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임천리서낭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에서 지내는 [마을](/topic/마을)제사. 임천리는 관내 3개 반이 있다. 반별로 제향하지 않고 리 단위로 모여 제향한다. 주민은 9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임천리는1945년 이후 북한 치하에 있었으며 당시에 인근 마을에서는 미신 타파를 이유로 마을마다 마을 제의가 사라졌으나 임천리는 밤에 몰래 제향하면서 그 전통을 유지해 왔다. 임천리에는 산신제와 서낭제 두 개의 마을 제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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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에서 지내는 [마을](/topic/마을)제사. 임천리는 관내 3개 반이 있다. 반별로 제향하지 않고 리 단위로 모여 제향한다. 주민은 9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임천리는1945년 이후 북한 치하에 있었으며 당시에 인근 마을에서는 미신 타파를 이유로 마을마다 마을 제의가 사라졌으나 임천리는 밤에 몰래 제향하면서 그 전통을 유지해 왔다. 임천리에는 산신제와 서낭제 두 개의 마을 제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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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길
정의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에서 지내는 [마을](/topic/마을)제사. 임천리는 관내 3개 반이 있다. 반별로 제향하지 않고 리 단위로 모여 제향한다. 주민은 9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임천리는1945년 이후 북한 치하에 있었으며 당시에 인근 마을에서는 미신 타파를 이유로 마을마다 마을 제의가 사라졌으나 임천리는 밤에 몰래 제향하면서 그 전통을 유지해 왔다. 임천리에는 산신제와 서낭제 두 개의 마을 제의가 있다.
정의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에서 지내는 [마을](/topic/마을)제사. 임천리는 관내 3개 반이 있다. 반별로 제향하지 않고 리 단위로 모여 제향한다. 주민은 9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임천리는1945년 이후 북한 치하에 있었으며 당시에 인근 마을에서는 미신 타파를 이유로 마을마다 마을 제의가 사라졌으나 임천리는 밤에 몰래 제향하면서 그 전통을 유지해 왔다. 임천리에는 산신제와 서낭제 두 개의 마을 제의가 있다.
내용1. 제의 일시 : 예전에는 날을 받아 제향하였으나 6ㆍ25전쟁 이후로는 정월 초정일(初丁日)로 고정하였다. 그러나 정초에 출산, 상고 등 부정이 발생하면 제일(祭日)은 2월, 3월로 연기되곤 하였다. 2005년에 정월 초사흗날로 고정하였다. 예전에는 새벽 3~5시쯤에 석성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낸 다음 [마을](/topic/마을)로 내려와 조용히 있다가 오후 해가 질 무렵에 산신당 아래에 있는 [서낭당](/topic/서낭당)으로 가 서낭제를 지냈다. 2005년 1월부터 마을회관에서 제향하기 시작하였다.

2. 당집과 당목 : 예전의 산신당은 석성산 뒤편에 있어서 마을과는 거리가 멀어 많이 힘들었다. 1950년대 초에 석성산 자락이지만 남대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산신당을 옮기고 주위에는 [돌담](/topic/돌담)을 둘렀다. 1957년쯤에 본래 산신제를 지낸 곳에 황일선 여사가 산신각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이 산신각은 2005년에 있은 양양을 휩쓴 대형 산불에도 불에타지 않고 남아있어서 그 영험이 입증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산신각은 이제 마을과 관련이 없는 곳이다.
예전의 서낭당은 마을 어귀에 있던 서낭목(느티나무)이었다. 이 서낭목이 고사하였지만 마을에서는 여전히 서낭으로 모시고 제향하였다. 1978년쯤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서낭목이 있던 자리에 주택이 들어섰다. 원래 서낭이 있던 곳은 마을땅이었지만 등기를해 놓지 않아 군 소유가 되었고, 군에서는 사업자에게 이 땅을 매각하여 주택을 지었다. 서낭을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자 서낭을 주택 앞의 마을 공터로 옮겼다. 그러나 1991년에 이곳마저도 주택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다시 지금의 자리(산신당보다는 조금 아래에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3. 신위 : 산신제는 석성산 산신, 서낭제는 성황지신ㆍ토지지신ㆍ여역지신을 각각 제향한다. 본래 [축문](/topic/축문)에는 성황신([서낭신](/topic/서낭신))에만 제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요즘은 3위지신에 제향한다. 이로 미루어 전승 과정에서 새로운 신격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4. 축문과 홀기 : 마을에 전하는 축문과 홀기가 있다. 이 축문과 홀기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축문은 석성산 산신제 축문이라고 명명하였다. 양양군에서 홀기가 있는 마을은 감곡리, 조산리, 임천리의 세 곳뿐이며 이것은 근처에 양양향교가 있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홀기는 인구 감소로 [제관](/topic/제관) 선정이 용이하지 않던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5. 제관 : 제관은 제일을 남기고 일주일을 전후하여 마을회의를 열어 선정한다. 예전엔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제관을 선정하였다. 인구가 감소하여 제관을 모두 갖추기가 어려워져서 1980~1990년대부터는 생기복덕을 보지 않는다. 제관은 [헌관](/topic/헌관) 세 명, 축관 한 명, 집사 한명으로 모두 다섯 명이다. [초헌](/topic/초헌)은 주로 고령자가 맡고, 그 외 [아헌](/topic/아헌)과 [종헌](/topic/종헌) 등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다. 예전엔 음식을 마련하는 등 제사의 모든 일을 담당하는 집사가 두 명 있었다. 마을에서 특별히 장만해 놓은 [제복](/topic/제복)은 없다.

6. 제물 : 산신제의 제물은 서낭제와 별도로 차렸으나 대체로 간소화하였다. 산신제의 제물은 명태, [삼실과](/topic/삼실과)(곶감, [대추](/topic/대추), 밤), 감주(술 대용), 메, 생고기(주로 돼지고기) 등이다. 산신제도 3신위이므로 [제상](/topic/제상)을 세 개 차린다. 서낭제의 주요 희생물은 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돼지를 희생물로 사용했다는 것으로 보아 희생물의 변화는 오래전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더구나 지금은 돼지고기 생육을 사용하며 신위당 한 근씩 모두 세 근을 사용한다. 신위가 3신위이므로 메는 세 그릇이며 수저도 세 벌이다. 어물인 명태도 세 마리를 장만한다.
예전에 산신당을 옮기기 전에는 산신당 근처에 [우물](/topic/우물)이 있어 이 우물을 이용하여 메뿐만 아니라 온갖 제물을 장만하곤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낭답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돌려가며 부치고 여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서낭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토지문서가 6ㆍ25전쟁 이후에 사라져서 서낭답을 찾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도의 서낭계는 없다.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는 예전부터 마을에서 장만해 놓은 것이 있었으나 6ㆍ25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분실하여 마을에서 새로 장만한 것이다.

7. 제의 절차 : 예전에는 제삿날을 받으면 동네의 깨끗한 집을 빌려 주인은 다른 집에 있게 하고 그 집에서 제관들과 집사 두 명(음식 담당)이 제물을 장만하였다. 집사들은제사가 끝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렀다. 이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송침을 하였다. 송침은 소나무 [가지](/topic/가지)를 꺾어 문가에 거꾸로 세워 놓는 것으로, 금줄과 같은 기능을 한다. 2005년부터는 마을회관에서 제수를 장만하기 때문에 마을회관에만 송침을 한다. 제의 진행에서 예전엔 홀기를 따랐지만 요즘은 홀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을 제의는 유교식이어서소지를 올리지 않고 제당에 [실타래](/topic/실타래)나 종이도 매달지 않는다.
산신제를 먼저 제향한 다음 서낭제를 제향하였다. 오전에 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낸 뒤 마을로 돌아왔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제수를 장만하여 서낭제를 지냈다. 2005년부터는 산신제와 서낭제를 마을회관에서 지내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마을회관 내에 제상을 진설할 때 왼쪽부터 성황지신ㆍ토지지신ㆍ여역지신의 순서로 [위패](/topic/위패)를 진열하고, 성황ㆍ토지ㆍ여역의 순으로 각 헌관이 [헌작](/topic/헌작)을 하였다. 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낼 때 위패(또는 지방)는 달리 없었다. 그러나 서낭제를 지낼 때에는 [한지](/topic/한지)에 3신위의 지방을 써 붙여놓고 제향하였다. 마을 제사가 끝나면 징을 쳤다. 징 소리가 나면 주민들은 제사가 끝난 것을 알고 마을회관에 모여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개인별로 올리던 터고사도 마을 제사가 끝나야 올릴 수 있었다. 1963년쯤까지는 징을 치던 풍속이 전승되었으나 이후 1995년쯤까지는 제대로 전승되지 않다가 1995년쯤부터는 이마저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내용1. 제의 일시 : 예전에는 날을 받아 제향하였으나 6ㆍ25전쟁 이후로는 정월 초정일(初丁日)로 고정하였다. 그러나 정초에 출산, 상고 등 부정이 발생하면 제일(祭日)은 2월, 3월로 연기되곤 하였다. 2005년에 정월 초사흗날로 고정하였다. 예전에는 새벽 3~5시쯤에 석성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낸 다음 [마을](/topic/마을)로 내려와 조용히 있다가 오후 해가 질 무렵에 산신당 아래에 있는 [서낭당](/topic/서낭당)으로 가 서낭제를 지냈다. 2005년 1월부터 마을회관에서 제향하기 시작하였다.

2. 당집과 당목 : 예전의 산신당은 석성산 뒤편에 있어서 마을과는 거리가 멀어 많이 힘들었다. 1950년대 초에 석성산 자락이지만 남대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산신당을 옮기고 주위에는 [돌담](/topic/돌담)을 둘렀다. 1957년쯤에 본래 산신제를 지낸 곳에 황일선 여사가 산신각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이 산신각은 2005년에 있은 양양을 휩쓴 대형 산불에도 불에타지 않고 남아있어서 그 영험이 입증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산신각은 이제 마을과 관련이 없는 곳이다.
예전의 서낭당은 마을 어귀에 있던 서낭목(느티나무)이었다. 이 서낭목이 고사하였지만 마을에서는 여전히 서낭으로 모시고 제향하였다. 1978년쯤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서낭목이 있던 자리에 주택이 들어섰다. 원래 서낭이 있던 곳은 마을땅이었지만 등기를해 놓지 않아 군 소유가 되었고, 군에서는 사업자에게 이 땅을 매각하여 주택을 지었다. 서낭을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자 서낭을 주택 앞의 마을 공터로 옮겼다. 그러나 1991년에 이곳마저도 주택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다시 지금의 자리(산신당보다는 조금 아래에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3. 신위 : 산신제는 석성산 산신, 서낭제는 성황지신ㆍ토지지신ㆍ여역지신을 각각 제향한다. 본래 [축문](/topic/축문)에는 성황신([서낭신](/topic/서낭신))에만 제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요즘은 3위지신에 제향한다. 이로 미루어 전승 과정에서 새로운 신격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4. 축문과 홀기 : 마을에 전하는 축문과 홀기가 있다. 이 축문과 홀기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축문은 석성산 산신제 축문이라고 명명하였다. 양양군에서 홀기가 있는 마을은 감곡리, 조산리, 임천리의 세 곳뿐이며 이것은 근처에 양양향교가 있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홀기는 인구 감소로 [제관](/topic/제관) 선정이 용이하지 않던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5. 제관 : 제관은 제일을 남기고 일주일을 전후하여 마을회의를 열어 선정한다. 예전엔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보아 제관을 선정하였다. 인구가 감소하여 제관을 모두 갖추기가 어려워져서 1980~1990년대부터는 생기복덕을 보지 않는다. 제관은 [헌관](/topic/헌관) 세 명, 축관 한 명, 집사 한명으로 모두 다섯 명이다. [초헌](/topic/초헌)은 주로 고령자가 맡고, 그 외 [아헌](/topic/아헌)과 [종헌](/topic/종헌) 등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다. 예전엔 음식을 마련하는 등 제사의 모든 일을 담당하는 집사가 두 명 있었다. 마을에서 특별히 장만해 놓은 [제복](/topic/제복)은 없다.

6. 제물 : 산신제의 제물은 서낭제와 별도로 차렸으나 대체로 간소화하였다. 산신제의 제물은 명태, [삼실과](/topic/삼실과)(곶감, [대추](/topic/대추), 밤), 감주(술 대용), 메, 생고기(주로 돼지고기) 등이다. 산신제도 3신위이므로 [제상](/topic/제상)을 세 개 차린다. 서낭제의 주요 희생물은 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돼지를 희생물로 사용했다는 것으로 보아 희생물의 변화는 오래전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더구나 지금은 돼지고기 생육을 사용하며 신위당 한 근씩 모두 세 근을 사용한다. 신위가 3신위이므로 메는 세 그릇이며 수저도 세 벌이다. 어물인 명태도 세 마리를 장만한다.
예전에 산신당을 옮기기 전에는 산신당 근처에 [우물](/topic/우물)이 있어 이 우물을 이용하여 메뿐만 아니라 온갖 제물을 장만하곤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낭답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돌려가며 부치고 여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서낭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토지문서가 6ㆍ25전쟁 이후에 사라져서 서낭답을 찾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도의 서낭계는 없다.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는 예전부터 마을에서 장만해 놓은 것이 있었으나 6ㆍ25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분실하여 마을에서 새로 장만한 것이다.

7. 제의 절차 : 예전에는 제삿날을 받으면 동네의 깨끗한 집을 빌려 주인은 다른 집에 있게 하고 그 집에서 제관들과 집사 두 명(음식 담당)이 제물을 장만하였다. 집사들은제사가 끝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렀다. 이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송침을 하였다. 송침은 소나무 [가지](/topic/가지)를 꺾어 문가에 거꾸로 세워 놓는 것으로, 금줄과 같은 기능을 한다. 2005년부터는 마을회관에서 제수를 장만하기 때문에 마을회관에만 송침을 한다. 제의 진행에서 예전엔 홀기를 따랐지만 요즘은 홀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을 제의는 유교식이어서소지를 올리지 않고 제당에 [실타래](/topic/실타래)나 종이도 매달지 않는다.
산신제를 먼저 제향한 다음 서낭제를 제향하였다. 오전에 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낸 뒤 마을로 돌아왔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제수를 장만하여 서낭제를 지냈다. 2005년부터는 산신제와 서낭제를 마을회관에서 지내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마을회관 내에 제상을 진설할 때 왼쪽부터 성황지신ㆍ토지지신ㆍ여역지신의 순서로 [위패](/topic/위패)를 진열하고, 성황ㆍ토지ㆍ여역의 순으로 각 헌관이 [헌작](/topic/헌작)을 하였다. 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낼 때 위패(또는 지방)는 달리 없었다. 그러나 서낭제를 지낼 때에는 [한지](/topic/한지)에 3신위의 지방을 써 붙여놓고 제향하였다. 마을 제사가 끝나면 징을 쳤다. 징 소리가 나면 주민들은 제사가 끝난 것을 알고 마을회관에 모여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개인별로 올리던 터고사도 마을 제사가 끝나야 올릴 수 있었다. 1963년쯤까지는 징을 치던 풍속이 전승되었으나 이후 1995년쯤까지는 제대로 전승되지 않다가 1995년쯤부터는 이마저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지역사례산신제를 제향하고 나서 서낭제를 제향하는 [마을](/topic/마을)은 양양군 관내에도 어성전리, 죽정자리 등 몇 곳이 있다.
참고문헌양양군[마을](/topic/마을)제당조사 (장정룡, 양양문화원, 2002)
한국의마을신앙 CD (국립민속박물관, 2007)
지역사례산신제를 제향하고 나서 서낭제를 제향하는 [마을](/topic/마을)은 양양군 관내에도 어성전리, 죽정자리 등 몇 곳이 있다.
참고문헌양양군[마을](/topic/마을)제당조사 (장정룡, 양양문화원, 2002)
한국의마을신앙 CD (국립민속박물관, 2007)
비교민속학회서울굿의 동쪽제와 서쪽제 비교고영희2005
민속원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서울시,경기도,강원도편국립문화재연구소2005
성동문화원성동구의 민간신앙최래옥 외2005
한국무속학회서울굿의 다양성과 구조김헌선2006
민속원서울지역 당신화 연구-행당동 아기씨당을 중심으로고영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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