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학봉마을기고사

한국무속신앙사전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 학봉[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농기](/topic/농기)(農旗)를 모시고 지내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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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금남면 금천리 학봉[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농기](/topic/농기)(農旗)를 모시고 지내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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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정의연기군 금남면 금천리 학봉[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농기](/topic/농기)(農旗)를 모시고 지내는 제사.
정의연기군 금남면 금천리 학봉[마을](/topic/마을)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농기](/topic/농기)(農旗)를 모시고 지내는 제사.
내용금천리는 쇠내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1구와 2구로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금천, 학봉, 황산이 합쳐져 하나의 [마을](/topic/마을)을 이룬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금천1리와 금천2리로 나뉘면서 각각 원래의 금천이 금천2리, 학봉과 황산이 금천1리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금천1리라는 행정구역명보다는 학봉․황산 등 마을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금천2리가 원래의 금천이었다는 의미로 원금천이라고 불린다. 현재에 사용하는 금천1구, 금천2구의 구분은 금천1리, 금천2리의 구분과 다른 것이 없다. 학봉마을은 금천2구를 지칭한다.

학봉마을은 80가구 정도로 이루어진 각성바지 마을이다. 전체 가구 가운데 마을 토박이는 2~3가구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친(父親)이나 조부(祖父)대에 입촌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경우 학봉마을 옆에 본원(本院)을 두고 있는 금강대도(金剛大道)의 신봉자가 대부분이다.

1. 학봉마을의 [농기](/topic/농기) : 농기(農旗)는 농신(農神) 또는 신농씨(神農氏)와 관련이 깊은 기물이면서 마을의 상징이기도 한 복합적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이 때문에 농기를 소중히 다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과 농기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게 나타나곤 한다.

한강 이남의 농촌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과 관련하여 찾아볼 수 있는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가운데 [기세배](/topic/기세배)(旗歲拜)라는 것이 있다. 서로 인근에 위치한 마을끼리 농기를 앞세우고 한 곳에 모여 우열을 가리고, 그 서열에 따라 동생이 된 농기는 형님이 된 농기를 마주칠 때마다 깃대를 기울여 절을 해야 한다. 이는 이듬해 새로운 서열이 정해질 때까지 지켜진다.

금남면 일대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농번기에 이르러 [두레](/topic/두레)가 한창일 때 일을 나갔다가 다른 마을의 농기와 만나면 그 자리에서 한바탕 [기싸움](/topic/기싸움)이 벌어진다. 싸움은 매우 치열하여 깃대가 꺾이기도 하고 기가 찢어지기도 한다. 일단 결말이 나면 패배한 농기는 한동안 승리한 농기 앞에서 깃대를 낮추어 수그려야 한다. 기세배와 같은 모습이다.

기싸움이 벌어지면 깃발이나 깃대도 튼튼해야 하겠지만 우선은 힘 좋은 젊은 장정이 많은 쪽이 우세하기 마련이다. 학봉마을은 동네가 가난하고 장정이 많지 않아 주변 동네의 기싸움에서도 자주 패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금강대도를 신봉하여 입촌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성장한 뒤에는 장정이 많이 늘어났고, 이와 함께 다른 마을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경우도 많이 사라[지게](/topic/지게) 되었다.

학봉마을의 농기는 아래로 긴 직사각형 모습으로 가로 170㎝, 세로 220㎝의 [광목](/topic/광목)에 ‘농천하대본(農天下大本)’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글씨는 검은색 천을 글씨 모양대로 잘라서 광목에 [바느질](/topic/바느질)하는 방법으로 새겼다. 기 주변에는 역시 검은 천으로 지네발을 달았다. 농기에는 ‘단기 사이구이년(檀紀 四二九二年)’이라 적혀 있어 1959년에 제작한 깃발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깃대는 8m 길이의 대나무를 사용하고, 깃대 끝은 작목(꿩의 꽁지)으로 장식하였으며, 그 밑에는 머리태라 부르는 흰 술을 달았다.

[영기](/topic/영기)(令旗)는 높이 45㎝, 너비 55㎝의 삼각형 깃발이다. 다른 마을의 영기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역시 광목으로 만든 깃발에 푸른 글씨로 ‘令’자를 써 넣었다. 원래는 깃대 끝에 창촉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으나 그것이 부러진 뒤 대나무 막대기로 대치하였다.

2. 기고사의 준비 :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가 지날 즈음 동네에서는 기고사 준비를 위한 여러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기고사를 집에서 지냈기 때문에 고사를 지낼 집 선정이 우선이었다. 고사 집은 무엇보다 마을에서 연륜이 있고 신임이 두터운 사람의 집으로 선정하되 그 집에 궂은일이 없어야 했다. 젊은 여자가 있어 생리를 하는 것, 근간에 상을 치르거나 상가에 다녀오는 등의 일이 모두 궂은일에 속한다. 또한 [마당](/topic/마당)이 넓고 집의 규모도 큰 곳이 좋았다.

농기는 정월 초열흘날에 기고사를 지낼 집 마당에 미리 세워 놓는다. 이 때문에 농기를 모신 집에서는 더욱 몸단속을 하기 마련이었다. 일단 농기를 세우게 되면 집주인도 외출을 자제하고 외부 사람들도 안으로 절대 들이지 않는 것이 예사였다.

제사에 관한 음식은 기고사를 지내게 된 집에서 모두 준비하였고, 그에 관한 비용은 물론 동계의 자금에서 충당되었다. [제관](/topic/제관)은 총 세 명을 선정하되 주로 고사 집 주인과 동네 어른, 이장이 맡아 오는 것이 관례였다. 제관들 모두 선출된 뒤에는 부정을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야 했다.

근간에는 따로 기고사를 지낼 집을 정하지 않고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지낸다. 정월 열나흗날 아침에 농기와 영기를 마을회관 앞마당에 세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자정 이전에 모든 고사 절차를 마치는 것으로 간소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사의 제물은 비교적 간단하다. 고사상 위에 올리는 것은 돼지머리, 백설기 시루, 시루에 꽂을 [북어](/topic/북어) 두 마리, 밤, 귤, 배, [사과](/topic/사과), 초, 잔 등이다.

3. 기고사의 연행 : 날이 어두워지면 미리 세워 둔 농기 앞에 [병풍](/topic/병풍)을 치고 [고사반](/topic/고사반)을 준비한다. 제물을 진설하여 준비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기고사가 연행된다.

먼저 풍장패가 풍장을 울리며 [제상](/topic/제상) 주변을 도는 동안 [초헌](/topic/초헌)관이 [분향](/topic/분향)(焚香)하고 재배를 한다. 강신례(降神禮)로 빈 잔에 집사가 술을 채워 주면 초헌관은 이를 퇴주잔에 물리고 빈 잔을 상 위로 올린다. 강신 후 초헌관은 재배한다.

집사는 초헌관이 다시 내려 들고 있는 잔에 술을 따르고 초헌관은 제상 위에 올려 [헌작](/topic/헌작)(獻爵)을 한다. 헌작 후 [독축](/topic/독축)(讀祝)을 한다. 이때 초헌관은 자리를 물리지 않고 부복(俯伏)한 상태이며, 참가한 마을 사람들은 [국궁](/topic/국궁)(鞠躬)을 한 상태이다.

維歲次 甲申正月更子 朔 十四一 開祝
金川二區 洞民一同 敢昭告于
農旗之神 欽維我 農旗之神 自古司穀司命
惠及黎民居此洞民
伏蒙 重恩 歲歲安過 伏感無量 伏維
農旗之神 當今 特加 惠監特賜 保佑
使我洞民 時和年豊 五穀豊登 家給人足
福利增進 災殃消滅 壽福綿綿 大洞一室
親睦和合 英材輩出 福祉具現 一里咸寧 安過太平
謹具酒果 恭伸奠獻 尙饗

독축이 끝나자 초헌관이 몸을 일으켜 미리 준비한 돈봉투를 돼지머리의 입에 꽂아 넣고 두 번 절한다. [아헌](/topic/아헌)관이 헌작을 하고 역시 돈봉투를 돼지머리의 입에 꽂아 넣으며 재배한다. [종헌](/topic/종헌)관 역시 헌작 후 돈봉투를 돼지머리 입에 꽂고 재배한다. 이때 풍장패는 각 [헌관](/topic/헌관)이 재배를 하고 일어날 때마다 풍장을 울리며 분위기를 돋운다.

종헌관의 헌작과 재배까지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이때 자리에 참여한 모든 마을 사람은 준비한 소지종이를 나누어 [가지](/topic/가지)고 [비손](/topic/비손)하며 각자 자신의 소지를 올린다. 소지 올리기를 끝낸 사람들은 [음복](/topic/음복)을 한다. 한쪽에서는 시루의 손잡이 부분에 꽂은 북어를 내려 [실타래](/topic/실타래)로 감은 뒤 농기의 깃대 상단에 묶는다. 이것으로 기고사는 끝나고 마을의 부녀자들은 [철상](/topic/철상)(撤床)을 시작한다.

기고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에서 고사상에 올린 음식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거나 풍장을 울리며 즐긴다. 마을회관 한쪽에서는 따로 음식을 마련하여 식사를 겸한 음복을 준비한다.
참고문헌현지조사(2004년 2월 3일~2월 6일) 자료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내용금천리는 쇠내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1구와 2구로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금천, 학봉, 황산이 합쳐져 하나의 [마을](/topic/마을)을 이룬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금천1리와 금천2리로 나뉘면서 각각 원래의 금천이 금천2리, 학봉과 황산이 금천1리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금천1리라는 행정구역명보다는 학봉․황산 등 마을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금천2리가 원래의 금천이었다는 의미로 원금천이라고 불린다. 현재에 사용하는 금천1구, 금천2구의 구분은 금천1리, 금천2리의 구분과 다른 것이 없다. 학봉마을은 금천2구를 지칭한다.

학봉마을은 80가구 정도로 이루어진 각성바지 마을이다. 전체 가구 가운데 마을 토박이는 2~3가구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친(父親)이나 조부(祖父)대에 입촌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경우 학봉마을 옆에 본원(本院)을 두고 있는 금강대도(金剛大道)의 신봉자가 대부분이다.

1. 학봉마을의 [농기](/topic/농기) : 농기(農旗)는 농신(農神) 또는 신농씨(神農氏)와 관련이 깊은 기물이면서 마을의 상징이기도 한 복합적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이 때문에 농기를 소중히 다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과 농기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게 나타나곤 한다.

한강 이남의 농촌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과 관련하여 찾아볼 수 있는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가운데 [기세배](/topic/기세배)(旗歲拜)라는 것이 있다. 서로 인근에 위치한 마을끼리 농기를 앞세우고 한 곳에 모여 우열을 가리고, 그 서열에 따라 동생이 된 농기는 형님이 된 농기를 마주칠 때마다 깃대를 기울여 절을 해야 한다. 이는 이듬해 새로운 서열이 정해질 때까지 지켜진다.

금남면 일대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농번기에 이르러 [두레](/topic/두레)가 한창일 때 일을 나갔다가 다른 마을의 농기와 만나면 그 자리에서 한바탕 [기싸움](/topic/기싸움)이 벌어진다. 싸움은 매우 치열하여 깃대가 꺾이기도 하고 기가 찢어지기도 한다. 일단 결말이 나면 패배한 농기는 한동안 승리한 농기 앞에서 깃대를 낮추어 수그려야 한다. 기세배와 같은 모습이다.

기싸움이 벌어지면 깃발이나 깃대도 튼튼해야 하겠지만 우선은 힘 좋은 젊은 장정이 많은 쪽이 우세하기 마련이다. 학봉마을은 동네가 가난하고 장정이 많지 않아 주변 동네의 기싸움에서도 자주 패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금강대도를 신봉하여 입촌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성장한 뒤에는 장정이 많이 늘어났고, 이와 함께 다른 마을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경우도 많이 사라[지게](/topic/지게) 되었다.

학봉마을의 농기는 아래로 긴 직사각형 모습으로 가로 170㎝, 세로 220㎝의 [광목](/topic/광목)에 ‘농천하대본(農天下大本)’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글씨는 검은색 천을 글씨 모양대로 잘라서 광목에 [바느질](/topic/바느질)하는 방법으로 새겼다. 기 주변에는 역시 검은 천으로 지네발을 달았다. 농기에는 ‘단기 사이구이년(檀紀 四二九二年)’이라 적혀 있어 1959년에 제작한 깃발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깃대는 8m 길이의 대나무를 사용하고, 깃대 끝은 작목(꿩의 꽁지)으로 장식하였으며, 그 밑에는 머리태라 부르는 흰 술을 달았다.

[영기](/topic/영기)(令旗)는 높이 45㎝, 너비 55㎝의 삼각형 깃발이다. 다른 마을의 영기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역시 광목으로 만든 깃발에 푸른 글씨로 ‘令’자를 써 넣었다. 원래는 깃대 끝에 창촉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으나 그것이 부러진 뒤 대나무 막대기로 대치하였다.

2. 기고사의 준비 :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가 지날 즈음 동네에서는 기고사 준비를 위한 여러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기고사를 집에서 지냈기 때문에 고사를 지낼 집 선정이 우선이었다. 고사 집은 무엇보다 마을에서 연륜이 있고 신임이 두터운 사람의 집으로 선정하되 그 집에 궂은일이 없어야 했다. 젊은 여자가 있어 생리를 하는 것, 근간에 상을 치르거나 상가에 다녀오는 등의 일이 모두 궂은일에 속한다. 또한 [마당](/topic/마당)이 넓고 집의 규모도 큰 곳이 좋았다.

농기는 정월 초열흘날에 기고사를 지낼 집 마당에 미리 세워 놓는다. 이 때문에 농기를 모신 집에서는 더욱 몸단속을 하기 마련이었다. 일단 농기를 세우게 되면 집주인도 외출을 자제하고 외부 사람들도 안으로 절대 들이지 않는 것이 예사였다.

제사에 관한 음식은 기고사를 지내게 된 집에서 모두 준비하였고, 그에 관한 비용은 물론 동계의 자금에서 충당되었다. [제관](/topic/제관)은 총 세 명을 선정하되 주로 고사 집 주인과 동네 어른, 이장이 맡아 오는 것이 관례였다. 제관들 모두 선출된 뒤에는 부정을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야 했다.

근간에는 따로 기고사를 지낼 집을 정하지 않고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지낸다. 정월 열나흗날 아침에 농기와 영기를 마을회관 앞마당에 세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자정 이전에 모든 고사 절차를 마치는 것으로 간소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사의 제물은 비교적 간단하다. 고사상 위에 올리는 것은 돼지머리, 백설기 시루, 시루에 꽂을 [북어](/topic/북어) 두 마리, 밤, 귤, 배, [사과](/topic/사과), 초, 잔 등이다.

3. 기고사의 연행 : 날이 어두워지면 미리 세워 둔 농기 앞에 [병풍](/topic/병풍)을 치고 [고사반](/topic/고사반)을 준비한다. 제물을 진설하여 준비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기고사가 연행된다.

먼저 풍장패가 풍장을 울리며 [제상](/topic/제상) 주변을 도는 동안 [초헌](/topic/초헌)관이 [분향](/topic/분향)(焚香)하고 재배를 한다. 강신례(降神禮)로 빈 잔에 집사가 술을 채워 주면 초헌관은 이를 퇴주잔에 물리고 빈 잔을 상 위로 올린다. 강신 후 초헌관은 재배한다.

집사는 초헌관이 다시 내려 들고 있는 잔에 술을 따르고 초헌관은 제상 위에 올려 [헌작](/topic/헌작)(獻爵)을 한다. 헌작 후 [독축](/topic/독축)(讀祝)을 한다. 이때 초헌관은 자리를 물리지 않고 부복(俯伏)한 상태이며, 참가한 마을 사람들은 [국궁](/topic/국궁)(鞠躬)을 한 상태이다.

維歲次 甲申正月更子 朔 十四一 開祝
金川二區 洞民一同 敢昭告于
農旗之神 欽維我 農旗之神 自古司穀司命
惠及黎民居此洞民
伏蒙 重恩 歲歲安過 伏感無量 伏維
農旗之神 當今 特加 惠監特賜 保佑
使我洞民 時和年豊 五穀豊登 家給人足
福利增進 災殃消滅 壽福綿綿 大洞一室
親睦和合 英材輩出 福祉具現 一里咸寧 安過太平
謹具酒果 恭伸奠獻 尙饗

독축이 끝나자 초헌관이 몸을 일으켜 미리 준비한 돈봉투를 돼지머리의 입에 꽂아 넣고 두 번 절한다. [아헌](/topic/아헌)관이 헌작을 하고 역시 돈봉투를 돼지머리의 입에 꽂아 넣으며 재배한다. [종헌](/topic/종헌)관 역시 헌작 후 돈봉투를 돼지머리 입에 꽂고 재배한다. 이때 풍장패는 각 [헌관](/topic/헌관)이 재배를 하고 일어날 때마다 풍장을 울리며 분위기를 돋운다.

종헌관의 헌작과 재배까지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이때 자리에 참여한 모든 마을 사람은 준비한 소지종이를 나누어 [가지](/topic/가지)고 [비손](/topic/비손)하며 각자 자신의 소지를 올린다. 소지 올리기를 끝낸 사람들은 [음복](/topic/음복)을 한다. 한쪽에서는 시루의 손잡이 부분에 꽂은 북어를 내려 [실타래](/topic/실타래)로 감은 뒤 농기의 깃대 상단에 묶는다. 이것으로 기고사는 끝나고 마을의 부녀자들은 [철상](/topic/철상)(撤床)을 시작한다.

기고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에서 고사상에 올린 음식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거나 풍장을 울리며 즐긴다. 마을회관 한쪽에서는 따로 음식을 마련하여 식사를 겸한 음복을 준비한다.
참고문헌현지조사(2004년 2월 3일~2월 6일) 자료
민속박물관 사람들의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현장조사6년 DVD (국립민속박물관, 2008)
집문당한국무속연구김태곤1981
집문당제주도무속연구현용준1986
한국정신문화연구원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1
열림원아름다움을 훔치다김수남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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