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읍내리성황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조선시대 후기 때 순흥부(順興府) 읍치(邑治)에서 행하던 관행(官行) 성황제였으나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지역민이 주관하는 동제 형식으로 변화한 성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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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기 때 순흥부(順興府) 읍치(邑治)에서 행하던 관행(官行) 성황제였으나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지역민이 주관하는 동제 형식으로 변화한 성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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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정의조선시대 후기 때 순흥부(順興府) 읍치(邑治)에서 행하던 관행(官行) 성황제였으나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지역민이 주관하는 동제 형식으로 변화한 성황제.
정의조선시대 후기 때 순흥부(順興府) 읍치(邑治)에서 행하던 관행(官行) 성황제였으나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지역민이 주관하는 동제 형식으로 변화한 성황제.
참조영주읍내리성황제관련문서
참고문헌읍치 [성황제](/topic/성황제) 주제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의 창출 (이기태, 민속원, 1997)
참조영주읍내리성황제관련문서
참고문헌읍치 [성황제](/topic/성황제) 주제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의 창출 (이기태, 민속원, 1997)
내용1. [제관](/topic/제관) 선정 : 정월 초사흗날이 되면 초군청 소속의 [좌상](/topic/좌상)과 고문 및 역원(성원)들이 좌상댁에 모여 제관을 선출하고 성황제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보통은 설날 이전에 제관을 정해 두고, 이날 추인받는 것이 상례이다. 제관은 상당제의를 주관하는 ‘상당’(또는 ‘상당어른’, ‘상당주인’이라고 함)과 본당제의를 주관하는 ‘본당’(‘본당어른’ 또는 ‘본당주인’이라고 함)으로 각 한 명이다. 제물 운반 같은 여러 [가지](/topic/가지) 일을 거드는 사람 또는 동행할 사람들은 별도의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지만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들도 제관이라고 부른다. 이때 모인 주민들은 거론되는 사람들과 그 집안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는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론된 사람에 대한 정(淨)과 부정(不淨)을 가려 선정한다. 그 기준은 집안에 자녀․손자녀․[가축](/topic/가축) 등이 임신한 자나 환자, 사고자, 기독교 신자 등이 없어야 한다. 특히 당사자의 개인사정을 고려하였다. 금기 기간에 출타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선정된 사람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은 성황신에 대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해 자신과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좌상은 초군청의 총책임자이지만 성황제 동안에는 ‘상당주인’이 총책임자가 되어서 제의에 관한 사항을 총지휘한다. 이러한 위계는 제관 선정 직후에 행해지는 ‘술잔 돌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술잔은 상당주인에게 “술 드시라”는 경칭과 함께 가장 먼저 돌리고 나서 그 다음에 본당주인-좌상-고문의 연령순으로 돌려졌다.

2. 금기와 [재계](/topic/재계) : 정화의례는 제관이 재계와 금기행위를 행함으로써 일상적인 상황에서부터 제의적 신성성을 획득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제관 부부는 초이렛날에 희생물인 ‘양반’을 모시기 위해 영주시장으로 가기 전 아침 일찍 ‘상당주인’댁에 모여 죽계천으로 가서 목욕을 한다. 이러한 재계 행위는 매일 식사 전에 행하며, 성황제를 행하는 날까지 계속한다. 목욕을 하러 갈 때는 남성은 남성, 여성은 여성끼리 줄을 지어 간다. 이때 밝은 색 수건을 목에 걸고 고개를 숙인 채 가며, 가면서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한다. 수건은 멀리서도 제관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마을](/topic/마을) 사람들도 그들을 발견하면 놀란 듯이 돌아서서 가야 한다. 제관들이 부정에서 오염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공동체의 노력인 것이다. 이 시기가 겨울철이기 때문에 보통 개울의 얼음을 깨고 목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초사흗날에 ‘상당’댁에 모인 제관들은 함께 [금줄](/topic/금줄)을 꼬아서 두고, 인근의 산으로 가서 금줄을 쳐 둘 소나무를 베어 온다. ‘상당’댁으로 돌아온 제관들은 ‘상당’댁의 [대문](/topic/대문) 양쪽에 소나무를 세우고 금줄을 친다. 그리고 ‘상당’은 자기 집 앞 양쪽으로 [골목](/topic/골목)길 입구까지 [황토](/topic/황토)를 한 줌씩 놓아둔다. ‘본당’과 다른 제관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이때부터 제관들 부부는 제의를 행하는 날까지 부부관계와 외출, 다른 사람과의 직ㆍ간접적 접촉, 욕설, 싸움, 살생, 개고기 먹기 등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모든 행위를 금한다. 마을을 다닐 때도 고개를 숙이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과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한다. 혹시라도 오염될 수 있는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과수(果樹) [가지치기](/topic/가지치기), 쇠죽 끓이기, 집안청소, 식사와 잠자기 등 다른 사람과 접촉이 없는 생활은 가능하지만 집 안에서도 분뇨 등 냄새가 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들은 부정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금지된다.

3. ‘어른모시기’와 장보기 : 정월 초이렛날이 되면 좌상과 제관들은 성황제의 희생물인 ‘양반’을 모시고 제물을 장만하기 위해 영주 장(場)으로 향한다. 이날은 성황제에서 가장 신성한 ‘어른’을 모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거동하기 전인 이른 새벽에 ‘상당’댁에 모여 차를 타고 영주 장으로 출발한다. 2004년에는 차를 타고 가다가 멀리서 상여가 지나가는 것을 본 ‘상당’이 즉시 차를 세워서 함께 가던 모든 사람에게 강으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 세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들은 먼저 영주 우시장(牛市場)으로 간다. 이곳에서 ‘양반’을 선정해 구입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며칠 전에 희생물로 적절한 대상을 미리 물색해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반’이 선정되면 그 자리에서 ‘근봉(謹封)’이라고 쓴 [한지](/topic/한지)를 ‘양반’의 등에 묶는다. 그리고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정화수](/topic/정화수)를 상에 차려 두고 제관복을 차려입은 제관들이 재배를 올린다. 이때부터 일반적인 소는 희생물인 ‘양반’으로 승화되기 위해 정화의례를 거치게 된다. 호칭도 ‘양반님’이며, 언어는 모두 경어체로 사용해야 한다. 제관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양반님 빨리 가시더”, “양반님 저리 가시더”라고만 말할 뿐이다. 여물도 ‘양반님 식사’라고 표현해야 한다. 예전에는 ‘양반’을 곧바로 마을까지 ‘모시고’ 와야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시장에 달린 마방(馬房)에 며칠 모셔 두기도 하고, 마을로 모실 때에는 차량을 이용하고 있다.

‘양반님’이 ‘상당’댁에 도착하면 [마당](/topic/마당)에 미리 만들어 둔 우사(牛舍)인 ‘양반님 숙소’로 모셔 두고 짚을 주면서 “양반님 식사하시더”라고 하고, 이것을 잘 먹을 때는 “잘 자신다”고 한다. 제관들과 그 부인들은 모두 목욕재계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양반님 숙소’ 앞에서 절을 한다. 이러한 절차는 ‘치성드린다’고 하며, 상당성황제를 행하는 정월 열나흗날 새벽까지 지속한다.

장보기는 ‘양반님’을 모셔온 뒤에 행한다. 제관들과 그 일행은 아주 작은 소리와 손짓으로 의사를 소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시기에 영주 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볼 수 있으며, 비록 잘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을 붙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이 물건을 사러 상점이나 노점에 들르면 그 주인이 가장 좋은 물건을 내놓으면서 가장 적절한 값을 부른다고 한다. 제관들이 물건 값을 흥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주인은 해를 입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주 장의 사람들은 제관들에게 성황제를 위한 찬조금을 건네기도 한다.

4. 제수 장만 : 제수는 본당제의의 것은 ‘본당’댁, 상당제의의 것은 ‘상당’댁에서 제관들 부인이 각각 준비한다. 그래서 이들 집을 ‘도가(都家)’라고도 한다. 특히 상당주인댁을 ‘상도가(上都家)’라고 한다. 떡을 찔 때 외부인이 들여다보거나 부정을 타게 되면(부정에 오염된다는 말) 떡의 김이 빠져나와 잘 익지 않으면서 떡의 표면에 새 발자국이 생긴다고 하여 떡 찌는 과정을 매우 중시한다. 두 제의의 제물은 메, 탕, 나물류, 부침개, 떡, 생선 등 동일하다. 본당제의에서는 쇠고기가 있다는 것과 [위패](/topic/위패)가 많다 보니 상당제의에 비해 양이 훨씬 많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5. 본당제의 : 집사들은 정월 열사흗날 이른 아침에 ‘본당’댁에서 제주(祭酒)가 든 병 주둥이를 한지로 막아 두는 ‘제주 봉하기’를 한 다음 제물을 차량에 싣고 본당이 위치한 순흥면 읍내리의 [진산](/topic/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 기슭으로 향한다. 특히 집을 나서기 전에 떡시루 위에다 종지에 기름을 붓고 불을 밝힌 종짓불을 올려 둔다. 이 불은 제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꺼지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한다. 제물을 실은 차량이 집을 떠날 때 제관 부인들은 집 앞에서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절한다. 집사들은 제물을 [지게](/topic/지게)에 나누어 싣고 본당까지 올라간다. 이때 ‘본당’이 앞서고 ‘상당’과 좌상 및 나머지 제관들이 그 뒤를 따른다. 제당에 도착한 이들은 먼저 제당과 그 주변을 청소하고, 제당 뒤에 있는 [우물](/topic/우물)에서 물을 떠와 제당 주변을 돌면서 “부정 풉니다”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솔잎에 물을 적셔서 뿌린다. 이 과정이 ‘부정풀기’이다. 그러고는 제당 안으로 들어가 [제상](/topic/제상) 위에 모셔져 있는 위패에 절을 올리고는 한지를 [고깔](/topic/고깔) 모양으로 접어서 위패에 걸어 둔다. 이것을 폐백을 드린다고 한다. 위패는 왼쪽에서부터 산신지위[三神堂神位], 서배위신위(西配位神位), 순흥안관성황신위(順興按官城隍神位), 동배위신위(東配位神位)가 있다. 왼쪽에 산신을 모시고 순흥안관성황신을 중심에 모시는데 이는 순흥부 시절 순흥부 납작한 작은 돌이 놓여 있다. 이 돌에는 ‘술 할마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술 할마시’는 이 지역 일대에 전승되고 있는 ‘마고할매’라고 한다. 제관들은 ‘술 할마시’에게 술을 부어 주면 일 년 동안 술을 많이 먹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제의는 모든 위패 앞에 제물을 진설한 다음 각 신위 앞에서 술을 따르고 순흥안관성황신-산신-서배위신-동배위신의 순으로 재배한다. 그러고 나서 제관들이 함께 재배하고 소지(燒紙)를 올린다. 소지는 대통령소지에서부터 도지사소지-군수소지-면장소지-순흥주민일동소지-지서주임소지-초군청소지-개인소지 순으로 올린다. 소지의 순서에서 이 제의가 관제(官祭)였음을 엿볼 수 있다. 개인소지는 찬조자들의 명단을 펼쳐 두고 [덕담](/topic/덕담)을 하면서 올리는 소지이다. 종이에 불이 잘 붙고 공중으로 잘 올라가면 소원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에 한 제관이 ‘술 할마시’에게 다가가서 “할매요. 올해 술 많이 생기게 해 주소”라고 말하면서 돌에 술을 붓는다. 이때 절은 하지 않는다.

제의가 끝나면 [철상](/topic/철상)하고 ‘본당’댁으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과 함께 간단한 [음복](/topic/음복)을 하고 곧 헤어졌다. 하당주인은 집의 금줄을 걷어낸다. 제관들은 이때부터 외출을 하지 않고 집 안에 머물면서 잠도 자는 등 휴식을 취한다. 이튿날 새벽에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6. 상당제의 : 정월 열사흗날 저녁때가 되면 좌상과 ‘본당’ 및 다른 제관들이 상도가에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한다. 그 뒤 제물을 점검하고 함께 밤을 지새는 제관이 있는가 하면 집에 돌아가는 제관도 있었다. 열나흗날 새벽 3시쯤이 되면 모든 제관(11명)이 상당주인댁에 모여서 제물을 차에 싣고, ‘양반님’은 다른 차에 태우고 새벽 4시가 되기 전에 출발한다. 이것을 ‘양반님 출타하신다’고 한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발해야 하는 것은 본래 8㎞ 정도의 산길을 ‘양반님’을 모시고 걸어서 가야하기도 하지만 이곳에 교회가 들어온 이후로는 새벽 4시에 읍내리 교회의 종이 울리기 때문에 이 [종소리](/topic/종소리)가 울릴 시각쯤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가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장소에서 차를 멈추고는 칠흑같이 깜깜한 새벽에 모든 제관이 개울로 내려가 화톳불을 피우고 개울의 얼음을 깨뜨린 다음 얼음물에 목욕한다. 이들은 화톳불 옆에서 잠시 몸을 녹인 뒤에 상당으로 향한다. 상당주인댁에 모인 제관 부인들은 ‘양반님이 출타’하실 때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합장](/topic/합장)하면서 큰절을 올리고, 그 뒤 함께 목욕한 다음 상당주인댁에 모여 조용하게 하루를 보낸다.

제당은 ‘양반 숙소’라고도 부르는데 공간이 매우 넓다. 제당에 들어선 상당주인은 먼저 바가지에 물을 떠서 소나무 가지에 적신 뒤 주변에 뿌리면서 제당을 한 바퀴 돈다. 이것을 ‘부정풀기’라고 한다. 제당은 편평한 넓은 마당이 중심에 위치하고, 돌로 된 [계단](/topic/계단) 맨 위쪽에는 금성대군의 피가 묻어 있다는 혈석(血石)을 모시고 있는 상당(上堂)이 있다. 그 왼쪽 계단 밑에는 소백산령지위(小白山靈之位)라고 쓴 위패를 모신 산신각(山神閣)이 위치하며, 주변에는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상당주인은 산신각에 술과 술잔, 미역 한 오라기를 바친다. 상당에는 준비해 온 다양한 차린다. ‘양반님’은 제당 맞은편 소나무숲의 정해진 나무에 묶어서 모셨다. 제당에 도착한 이들은 집사들이 미리 준비해 둔 [장작](/topic/장작)으로 불을 지펴 새앙([새옹](/topic/새옹))에 밥을 짓는 ‘새앙 짓기’를 한다.

동이 틀 무렵에 사제관(四祭官, 상당주인․하당주인․좌상․고문)은 ‘식전(食前) 새앙’을 짓고 나머지는 희생제의인 ‘제물 돋우기’를 한다. ‘제물 돋우기’ 과정은 양반 ‘지우기’와 ‘돋우기’로 이루어진다. ‘지우기’는 희생을 치르기 위해 목숨을 끊는 과정이다. 제관들이 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예전에도 재인(才人)을 부르기도 했고, 지금도 보통 전문 도살꾼을 초빙한다. ‘돋우기’는 희생물의 [가죽](/topic/가죽)을 벗기고 육신을 해체하는 작업인 ‘각뜨기’와 해체한 희생물의 부위를 산신과 금성대군에게 바치는 과정인 ‘돋우기’가 있다. ‘돋우기’에서 왼쪽 앞다리는 산신에게 먼저 바치고, 간ㆍ염통ㆍ허파ㆍ비장 등을 상당에 바친 다음 고기와 골 등을 상당에 바치는 것으로 끝난다. 제당에 바치고 남은 부위들은 제관들, 초군청 임원들, 주민 음복용 등으로 분배해 자루에 담아 둔다. 희생물의 분배는 제관의 수고비인 셈이며, 주민 몫은 대보름날 아침에 상도가에 모인 주민들과 함께 음복하기 위함이다. 이때는 이미 오후 3~4시가 된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른 제관들은 화톳불의 숯을 이용해 야외용 작은 솥인 ‘새앙(새옹)’에 메를 짓기도 하고, 희생물의 발을 화톳불에 던져 넣어서 털을 그슬린 다음 그 털을 벗기는 작업도 하며 내장을 개울가에 가져가서 깨끗하게 씻는 일을 하였다. 새앙에 메를 지을 때에는 불을 입으로 불어서도 안 되고, 뚜껑을 열어도 안 된다. 메물이 넘치지 않도록 소나무 가지로 물을 적셔서 솥에 뿌리면서 잘 지켜보아야 한다. 메물이 넘치든가 메가 설익거나 타거나 하면 정성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여 온갖 정성을 들여야 한다. 메가 다 되면 제당 주위의 갈대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새앙에 걸쳐서 산신당에 갖다 두고 절한 다음 물러난다. 1~2시간이 지난 뒤에 그 새앙을 물려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남는 메는 버리지 않고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가져가야 한다. 모든 작업이 끝나면 저녁때가 된다. 이때까지 메를 계속 지어서 올리고,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면서 자정이 되도록 기다린다. 피와 내장은 제물로 사용하지 않고 가마솥에 넣어 끓여서 제관들의 술안주로 사용한다.

자정 무렵([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자시)이 되면 흰색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를 입은 사제관이 각각 메를 지어 상당에 올리면서 제의를 시작한다. [시계](/topic/시계)가 없었을 때에는 제당의 일정한 나무에 달이 걸릴 무렵으로 밤 12시를 추정했다고 한다. 제의는 술잔 올리기-재배-[독축](/topic/독축)-재배-소지올리기-철상의 순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진행한다. 이곳에서도 소지올리기는 본당제의에서처럼 대통령소지에서부터 찬조자소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행한다. 이때 산신각의 제의는 행하지 않는다. 제의가 모두 끝나면 철상한 다음 서둘러서 마을로 돌아간다. 이른 새벽에 마을에 도착한 이들은 주민들이 피워 둔 짚불을 타넘고 집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정화의례인 셈이다. 상도가에 도착한 제관들은 금줄을 걷어낸 다음 방 안에 모여 간단하게 음복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한다.

7. 음복과 결산 : 대보름날 아침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주민이 상도가에 모인다. 사람들에게는 작은 접시에 조금씩 담은 희생물의 날고기가 한 접시씩 제공된다. 제당에서 가져온 가마솥의 국이 술안주로 밥과 함께 제공되기도 한다. 주민들은 대부분 이 고기를 모두 먹지만 남으면 종이에 싸서 집으로 가져간다. 이 고기를 먹으면 고뿔(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 특히 개가 이 고기를 먹으면 즉사한다고 하여 조심한다. 음복의 공간은 성별로 분리된다. 남성은 [사랑방](/topic/사랑방), 여성은 [안방](/topic/안방)에서 각각 음복을 한다. 젊은 사람들은 마당에서 음복하면서 놀이도 즐겼다. 이 마을에서는 음복날에 행하는 [농악](/topic/농악)이 유명하다. 2004년까지만 해도 농악의 [상쇠](/topic/상쇠)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한마당이 행해졌다. 상쇠가 돌아가신이후부터 유명무실하였다가 최근에 ‘순흥초군청축제’가 행해지면서 부활됐다.

상도가에 음복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른 한쪽에서는 상당주인, 하당주인, 좌상, 서기 등이 모여 성황제에 사용된 경비와 찬조금 등을 결산한다. 정리가 끝나면 그 내역을 [전지](/topic/전지)(全紙)에 기록해 마당 한 쪽에 붙여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다.

음복을 마친 뒤에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서 참여하는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읍내리 부잣집들의 후원 아래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지금 ‘순흥초군청축제’에서 재현되고 있다.
내용1. [제관](/topic/제관) 선정 : 정월 초사흗날이 되면 초군청 소속의 [좌상](/topic/좌상)과 고문 및 역원(성원)들이 좌상댁에 모여 제관을 선출하고 성황제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보통은 설날 이전에 제관을 정해 두고, 이날 추인받는 것이 상례이다. 제관은 상당제의를 주관하는 ‘상당’(또는 ‘상당어른’, ‘상당주인’이라고 함)과 본당제의를 주관하는 ‘본당’(‘본당어른’ 또는 ‘본당주인’이라고 함)으로 각 한 명이다. 제물 운반 같은 여러 [가지](/topic/가지) 일을 거드는 사람 또는 동행할 사람들은 별도의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지만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들도 제관이라고 부른다. 이때 모인 주민들은 거론되는 사람들과 그 집안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는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론된 사람에 대한 정(淨)과 부정(不淨)을 가려 선정한다. 그 기준은 집안에 자녀․손자녀․[가축](/topic/가축) 등이 임신한 자나 환자, 사고자, 기독교 신자 등이 없어야 한다. 특히 당사자의 개인사정을 고려하였다. 금기 기간에 출타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선정된 사람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은 성황신에 대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해 자신과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좌상은 초군청의 총책임자이지만 성황제 동안에는 ‘상당주인’이 총책임자가 되어서 제의에 관한 사항을 총지휘한다. 이러한 위계는 제관 선정 직후에 행해지는 ‘술잔 돌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술잔은 상당주인에게 “술 드시라”는 경칭과 함께 가장 먼저 돌리고 나서 그 다음에 본당주인-좌상-고문의 연령순으로 돌려졌다.

2. 금기와 [재계](/topic/재계) : 정화의례는 제관이 재계와 금기행위를 행함으로써 일상적인 상황에서부터 제의적 신성성을 획득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제관 부부는 초이렛날에 희생물인 ‘양반’을 모시기 위해 영주시장으로 가기 전 아침 일찍 ‘상당주인’댁에 모여 죽계천으로 가서 목욕을 한다. 이러한 재계 행위는 매일 식사 전에 행하며, 성황제를 행하는 날까지 계속한다. 목욕을 하러 갈 때는 남성은 남성, 여성은 여성끼리 줄을 지어 간다. 이때 밝은 색 수건을 목에 걸고 고개를 숙인 채 가며, 가면서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한다. 수건은 멀리서도 제관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마을](/topic/마을) 사람들도 그들을 발견하면 놀란 듯이 돌아서서 가야 한다. 제관들이 부정에서 오염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공동체의 노력인 것이다. 이 시기가 겨울철이기 때문에 보통 개울의 얼음을 깨고 목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초사흗날에 ‘상당’댁에 모인 제관들은 함께 [금줄](/topic/금줄)을 꼬아서 두고, 인근의 산으로 가서 금줄을 쳐 둘 소나무를 베어 온다. ‘상당’댁으로 돌아온 제관들은 ‘상당’댁의 [대문](/topic/대문) 양쪽에 소나무를 세우고 금줄을 친다. 그리고 ‘상당’은 자기 집 앞 양쪽으로 [골목](/topic/골목)길 입구까지 [황토](/topic/황토)를 한 줌씩 놓아둔다. ‘본당’과 다른 제관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이때부터 제관들 부부는 제의를 행하는 날까지 부부관계와 외출, 다른 사람과의 직ㆍ간접적 접촉, 욕설, 싸움, 살생, 개고기 먹기 등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모든 행위를 금한다. 마을을 다닐 때도 고개를 숙이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과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한다. 혹시라도 오염될 수 있는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과수(果樹) [가지치기](/topic/가지치기), 쇠죽 끓이기, 집안청소, 식사와 잠자기 등 다른 사람과 접촉이 없는 생활은 가능하지만 집 안에서도 분뇨 등 냄새가 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들은 부정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금지된다.

3. ‘어른모시기’와 장보기 : 정월 초이렛날이 되면 좌상과 제관들은 성황제의 희생물인 ‘양반’을 모시고 제물을 장만하기 위해 영주 장(場)으로 향한다. 이날은 성황제에서 가장 신성한 ‘어른’을 모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거동하기 전인 이른 새벽에 ‘상당’댁에 모여 차를 타고 영주 장으로 출발한다. 2004년에는 차를 타고 가다가 멀리서 상여가 지나가는 것을 본 ‘상당’이 즉시 차를 세워서 함께 가던 모든 사람에게 강으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 세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들은 먼저 영주 우시장(牛市場)으로 간다. 이곳에서 ‘양반’을 선정해 구입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며칠 전에 희생물로 적절한 대상을 미리 물색해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반’이 선정되면 그 자리에서 ‘근봉(謹封)’이라고 쓴 [한지](/topic/한지)를 ‘양반’의 등에 묶는다. 그리고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정화수](/topic/정화수)를 상에 차려 두고 제관복을 차려입은 제관들이 재배를 올린다. 이때부터 일반적인 소는 희생물인 ‘양반’으로 승화되기 위해 정화의례를 거치게 된다. 호칭도 ‘양반님’이며, 언어는 모두 경어체로 사용해야 한다. 제관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양반님 빨리 가시더”, “양반님 저리 가시더”라고만 말할 뿐이다. 여물도 ‘양반님 식사’라고 표현해야 한다. 예전에는 ‘양반’을 곧바로 마을까지 ‘모시고’ 와야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시장에 달린 마방(馬房)에 며칠 모셔 두기도 하고, 마을로 모실 때에는 차량을 이용하고 있다.

‘양반님’이 ‘상당’댁에 도착하면 [마당](/topic/마당)에 미리 만들어 둔 우사(牛舍)인 ‘양반님 숙소’로 모셔 두고 짚을 주면서 “양반님 식사하시더”라고 하고, 이것을 잘 먹을 때는 “잘 자신다”고 한다. 제관들과 그 부인들은 모두 목욕재계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양반님 숙소’ 앞에서 절을 한다. 이러한 절차는 ‘치성드린다’고 하며, 상당성황제를 행하는 정월 열나흗날 새벽까지 지속한다.

장보기는 ‘양반님’을 모셔온 뒤에 행한다. 제관들과 그 일행은 아주 작은 소리와 손짓으로 의사를 소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시기에 영주 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볼 수 있으며, 비록 잘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을 붙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이 물건을 사러 상점이나 노점에 들르면 그 주인이 가장 좋은 물건을 내놓으면서 가장 적절한 값을 부른다고 한다. 제관들이 물건 값을 흥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주인은 해를 입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주 장의 사람들은 제관들에게 성황제를 위한 찬조금을 건네기도 한다.

4. 제수 장만 : 제수는 본당제의의 것은 ‘본당’댁, 상당제의의 것은 ‘상당’댁에서 제관들 부인이 각각 준비한다. 그래서 이들 집을 ‘도가(都家)’라고도 한다. 특히 상당주인댁을 ‘상도가(上都家)’라고 한다. 떡을 찔 때 외부인이 들여다보거나 부정을 타게 되면(부정에 오염된다는 말) 떡의 김이 빠져나와 잘 익지 않으면서 떡의 표면에 새 발자국이 생긴다고 하여 떡 찌는 과정을 매우 중시한다. 두 제의의 제물은 메, 탕, 나물류, 부침개, 떡, 생선 등 동일하다. 본당제의에서는 쇠고기가 있다는 것과 [위패](/topic/위패)가 많다 보니 상당제의에 비해 양이 훨씬 많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5. 본당제의 : 집사들은 정월 열사흗날 이른 아침에 ‘본당’댁에서 제주(祭酒)가 든 병 주둥이를 한지로 막아 두는 ‘제주 봉하기’를 한 다음 제물을 차량에 싣고 본당이 위치한 순흥면 읍내리의 [진산](/topic/진산)(鎭山)인 비봉산(飛鳳山) 기슭으로 향한다. 특히 집을 나서기 전에 떡시루 위에다 종지에 기름을 붓고 불을 밝힌 종짓불을 올려 둔다. 이 불은 제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꺼지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한다. 제물을 실은 차량이 집을 떠날 때 제관 부인들은 집 앞에서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절한다. 집사들은 제물을 [지게](/topic/지게)에 나누어 싣고 본당까지 올라간다. 이때 ‘본당’이 앞서고 ‘상당’과 좌상 및 나머지 제관들이 그 뒤를 따른다. 제당에 도착한 이들은 먼저 제당과 그 주변을 청소하고, 제당 뒤에 있는 [우물](/topic/우물)에서 물을 떠와 제당 주변을 돌면서 “부정 풉니다”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솔잎에 물을 적셔서 뿌린다. 이 과정이 ‘부정풀기’이다. 그러고는 제당 안으로 들어가 [제상](/topic/제상) 위에 모셔져 있는 위패에 절을 올리고는 한지를 [고깔](/topic/고깔) 모양으로 접어서 위패에 걸어 둔다. 이것을 폐백을 드린다고 한다. 위패는 왼쪽에서부터 산신지위[三神堂神位], 서배위신위(西配位神位), 순흥안관성황신위(順興按官城隍神位), 동배위신위(東配位神位)가 있다. 왼쪽에 산신을 모시고 순흥안관성황신을 중심에 모시는데 이는 순흥부 시절 순흥부 납작한 작은 돌이 놓여 있다. 이 돌에는 ‘술 할마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술 할마시’는 이 지역 일대에 전승되고 있는 ‘마고할매’라고 한다. 제관들은 ‘술 할마시’에게 술을 부어 주면 일 년 동안 술을 많이 먹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제의는 모든 위패 앞에 제물을 진설한 다음 각 신위 앞에서 술을 따르고 순흥안관성황신-산신-서배위신-동배위신의 순으로 재배한다. 그러고 나서 제관들이 함께 재배하고 소지(燒紙)를 올린다. 소지는 대통령소지에서부터 도지사소지-군수소지-면장소지-순흥주민일동소지-지서주임소지-초군청소지-개인소지 순으로 올린다. 소지의 순서에서 이 제의가 관제(官祭)였음을 엿볼 수 있다. 개인소지는 찬조자들의 명단을 펼쳐 두고 [덕담](/topic/덕담)을 하면서 올리는 소지이다. 종이에 불이 잘 붙고 공중으로 잘 올라가면 소원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에 한 제관이 ‘술 할마시’에게 다가가서 “할매요. 올해 술 많이 생기게 해 주소”라고 말하면서 돌에 술을 붓는다. 이때 절은 하지 않는다.

제의가 끝나면 [철상](/topic/철상)하고 ‘본당’댁으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과 함께 간단한 [음복](/topic/음복)을 하고 곧 헤어졌다. 하당주인은 집의 금줄을 걷어낸다. 제관들은 이때부터 외출을 하지 않고 집 안에 머물면서 잠도 자는 등 휴식을 취한다. 이튿날 새벽에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6. 상당제의 : 정월 열사흗날 저녁때가 되면 좌상과 ‘본당’ 및 다른 제관들이 상도가에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한다. 그 뒤 제물을 점검하고 함께 밤을 지새는 제관이 있는가 하면 집에 돌아가는 제관도 있었다. 열나흗날 새벽 3시쯤이 되면 모든 제관(11명)이 상당주인댁에 모여서 제물을 차에 싣고, ‘양반님’은 다른 차에 태우고 새벽 4시가 되기 전에 출발한다. 이것을 ‘양반님 출타하신다’고 한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발해야 하는 것은 본래 8㎞ 정도의 산길을 ‘양반님’을 모시고 걸어서 가야하기도 하지만 이곳에 교회가 들어온 이후로는 새벽 4시에 읍내리 교회의 종이 울리기 때문에 이 [종소리](/topic/종소리)가 울릴 시각쯤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가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장소에서 차를 멈추고는 칠흑같이 깜깜한 새벽에 모든 제관이 개울로 내려가 화톳불을 피우고 개울의 얼음을 깨뜨린 다음 얼음물에 목욕한다. 이들은 화톳불 옆에서 잠시 몸을 녹인 뒤에 상당으로 향한다. 상당주인댁에 모인 제관 부인들은 ‘양반님이 출타’하실 때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합장](/topic/합장)하면서 큰절을 올리고, 그 뒤 함께 목욕한 다음 상당주인댁에 모여 조용하게 하루를 보낸다.

제당은 ‘양반 숙소’라고도 부르는데 공간이 매우 넓다. 제당에 들어선 상당주인은 먼저 바가지에 물을 떠서 소나무 가지에 적신 뒤 주변에 뿌리면서 제당을 한 바퀴 돈다. 이것을 ‘부정풀기’라고 한다. 제당은 편평한 넓은 마당이 중심에 위치하고, 돌로 된 [계단](/topic/계단) 맨 위쪽에는 금성대군의 피가 묻어 있다는 혈석(血石)을 모시고 있는 상당(上堂)이 있다. 그 왼쪽 계단 밑에는 소백산령지위(小白山靈之位)라고 쓴 위패를 모신 산신각(山神閣)이 위치하며, 주변에는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상당주인은 산신각에 술과 술잔, 미역 한 오라기를 바친다. 상당에는 준비해 온 다양한 차린다. ‘양반님’은 제당 맞은편 소나무숲의 정해진 나무에 묶어서 모셨다. 제당에 도착한 이들은 집사들이 미리 준비해 둔 [장작](/topic/장작)으로 불을 지펴 새앙([새옹](/topic/새옹))에 밥을 짓는 ‘새앙 짓기’를 한다.

동이 틀 무렵에 사제관(四祭官, 상당주인․하당주인․좌상․고문)은 ‘식전(食前) 새앙’을 짓고 나머지는 희생제의인 ‘제물 돋우기’를 한다. ‘제물 돋우기’ 과정은 양반 ‘지우기’와 ‘돋우기’로 이루어진다. ‘지우기’는 희생을 치르기 위해 목숨을 끊는 과정이다. 제관들이 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예전에도 재인(才人)을 부르기도 했고, 지금도 보통 전문 도살꾼을 초빙한다. ‘돋우기’는 희생물의 [가죽](/topic/가죽)을 벗기고 육신을 해체하는 작업인 ‘각뜨기’와 해체한 희생물의 부위를 산신과 금성대군에게 바치는 과정인 ‘돋우기’가 있다. ‘돋우기’에서 왼쪽 앞다리는 산신에게 먼저 바치고, 간ㆍ염통ㆍ허파ㆍ비장 등을 상당에 바친 다음 고기와 골 등을 상당에 바치는 것으로 끝난다. 제당에 바치고 남은 부위들은 제관들, 초군청 임원들, 주민 음복용 등으로 분배해 자루에 담아 둔다. 희생물의 분배는 제관의 수고비인 셈이며, 주민 몫은 대보름날 아침에 상도가에 모인 주민들과 함께 음복하기 위함이다. 이때는 이미 오후 3~4시가 된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른 제관들은 화톳불의 숯을 이용해 야외용 작은 솥인 ‘새앙(새옹)’에 메를 짓기도 하고, 희생물의 발을 화톳불에 던져 넣어서 털을 그슬린 다음 그 털을 벗기는 작업도 하며 내장을 개울가에 가져가서 깨끗하게 씻는 일을 하였다. 새앙에 메를 지을 때에는 불을 입으로 불어서도 안 되고, 뚜껑을 열어도 안 된다. 메물이 넘치지 않도록 소나무 가지로 물을 적셔서 솥에 뿌리면서 잘 지켜보아야 한다. 메물이 넘치든가 메가 설익거나 타거나 하면 정성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여 온갖 정성을 들여야 한다. 메가 다 되면 제당 주위의 갈대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새앙에 걸쳐서 산신당에 갖다 두고 절한 다음 물러난다. 1~2시간이 지난 뒤에 그 새앙을 물려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남는 메는 버리지 않고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가져가야 한다. 모든 작업이 끝나면 저녁때가 된다. 이때까지 메를 계속 지어서 올리고,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면서 자정이 되도록 기다린다. 피와 내장은 제물로 사용하지 않고 가마솥에 넣어 끓여서 제관들의 술안주로 사용한다.

자정 무렵([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자시)이 되면 흰색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를 입은 사제관이 각각 메를 지어 상당에 올리면서 제의를 시작한다. [시계](/topic/시계)가 없었을 때에는 제당의 일정한 나무에 달이 걸릴 무렵으로 밤 12시를 추정했다고 한다. 제의는 술잔 올리기-재배-[독축](/topic/독축)-재배-소지올리기-철상의 순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진행한다. 이곳에서도 소지올리기는 본당제의에서처럼 대통령소지에서부터 찬조자소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행한다. 이때 산신각의 제의는 행하지 않는다. 제의가 모두 끝나면 철상한 다음 서둘러서 마을로 돌아간다. 이른 새벽에 마을에 도착한 이들은 주민들이 피워 둔 짚불을 타넘고 집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정화의례인 셈이다. 상도가에 도착한 제관들은 금줄을 걷어낸 다음 방 안에 모여 간단하게 음복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한다.

7. 음복과 결산 : 대보름날 아침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주민이 상도가에 모인다. 사람들에게는 작은 접시에 조금씩 담은 희생물의 날고기가 한 접시씩 제공된다. 제당에서 가져온 가마솥의 국이 술안주로 밥과 함께 제공되기도 한다. 주민들은 대부분 이 고기를 모두 먹지만 남으면 종이에 싸서 집으로 가져간다. 이 고기를 먹으면 고뿔(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 특히 개가 이 고기를 먹으면 즉사한다고 하여 조심한다. 음복의 공간은 성별로 분리된다. 남성은 [사랑방](/topic/사랑방), 여성은 [안방](/topic/안방)에서 각각 음복을 한다. 젊은 사람들은 마당에서 음복하면서 놀이도 즐겼다. 이 마을에서는 음복날에 행하는 [농악](/topic/농악)이 유명하다. 2004년까지만 해도 농악의 [상쇠](/topic/상쇠)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한마당이 행해졌다. 상쇠가 돌아가신이후부터 유명무실하였다가 최근에 ‘순흥초군청축제’가 행해지면서 부활됐다.

상도가에 음복이 진행되는 동안에 다른 한쪽에서는 상당주인, 하당주인, 좌상, 서기 등이 모여 성황제에 사용된 경비와 찬조금 등을 결산한다. 정리가 끝나면 그 내역을 [전지](/topic/전지)(全紙)에 기록해 마당 한 쪽에 붙여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다.

음복을 마친 뒤에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서 참여하는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읍내리 부잣집들의 후원 아래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지금 ‘순흥초군청축제’에서 재현되고 있다.
역사이 성황제는 조선시대 초기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관계 있는 금성대군을 모신 것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수양대군의 친동생으로, 단종복위운동 사건이 탄로난 뒤 흥주도호부(興州都護府)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이보흠(李甫欽) 부사를 비롯한 많은 지역 인사와 함께 다시 복위운동을 펼치다가 거사 [직전](/topic/직전)에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사사(賜死)되고 도호부는 폐부(廢府)되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죽임을 당하였고, 당시 목숨을 잃은 지역민의 수가 엄청나서 그 피가 죽계천(竹溪川)을 메우고 10리까지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도호부는 숙종대에 복부(復府)되었고, 금성대군도 나중에 복관(復官)되었다.

현재 행해지는 성황제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지역사회가 폐부되었다가 복부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금성대군은 지역 주민들이 이전부터 신앙하던 성황신으로 모셔[지게](/topic/지게) 되는 상징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복부된 뒤 금성대군은 이 고을 사람의 꿈에 나타나 “(이웃[마을](/topic/마을)인) 죽동의 거랑(죽계천)에 나의 피가 묻은 돌[血石]이 있으니 그것을 옮겨서 제사를 지내 달라”고 하였다. 주민들은 그 사실을 논의하여 금성대군을 죽동의 성황신으로 모시면서 매년 행하는 성황제의 대상 신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성황당에 모셔진 혈석에 오줌을 누는 등 해코지할 때 금성대군은 다시 주민의 꿈에 나타나 [두레](/topic/두레)골로 옮겨서 제사를 올려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역민은 당시 산신각만 모시고 있던 두레골에 성황당을 건립하고 혈석을 옮겨 모시게 되었다. 이로써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의 성황사는 이곳의 [진산](/topic/진산)인 비봉산 기슭에서 모시던 읍치 성황사(邑治城隍祠)를 ‘본당(本堂)’, 읍내리에서 4㎞ 이상 떨어진 지리산 중턱의 단산면 두레골에 있는 성황당을 ‘상당(上堂)’(‘두레골 성황당’이라고도 함)으로 각각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있던 제당’과 ‘위계가 높은 제당’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 순흥부 읍치의 성황사에서 모시는 성황신은 부(府)의 수호신인 ‘순흥안관성황신’이다. 이 역시 금성대군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제의는 향리들이 주재하였다. 그러나 이 성황제는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국가가 주도하는 관제(官祭) 성격에서 이 지역사회의 지배계층이 주도하여 결성하였다고 전하는 [농민](/topic/농민)집단인 초군청(樵軍廳)으로 제사권이 이전되었다. 초군청은 일제강점기에 성황제를 주도하고 죽동의 혈석을 두레골로 이전하였다. 또한 초군청은 광복 이후에 열악한 제사권을 강화하기 위해 논을 구입하고 초군청 자금을 불려 나가면서 경제적 기반과 함께 두레골 성황당을 여러 사람 이름으로 연명등기하여 법적 기반을 다졌으며, 초군청 성원을 늘려 나가면서 사회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여기에 성황제에 대한 신성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신앙적 장치까지 마련하면서 성황제를 지금까지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역사회의 변화 속에서 제의집단의 변화와 상징물의 봉헌 장소 이동, 성황제를 전승하기 위한 제의집단의 다양한 노력 등을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들 과정에 대한 구비전승 자료가 현재까지 생생하게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 후기에 국가권력(도호부)에 의한 지역 주민의 상징적 중심 이동과 제당 중수를 통한 지역민 정체성의 통합 등에 관한 이건기 및 중수기가 현재까지 [현판](/topic/현판)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가 끝나고 일제강점기로 통치권력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주도하던 성황제가 민간으로 주도권이 이양되고, 그 과정에 대한 명확한 구비전승 자료와 함께 당시에 참여한 인물들을 통하여 확인된 증언자료 및 서류 등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주민들이 성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한 일종의 농민단체인 ‘초군청’에 관한 많은 문서가 보관되어 있어 주도권 변화와 제의를 전승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민속의 변화와 지속을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현존하고, 이 자료를 통해 민속이 ‘민(民)의 생활양식’이며 민의 변화가 생활양식(문화)을 변화시킨다는 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초군청의 문서들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의 혼란스러우면서도 빈곤했던 농민들이 상징적 중심을 통하여 생활의 활력을 키우면서 자기[民] 중심의 문화를 존속하고 이용함으로써 그들만의 문화, 즉 민속을 계승․변화․발전시키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역사이 성황제는 조선시대 초기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관계 있는 금성대군을 모신 것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수양대군의 친동생으로, 단종복위운동 사건이 탄로난 뒤 흥주도호부(興州都護府)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이보흠(李甫欽) 부사를 비롯한 많은 지역 인사와 함께 다시 복위운동을 펼치다가 거사 [직전](/topic/직전)에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사사(賜死)되고 도호부는 폐부(廢府)되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죽임을 당하였고, 당시 목숨을 잃은 지역민의 수가 엄청나서 그 피가 죽계천(竹溪川)을 메우고 10리까지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도호부는 숙종대에 복부(復府)되었고, 금성대군도 나중에 복관(復官)되었다.

현재 행해지는 성황제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지역사회가 폐부되었다가 복부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금성대군은 지역 주민들이 이전부터 신앙하던 성황신으로 모셔[지게](/topic/지게) 되는 상징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복부된 뒤 금성대군은 이 고을 사람의 꿈에 나타나 “(이웃[마을](/topic/마을)인) 죽동의 거랑(죽계천)에 나의 피가 묻은 돌[血石]이 있으니 그것을 옮겨서 제사를 지내 달라”고 하였다. 주민들은 그 사실을 논의하여 금성대군을 죽동의 성황신으로 모시면서 매년 행하는 성황제의 대상 신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성황당에 모셔진 혈석에 오줌을 누는 등 해코지할 때 금성대군은 다시 주민의 꿈에 나타나 [두레](/topic/두레)골로 옮겨서 제사를 올려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역민은 당시 산신각만 모시고 있던 두레골에 성황당을 건립하고 혈석을 옮겨 모시게 되었다. 이로써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의 성황사는 이곳의 [진산](/topic/진산)인 비봉산 기슭에서 모시던 읍치 성황사(邑治城隍祠)를 ‘본당(本堂)’, 읍내리에서 4㎞ 이상 떨어진 지리산 중턱의 단산면 두레골에 있는 성황당을 ‘상당(上堂)’(‘두레골 성황당’이라고도 함)으로 각각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있던 제당’과 ‘위계가 높은 제당’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 순흥부 읍치의 성황사에서 모시는 성황신은 부(府)의 수호신인 ‘순흥안관성황신’이다. 이 역시 금성대군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제의는 향리들이 주재하였다. 그러나 이 성황제는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국가가 주도하는 관제(官祭) 성격에서 이 지역사회의 지배계층이 주도하여 결성하였다고 전하는 [농민](/topic/농민)집단인 초군청(樵軍廳)으로 제사권이 이전되었다. 초군청은 일제강점기에 성황제를 주도하고 죽동의 혈석을 두레골로 이전하였다. 또한 초군청은 광복 이후에 열악한 제사권을 강화하기 위해 논을 구입하고 초군청 자금을 불려 나가면서 경제적 기반과 함께 두레골 성황당을 여러 사람 이름으로 연명등기하여 법적 기반을 다졌으며, 초군청 성원을 늘려 나가면서 사회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여기에 성황제에 대한 신성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신앙적 장치까지 마련하면서 성황제를 지금까지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역사회의 변화 속에서 제의집단의 변화와 상징물의 봉헌 장소 이동, 성황제를 전승하기 위한 제의집단의 다양한 노력 등을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들 과정에 대한 구비전승 자료가 현재까지 생생하게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 후기에 국가권력(도호부)에 의한 지역 주민의 상징적 중심 이동과 제당 중수를 통한 지역민 정체성의 통합 등에 관한 이건기 및 중수기가 현재까지 [현판](/topic/현판)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가 끝나고 일제강점기로 통치권력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주도하던 성황제가 민간으로 주도권이 이양되고, 그 과정에 대한 명확한 구비전승 자료와 함께 당시에 참여한 인물들을 통하여 확인된 증언자료 및 서류 등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주민들이 성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한 일종의 농민단체인 ‘초군청’에 관한 많은 문서가 보관되어 있어 주도권 변화와 제의를 전승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민속의 변화와 지속을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현존하고, 이 자료를 통해 민속이 ‘민(民)의 생활양식’이며 민의 변화가 생활양식(문화)을 변화시킨다는 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초군청의 문서들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의 혼란스러우면서도 빈곤했던 농민들이 상징적 중심을 통하여 생활의 활력을 키우면서 자기[民] 중심의 문화를 존속하고 이용함으로써 그들만의 문화, 즉 민속을 계승․변화․발전시키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대전광역시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설경 지정조사보고서양종승1998
국립민속박물관대전ㆍ충청무속의 설경연구 [민속학연구]양종승1999
국립민속박물관충청도 굿의 설경(說經) [민속소식]양종승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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