 청소를 한 뒤에 선정한다. 제물은 어류(청어), 백감주(2되), [삼실과](/topic/삼실과), 떡(쌀 2되), 참기름 등이다. 육류와 술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참기름은 종지에 담아서 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예전에는 도가에서 직접 참기름 두 되를 만들어 사용했다. 지금도 종지에 담아 밝힌 참기름불이 서낭제가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도록 잘 살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공동재산이 없기 때문에 제의의 경비는 정월 초사흗날에 풍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걸립해 모은다. 제의 진행은 다음과 같다. 정월대보름날 낮 12시가 가까울 무렵에 남성들이 모여 [꽹과리](/topic/꽹과리), 북, 징을 들고 굿을 치면서 제당으로 올라간다. 12시가 되면 남자 여섯 명이 금줄을 꼬고 두 명은 서낭당 청소를 하면서 [한지](/topic/한지)를 서낭당에 붙인다. 한지를 붙이는 것은 잡신을 쫓기 위함이라고 한다. 금색이 만들어지면 한지를 그곳에 꽂아서 서낭당 주변의 나무에 둘러친다. 이 일이 끝나면 세 명이 서낭당 앞에 서서 굿을 친다. 이것을 ‘서낭굿’이라고 한다. 이들은 서낭당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을 세 번 하고 나서 굿을 치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서낭당 주위를 두 차례 돌고 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마을에 도착하면 주민들은 굿을 멈추고 점심식사를 간단히 하고 나서 [제관](/topic/제관)을 선정한다. 정월 열엿샛날 0시가 가까워지면 주민들은 굿을 치기 시작한다. 굿은 세 차례로 나누어서 친다. 첫 번째는 제관들에게 제의 준비를 시작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을 사람들에게 제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제관들에게 서낭당을 향해 출발하라는 신호이다. 신호에 따라 제관들이 제당에 도착하면 먼저 제물을 진설하고 제의를 진행한다. 제의는 홀기에 따라 강신-재배-고축(告祝)-초헌례-아헌례-종헌례-부복-[국궁](/topic/국궁)-재배-소지올리기 순으로 진행한다. [축문](/topic/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辛亥)正月(壬子)朔十六日 仰堂主 順興安秉模 謹齋沐 敢昭告于 城隍氏之神位 配城隍氏之神位 配東幕城隍氏之神位 伏以鶴山西麓洞鵲有名天作 園林峰秀 巷明居處 世世崇寧 人人孝悌 家家才良 伏惟 城隍在上 洋洋導達 和氣垂惠五福 比屋之潤 莫派德壬 農工商各業其職紅素庫 袴紈齊蜀生斯長斯 百歲無繹 歌唱擊壤 其新九嘉 阿逐殃除 去山阿 人無口舌 村無盜賊 官不刑杖 災消福積 閉中日月 靜裡乾坤 六畜成長 五穀繁殖 鷄爲狗吠達乎 閭村衛三千周九十 維鵲維巢如意習 習旣往之惠 惟神所賜將來之福 亦惟神顧人和家潤 神亦有願旣生旣育 壽福綿遠方來 吉祥納于門 ○如水有淸如火以明愚昧者人○○者 財物○至薄 豈闕獻禮至誠 須祝無物不誠 我心湟恐○夜○寧令辰 何夕月正旣望擊鼓鳴金八音克諧馨 我酒禮潔 我○盛至誠需于神 其度思敬拜 獻頌慕○黙佑 尙饗 열엿샛날 오전 10시쯤에 마을 사람들은 도가에 모여 [음복](/topic/음복)을 한 다음 당고사에 사용한 비용 등을 정리하고 풍물을 치면서 즐겁게 논다. 이 마을에는 ‘제수흥성기’라는 결산보고서가 있다. 보통 주민들에게 5,000~3만 원을 걷는다. | 참고문헌 | 산간신앙 2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내용 | 작평[마을](/topic/마을)서낭제의 제당은 나무[기둥](/topic/기둥)과 돌로 쌓은 벽체, 양철[지붕](/topic/지붕)으로 된 [서낭당](/topic/서낭당)이다. 당 내부에는 두꺼운 나무판자로 된 제단과 그 앞에 ‘작평성황 배성황 배동막성황신위(鵲坪城隍 配城隍 配東幕城隍神位)’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원래 이 서낭당은 나무였는데 1992년 2월 10일에 중수하면서 시멘트와 블록을 이용해 현재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서낭당은 1867년(고종 4)에 산꼭대기에 있던 것을 아랫마을 옆에 위치한 작은 산의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신이 셋인 것은 이웃마을인 동막(東幕)에서 모시지 않는다는 신을 이 마을로 모셔 와서 본래부터 모시던 두 [서낭신](/topic/서낭신)과 함께 모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1936년)는 [별신굿](/topic/별신굿)을 하면서 모셔 왔다고 한다. 제의 명칭은 서낭제[城隍祭]이다. 제의는 음력 정월 열엿샛날 0시에 행한다. 정월 초열흘이 되면 도가와 유사를 선정하고, 도가에 금색([금줄](/topic/금줄))을 친다. 서낭제 때 [초헌](/topic/초헌)은 도가가 맡는다. [아헌](/topic/아헌)관과 [종헌](/topic/종헌)관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낮에 서낭당에 금색을 치고 청소를 한 뒤에 선정한다. 제물은 어류(청어), 백감주(2되), [삼실과](/topic/삼실과), 떡(쌀 2되), 참기름 등이다. 육류와 술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참기름은 종지에 담아서 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예전에는 도가에서 직접 참기름 두 되를 만들어 사용했다. 지금도 종지에 담아 밝힌 참기름불이 서낭제가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도록 잘 살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공동재산이 없기 때문에 제의의 경비는 정월 초사흗날에 풍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걸립해 모은다. 제의 진행은 다음과 같다. 정월대보름날 낮 12시가 가까울 무렵에 남성들이 모여 [꽹과리](/topic/꽹과리), 북, 징을 들고 굿을 치면서 제당으로 올라간다. 12시가 되면 남자 여섯 명이 금줄을 꼬고 두 명은 서낭당 청소를 하면서 [한지](/topic/한지)를 서낭당에 붙인다. 한지를 붙이는 것은 잡신을 쫓기 위함이라고 한다. 금색이 만들어지면 한지를 그곳에 꽂아서 서낭당 주변의 나무에 둘러친다. 이 일이 끝나면 세 명이 서낭당 앞에 서서 굿을 친다. 이것을 ‘서낭굿’이라고 한다. 이들은 서낭당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을 세 번 하고 나서 굿을 치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서낭당 주위를 두 차례 돌고 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마을에 도착하면 주민들은 굿을 멈추고 점심식사를 간단히 하고 나서 [제관](/topic/제관)을 선정한다. 정월 열엿샛날 0시가 가까워지면 주민들은 굿을 치기 시작한다. 굿은 세 차례로 나누어서 친다. 첫 번째는 제관들에게 제의 준비를 시작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을 사람들에게 제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제관들에게 서낭당을 향해 출발하라는 신호이다. 신호에 따라 제관들이 제당에 도착하면 먼저 제물을 진설하고 제의를 진행한다. 제의는 홀기에 따라 강신-재배-고축(告祝)-초헌례-아헌례-종헌례-부복-[국궁](/topic/국궁)-재배-소지올리기 순으로 진행한다. [축문](/topic/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辛亥)正月(壬子)朔十六日 仰堂主 順興安秉模 謹齋沐 敢昭告于 城隍氏之神位 配城隍氏之神位 配東幕城隍氏之神位 伏以鶴山西麓洞鵲有名天作 園林峰秀 巷明居處 世世崇寧 人人孝悌 家家才良 伏惟 城隍在上 洋洋導達 和氣垂惠五福 比屋之潤 莫派德壬 農工商各業其職紅素庫 袴紈齊蜀生斯長斯 百歲無繹 歌唱擊壤 其新九嘉 阿逐殃除 去山阿 人無口舌 村無盜賊 官不刑杖 災消福積 閉中日月 靜裡乾坤 六畜成長 五穀繁殖 鷄爲狗吠達乎 閭村衛三千周九十 維鵲維巢如意習 習旣往之惠 惟神所賜將來之福 亦惟神顧人和家潤 神亦有願旣生旣育 壽福綿遠方來 吉祥納于門 ○如水有淸如火以明愚昧者人○○者 財物○至薄 豈闕獻禮至誠 須祝無物不誠 我心湟恐○夜○寧令辰 何夕月正旣望擊鼓鳴金八音克諧馨 我酒禮潔 我○盛至誠需于神 其度思敬拜 獻頌慕○黙佑 尙饗 열엿샛날 오전 10시쯤에 마을 사람들은 도가에 모여 [음복](/topic/음복)을 한 다음 당고사에 사용한 비용 등을 정리하고 풍물을 치면서 즐겁게 논다. 이 마을에는 ‘제수흥성기’라는 결산보고서가 있다. 보통 주민들에게 5,000~3만 원을 걷는다. | 참고문헌 | 산간신앙 2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역사 | 작평(鵲坪)은 일명 ‘까치들’이라고 하며, 아래까치들과 위까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천 윤씨(醴泉 尹氏)들이 영조 때 아랫[마을](/topic/마을)에 터를 잡았으며, 앞산이 까치집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작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씨(石氏)가 광해군 때 입촌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610년(광해군 2)에 충주 석씨(忠州 石氏) 21대손 복수(福壽)가 안동군 풍산면 도양동에서 이곳으로 이주할 때 기념 식수한 것이 현재의 용각정(龍角亭) 느티나무이며, 다래덩굴을 치고 들어온 곳이 바로 [풍수](/topic/풍수)지리상 까치혈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까치들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 앞에는 철종 때 사람 남영필(南永弼)의 효자비각이 있다. 마을 앞산인 용각산에는 [명당](/topic/명당)인 용뿔의 산혈(山穴)이 있다고 하여 지난 천년 동안 [지관](/topic/지관)(地官)들이 드나들었으나 찾지 못했다는 말이 전한다. 현재는 각성바지 마을이며, 풍물이 매우 활성화된 마을이다. | 역사 | 작평(鵲坪)은 일명 ‘까치들’이라고 하며, 아래까치들과 위까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천 윤씨(醴泉 尹氏)들이 영조 때 아랫[마을](/topic/마을)에 터를 잡았으며, 앞산이 까치집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작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씨(石氏)가 광해군 때 입촌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610년(광해군 2)에 충주 석씨(忠州 石氏) 21대손 복수(福壽)가 안동군 풍산면 도양동에서 이곳으로 이주할 때 기념 식수한 것이 현재의 용각정(龍角亭) 느티나무이며, 다래덩굴을 치고 들어온 곳이 바로 [풍수](/topic/풍수)지리상 까치혈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까치들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마을 앞에는 철종 때 사람 남영필(南永弼)의 효자비각이 있다. 마을 앞산인 용각산에는 [명당](/topic/명당)인 용뿔의 산혈(山穴)이 있다고 하여 지난 천년 동안 [지관](/topic/지관)(地官)들이 드나들었으나 찾지 못했다는 말이 전한다. 현재는 각성바지 마을이며, 풍물이 매우 활성화된 마을이다. |
---|
신구문화사 | 제주도무속자료사전 | 현용준 | 1980 | 집문당 | 제주도 무속 연구 | 현용준 | 198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