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띠뱃놀이

한국무속신앙사전
위도띠뱃놀이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topic/마을)에서 정월 초사흘에 행해지는 마을굿. 위도띠뱃놀이는 1985년 2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되었으며, 남해안ㆍ동해안ㆍ서해안 [별신굿](/topic/별신굿)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풍어제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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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topic/마을)에서 정월 초사흘에 행해지는 마을굿. 위도띠뱃놀이는 1985년 2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되었으며, 남해안ㆍ동해안ㆍ서해안 [별신굿](/topic/별신굿)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풍어제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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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원
정의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topic/마을)에서 정월 초사흘에 행해지는 마을굿. 위도띠뱃놀이는 1985년 2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되었으며, 남해안ㆍ동해안ㆍ서해안 [별신굿](/topic/별신굿)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풍어제의 하나이다.
상호참조위도대리[마을](/topic/마을)원당
참고문헌위도의 민속 (국립민속박물관, 1984)
한국의 풍어제 (하효길, 대원사, 1998)
내용위도띠뱃놀이의 본래 명칭은 위도면 대리 [마을](/topic/마을)에서 행해지는 굿이라 하여 대리 원당제ㆍ원당굿 등으로 불렀으나 현재는 위도띠뱃놀이와 위도띠뱃굿 등으로 부르고 있다. 본래 대리원당제로 불리는 명칭이 위도띠뱃놀이로 바뀌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1978년 전국민속경연대회 출전 당시 제작된 팸플릿에 인쇄소의 실수로 ‘위도띄뱃놀이’라고 활자화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상 수상시 신문사들도 위도띄뱃놀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했고, 이후 한동안 ‘띠뱃놀이’와 ‘띄뱃놀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위도띠뱃놀이에서 신앙의 주요 대상은 당집에 모셔져 있는 원당마누라와 본당마누라다. 당집은 마을 왼편 당제(젯)봉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에게 이곳은 영험한 존재이자 중요한 신앙처다. 특히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로, 과거 [조기잡이](/topic/조기잡이)가 한창일 때 대리 마을의 당집은 조기를 잡기 위해 칠산어장을 찾은 어업민들에게도 중요한 신앙처였다. 또한 타 지역의 어선들도 원당 앞을 지날 때면 배 위에서 [고사](/topic/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위도띠뱃놀이의 원당은 이 지역의 어장까지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위도띠뱃놀이의 제일(祭日)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다. 위도 면 소재지인 진리 마을이 정월 초이튿날인 데 비해 위도띠뱃놀이가 행해지는 대리와 위도 본도(本島)에서 조금 떨어진 식도 마을은 초사흗날에 마을굿을 한다. 정월 초사흗날 위도띠뱃놀이를 치르기 위해 주민들은 전년도 섣달부터 제의 준비를 한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에도 섣달 중순에 마을회의를 통해 제의 규모와 제의에 사용될 비용의 추렴 범위 및 액수 등을 논의하고, 제의를 주관할 제만과 원화장·부화장 등을 선정하였다. 본래 마을의 선주(船主)와 마을민들이 조금씩 돈을 거둬 행사를 치렀지만 근래에는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제의를 준비한다. 제수(祭需) 준비는 1970년대에만 하더라도 장배(장을 보러 다니는 배)를 타고 곰소·줄포·격포 등지로 나가 제물을 준비했으나 지금은 보존회장과 총무 등이 직접 트럭을 몰고 부안(扶安)에 가서 제물을 준비해 온다. 위도띠뱃놀이에 사용되는 제물은 과일, 돼지 한 마리, 북어, 떡(절편), 나물, 여러 종류의 생선 등이다. 제주(祭酒)는 과거엔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막걸리와 청주를 쓴다. 여러 제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돼지는 위도 지역에서 기르던 것을 샀으나, 요즘은 부안이나 격포 등지에서 구입해 온다. 이렇게 구입해온 것을 [가지](/topic/가지)고 제만과 화장 등이 보존회관에 미리 제수를 준비해 놓는다.

위도띠뱃놀이는 원당제, [띠배](/topic/띠배)제작, 주산돌기, 용왕굿, 띠배띄우기, 대동[마당](/topic/마당)([뒤풀이](/topic/뒤풀이)) 순으로 진행된다. 과거에는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있었던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까지 분위기가 이어졌으나 줄다리기가 없어지면서 그런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초사흗날 당일 아침이 되면 [뱃기](/topic/뱃기)를 든 선주와 풍물을 치는 주민들, 무녀와 축관 등이 [영기](/topic/영기)를 앞세우고 원당에 오른다. 원당에 도착하여 무녀가 당집 안 제단에 제물을 차리고 나면 제만이 초에 불을 밝히고 절을 한 후 [축문](/topic/축문)을 읽는다. [독축](/topic/독축)이 끝나면 당굿에 들어간다. 당굿은 장구와 징 [장단](/topic/장단)에 맞춰 무녀가 진행한다. 당굿은 [성주굿](/topic/성주굿)을 시작으로 산신굿, 손님굿, 지신굿, 서낭굿, 깃굿, 문지기굿으로 진행된다. 어선을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일 년 동안 배에 모실 서낭을 내림받는 깃굿은 어업민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굿이다.

당굿을 마친 일행은 당굿에 차려놓은 제물을 챙겨 마을로 내려와 곧장 마을의 동쪽 바닷가로 가서 [한지](/topic/한지)에 싼 [용왕밥](/topic/용왕밥)을 바다에 던지고 절을 한다. 용왕밥을 던지는 장소에는 용왕바위가 있다. 이 용왕바위는 대리 마을의 용왕당이 되는 셈이다.

용왕밥을 던지고 나면 마을 한 바퀴를 도는 주산돌기에 들어간다. 주산돌기는 [제관](/topic/제관)과 풍물패, 뱃기를 든 일행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따라 마을을 도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정월대보름에 줄다리기를 위해 미리 만들어 놓은 암ㆍ숫줄을 어깨에 메고 돌았다. 주산돌기를 할 때는 한지에 싼 당밥을 땅에 묻고 무녀와 제관이 절을 하고 나면 풍물을 친다. 이는 마을이 평안하고 아무런 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주산돌기는 대리 마을뿐 아니라 인접해 있는 전막리(箭幕里) 마을에까지 가서 한다. 과거 전막리 마을이 대리 마을에 속해 있었던 연유로 전막리 마을의 뒤편 해변과 [우물](/topic/우물)가에 가서 같은 식으로 절을 하고 풍물을 친다.

당굿과 주산돌기가 진행되는 동안 대리 마을 선착장에서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바다에 띄워 보낼 띠배를 제작한다. 띠와 짚·싸리나무 등을 함께 사용해 배 형태로 만들고, 돛대와 닻을 달아 띠배를 완성한다. 그러고 나면 성기가 부각된 [볏짚](/topic/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 7개를 각 위치에 맞는 곳에 놓는다.

주산돌기와 띠배제작을 마치고 나면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무녀를 중심으로 용왕굿을 한다. 용왕굿은 띠배가 제작된 선착장에서 진행하며, 이때에는 마을의 여자들은 물론 마을에 살고 있는 온 주민이 모여 용왕굿을 지켜본다. 과거에 용왕굿을 할 때에는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가족이 있는 집에서 별도로 [용왕상](/topic/용왕상)을 차려 용왕굿이 진행되는 장소와 해안가에 펼쳐놓기도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마을을 대표해 큰 용왕상을 차려 굿을 진행한다. 용왕굿이 끝나면 여자들은 용왕상에 올려놓았던 제물을 조금씩 떼어 큰 함지에 담아 섞은 다음 바다에 고[수레](/topic/수레)를 한다. 이때 풍물패의 장단에 맞춰 [[가래](/topic/가래)질소리](/topic/가래질소리)와 배치기, 술배소리 등을 부르며 한바탕 큰 놀이판을 펼친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띠배를 바다에 띄워 보낸다. 띠배를 모선(母船)에 연결하여 바다 가운데로 끌고 나가 크게 원을 그리며 돌고 난 뒤에 연결된 끈을 풀어 놓으면 띠배는 망망대해로 떠나간다. 모선에는 풍물패와 소리꾼 등이 승선하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무사히 띠배가 용왕님께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띠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기 위해 함께 나갔던 어선이 마을로 돌아오면 해변에서는 큰 놀이판이 벌어진다. 이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모여 한 해 동안의 풍어와 무사고를 기원하며 밤늦게까지 놀이판을 벌인다. 놀이판이 끝나면 배를 부리던 남자들은 당집 반대편에 있는 도젯봉에 올라 도깨비불을 관찰한다. 도깨비불이 보이는 어장에 그물을 놓으면 한 해 풍어를 올릴 수 있다고 하여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젯봉에 올라가 도깨비불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 제의를 주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산을 하고 나면 비로소 위도띠뱃놀이가 마[무리](/topic/무리)된다.

위도띠뱃굿놀이는 서해안 지역에서 보이는 풍어제의 형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뱃기내림인 깃굿과 제의 마지막에 띠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는 것을 보면 서해안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여타의 마을 풍어제 형식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위도띠뱃놀이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위도띠뱃놀이가 행해지면 대리 지역의 어업민 이외에 타 지역의 어선들도 직ㆍ간접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과거 조기어업을 위해 칠산어장을 찾았던 어선들이 대리 마을에 원당제가 있을 때면 참여하여 제비를 부담하기도 하였으며, 배를 타고 항해하는 과정에서 대리의 원당이 보이면 선상에 음식을 간단히 차려 고사를 지냈다는 사례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역사위도띠뱃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위도 지역이 오래전부터 서해안의 어업 중심지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일찍부터 행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서해안에서 조기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과 위도 지역의 입도조(入島祖)의 역사, 위도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 등을 종합해 보면 위도띠뱃놀이는 200~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내용은 조선 후기에 오면서 우리네 조기어업이 이전과는 다르게 매우 활성화되었다는 조기어업의 역사와 일치한다. 위도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과거 조기어업의 쇠퇴와 함께 큰굿이 없어지고 당제까지도 시들해진 적이 있는 가운데 배를 타고 나타나는 도둑들의 침입(해적행위)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이도곤’이라는 [마을](/topic/마을)의 이장이 나서서 다시 주민들을 단합시키고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위도띠뱃놀이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위도띠뱃놀이 역사는 조선 후기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세대학교 출판부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유동식1975
형설출판사한국무속론최길성1981
열화당한국의 무당최길성1981
고대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한국민속대관 3-민간신앙·종교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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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사무속신앙1989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1991
대원사한국의 무속김태곤1991
대원사팔도굿황루시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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