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서울 강서구 가양1동 읍내[마을](/topic/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동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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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오문선 |
정의 | 서울 강서구 가양1동 읍내[마을](/topic/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동제. | 정의 | 서울 강서구 가양1동 읍내[마을](/topic/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동제. | 참조 | [치성비요](/topic/치성비요) | 참고문헌 | 성황사의 민간화와 향촌사 회의 변동 (정승모, 태동고전연구 7, 태동고전연구소, 1991) 한국의 [마을](/topic/마을)제당-서울·경기도 (국립민속박물관, 1995) 한국공동 체신앙의 역사적 연구-동제의 형성 및 전승과 관련하여 (박호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강서구 가양동성황제 관련자료 『[치성비요](/topic/치성비요)』 (오문선, 도시역사문화 3,, 서울역사박물관, 2005) 고을수령의 국가제사 (마을제사가 되다, 서울역사박물관, 2005, 기록영화) | 참조 | [치성비요](/topic/치성비요) | 참고문헌 | 성황사의 민간화와 향촌사 회의 변동 (정승모, 태동고전연구 7, 태동고전연구소, 1991) 한국의 [마을](/topic/마을)제당-서울·경기도 (국립민속박물관, 1995) 한국공동 체신앙의 역사적 연구-동제의 형성 및 전승과 관련하여 (박호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강서구 가양동성황제 관련자료 『[치성비요](/topic/치성비요)』 (오문선, 도시역사문화 3,, 서울역사박물관, 2005) 고을수령의 국가제사 (마을제사가 되다, 서울역사박물관, 2005, 기록영화) | 내용 | 가양동성황당은 강서구 가양1동 궁산체육공원 정상 부근에 자리한다. 이곳에는 양천고성(陽川古城)으로 알려진 성의 유구(遺構)가 남아 있으며, 궁산의 바로 아래쪽은 읍내[마을](/topic/마을)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양천현(陽川縣)의 중심지인 양천현의 현아가 있던 곳이다. 성황당이 자리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서울의 외사산(外四山)인 덕양산과 더불어 한강을사이에 두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과 미국군이 주둔하기도 한 곳으로, 강서구 일대를 조망하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기도 하였다. 현재 성황당은 1990년쯤에 개축된 것을 2005년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2005년의 개축은 가양동의 양천역사보존회와 가양동 노인정 등을 중심으로 읍치성황제인 과거의 지위에걸맞은 제당을 마련하고자 마을기금으로 성황당의 벽체와 [지붕](/topic/지붕) 등을 상당 부분 보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의 내부에는 약 1m 높이의 단이 설치되어 있고,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쓰인 [위패](/topic/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한 성황신의 제물로 올린 [치마](/topic/치마)저고리 1벌이 [봉안](/topic/봉안)되어 있다. 2005년에 개축되기 이전의 성황당은 1990년쯤에 마련된 것이다. 한 칸 규모이며, 벽돌과 [기와](/topic/기와)로 건축된 제당이다. 그 이전의 성황당 모습은 1968년 문화공보부에서 실시한 설문자료에 첨부되어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한 칸 규모의 기와 형식이었다. 한편 ‘우듬물’, ‘우두물’, ‘우둔물’ 등으로 불리는 가양동성황제의 당[우물](/topic/우물)은 가양동 향교 옆 주택의 뒤쪽으로 약 10m 지점에 자리한다. 시멘트로 물이 고이는 시설을 만들어 한동안 주민들의 약수터로 활용되어 왔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수질이 떨어져 지금은 식수로 사용하지 않는다. 제물도 노인정에 딸린 [주방](/topic/주방)에서 마련하기 때문에 당우물로서의 역할은 완전히 사라졌다. 강서구 가양동성황제의 의례는 가양동성황제 의례의 유래와 절차, 내용 등을 기술한 필사본인『 [치성비요](/topic/치성비요)(致誠備要)』에 의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치성비요』에 따르면 이것이 기술될 당시의 제의 방식인 유교식 제의 이전에 “무녀를 써서 빌었다”고 한 내용을 보아 성황제가 무당에 의한 마을굿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례 형식의 변화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마을굿이 유교식 제사 형태로 바뀌어 지내지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한편 현재 유교식으로 지내고 있는 성황제는 제비의 추렴 등 제사 여건이 달라지면 비정기적으로 마을굿 형식을 갖출 가능성도 있다. 이미 1997년의 경우에도 마을굿 형식으로 제사를 지낸 사례가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지역의 풍물패를 동원하여 가양동 일대를 돌며 성황제를 알리는 [길놀이](/topic/길놀이)를 하거나 성황당 아래 소악루 근처에서 길놀이를 여는등 새로운 볼거리를 가미하기도 했다. 현재 가양동성황제의 [제관](/topic/제관)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양천역사보존회와 노인정의 회원, 가양1동의 동장, 지역유지 등이 맡는다. 가양동의 성황제는 산신제와 성황제가 차례로 이어지는 이중적 의례 구조를 하고 있다. 본래 산신제는 성황제를 지내기 하루 전날의 자시에 미리 지내고, 그 이튿날인 음력 시월 초하룻날 자시에 성황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난 뒤부터 산신제와 성황제를 모두 낮에 지내고 있다. 가양동성황제의 절차는 먼저 산신제를 지낸 뒤 성황제가 이어진다. 산신제는 성황당의 오른쪽에 별도의 [제상](/topic/제상)을 차려 먼저 지내며, 성황제는 성황당 안에서 행한다. 제물은 성황제와 산신제 모두 동일하다. 제사의 순서도 [참신](/topic/참신)(參神)-[분향](/topic/분향)(焚香)-[초헌](/topic/초헌)(初獻)-[독축](/topic/독축)(讀祝)-[아헌](/topic/아헌)(亞獻)-[종헌](/topic/종헌)(終獻)-소지(炤紙)-[음복](/topic/음복)(飮福) 순으로 동일하게 진행된다. 한편 소지를 올리기 전에 희망자에 한해 [헌작](/topic/헌작)(獻爵)을 할 수 있게 한다. 소지를 올린 뒤 제사가 끝나면 당 안에 제물로 올린 치마저고리와 남은 제물을 태워 묻는다. 당에 가져온 제물은 마을로 가져[가지](/topic/가지) 않기 때문이다. 가양동의 성황제가 끝난 뒤에는 마곡동 후포마을에 제사가 끝났음을 알린다. 성황당의 도당할머니와 내외 관계로 인식되고 있는 마곡동 후포마을의 신격에게 도당제를 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마곡동 후포마을도당제 또한 마을굿 형식을 띤 마을제사였지만 유교식 제사 형식으로 바뀌었다. | 내용 | 가양동성황당은 강서구 가양1동 궁산체육공원 정상 부근에 자리한다. 이곳에는 양천고성(陽川古城)으로 알려진 성의 유구(遺構)가 남아 있으며, 궁산의 바로 아래쪽은 읍내[마을](/topic/마을)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양천현(陽川縣)의 중심지인 양천현의 현아가 있던 곳이다. 성황당이 자리한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서울의 외사산(外四山)인 덕양산과 더불어 한강을사이에 두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과 미국군이 주둔하기도 한 곳으로, 강서구 일대를 조망하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기도 하였다. 현재 성황당은 1990년쯤에 개축된 것을 2005년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2005년의 개축은 가양동의 양천역사보존회와 가양동 노인정 등을 중심으로 읍치성황제인 과거의 지위에걸맞은 제당을 마련하고자 마을기금으로 성황당의 벽체와 [지붕](/topic/지붕) 등을 상당 부분 보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의 내부에는 약 1m 높이의 단이 설치되어 있고,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라고 쓰인 [위패](/topic/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한 성황신의 제물로 올린 [치마](/topic/치마)저고리 1벌이 [봉안](/topic/봉안)되어 있다. 2005년에 개축되기 이전의 성황당은 1990년쯤에 마련된 것이다. 한 칸 규모이며, 벽돌과 [기와](/topic/기와)로 건축된 제당이다. 그 이전의 성황당 모습은 1968년 문화공보부에서 실시한 설문자료에 첨부되어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한 칸 규모의 기와 형식이었다. 한편 ‘우듬물’, ‘우두물’, ‘우둔물’ 등으로 불리는 가양동성황제의 당[우물](/topic/우물)은 가양동 향교 옆 주택의 뒤쪽으로 약 10m 지점에 자리한다. 시멘트로 물이 고이는 시설을 만들어 한동안 주민들의 약수터로 활용되어 왔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수질이 떨어져 지금은 식수로 사용하지 않는다. 제물도 노인정에 딸린 [주방](/topic/주방)에서 마련하기 때문에 당우물로서의 역할은 완전히 사라졌다. 강서구 가양동성황제의 의례는 가양동성황제 의례의 유래와 절차, 내용 등을 기술한 필사본인『 [치성비요](/topic/치성비요)(致誠備要)』에 의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치성비요』에 따르면 이것이 기술될 당시의 제의 방식인 유교식 제의 이전에 “무녀를 써서 빌었다”고 한 내용을 보아 성황제가 무당에 의한 마을굿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례 형식의 변화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마을굿이 유교식 제사 형태로 바뀌어 지내지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한편 현재 유교식으로 지내고 있는 성황제는 제비의 추렴 등 제사 여건이 달라지면 비정기적으로 마을굿 형식을 갖출 가능성도 있다. 이미 1997년의 경우에도 마을굿 형식으로 제사를 지낸 사례가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지역의 풍물패를 동원하여 가양동 일대를 돌며 성황제를 알리는 [길놀이](/topic/길놀이)를 하거나 성황당 아래 소악루 근처에서 길놀이를 여는등 새로운 볼거리를 가미하기도 했다. 현재 가양동성황제의 [제관](/topic/제관)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양천역사보존회와 노인정의 회원, 가양1동의 동장, 지역유지 등이 맡는다. 가양동의 성황제는 산신제와 성황제가 차례로 이어지는 이중적 의례 구조를 하고 있다. 본래 산신제는 성황제를 지내기 하루 전날의 자시에 미리 지내고, 그 이튿날인 음력 시월 초하룻날 자시에 성황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난 뒤부터 산신제와 성황제를 모두 낮에 지내고 있다. 가양동성황제의 절차는 먼저 산신제를 지낸 뒤 성황제가 이어진다. 산신제는 성황당의 오른쪽에 별도의 [제상](/topic/제상)을 차려 먼저 지내며, 성황제는 성황당 안에서 행한다. 제물은 성황제와 산신제 모두 동일하다. 제사의 순서도 [참신](/topic/참신)(參神)-[분향](/topic/분향)(焚香)-[초헌](/topic/초헌)(初獻)-[독축](/topic/독축)(讀祝)-[아헌](/topic/아헌)(亞獻)-[종헌](/topic/종헌)(終獻)-소지(炤紙)-[음복](/topic/음복)(飮福) 순으로 동일하게 진행된다. 한편 소지를 올리기 전에 희망자에 한해 [헌작](/topic/헌작)(獻爵)을 할 수 있게 한다. 소지를 올린 뒤 제사가 끝나면 당 안에 제물로 올린 치마저고리와 남은 제물을 태워 묻는다. 당에 가져온 제물은 마을로 가져[가지](/topic/가지) 않기 때문이다. 가양동의 성황제가 끝난 뒤에는 마곡동 후포마을에 제사가 끝났음을 알린다. 성황당의 도당할머니와 내외 관계로 인식되고 있는 마곡동 후포마을의 신격에게 도당제를 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마곡동 후포마을도당제 또한 마을굿 형식을 띤 마을제사였지만 유교식 제사 형식으로 바뀌었다. | 역사 | 가양동성황제의 제사 공간인 성황당이 있는 강서구 가양1동은 조선시대 양천현아(陽川縣衙)가 있던 곳이었다. 가양동성황제가 민간 차원에서 시작되었는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출발하였는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성황사재성남산(城隍祠在城南山)”이라는 기록과 대부분의 읍치성황사(邑治城隍祠)가 읍성 내부에 위치하는 특성에 비추어 가양동성황제가 조선시대 때 일정기간 국행제의 대상으로 존재하다가 민간화 과정을 밟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황제가 전승되는 강서구 가양동에는 가마동, 고양리([괭이](/topic/괭이)말), 향교동(읍내리), 하마피(하마비), 성줏물(성재정), 탑산(공암리), 후포리(뒷개), 마곡리(원마곡, 마개)라는 여덟 개의 자연[마을](/topic/마을)이 있었다. 이 가운데 향교동(읍내리)에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양천현아가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김포군 양동면사무소, 양천향교, 향천초등학교, 우체국, 금융조합 등 기관이 있었다. 고양리, 성줏물, 하마피, 후포리, 탑산, 향교동, 마곡리 등 자연마을은 도시화되면서 마을 간 경계가 희미해지고 가양동과 마곡동이란 행정구역에 포함되었다. 강서구 가양동 읍내마을의 성황제는 제의 명칭이 성황제로 표현되고 있으나 당에 모셔진 신격(神格)은 도당할머니로 표현되는 여성신령이다. 이 신격은 이웃 마곡동 후포마을도당제의 제사 대상인 도당할아버지와 부부관계로 알려져 있다. 이 두 마을 제사는 제의 실행에서 일종의 위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위계는 강서구 가양동의 성황제를 지낸 뒤에야 마곡동 후포마을의 도당제를 지내는 것으로 표출된다.마곡동 후포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탑산마을의 동제도 가양동 읍내마을의 성황제가 끝나야만 지낼 수 있었다. 이는 읍치성황제인 가양동 읍내마을 성황제가 다른 마을들의 제사에 비해 종교적 우위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 역사 | 가양동성황제의 제사 공간인 성황당이 있는 강서구 가양1동은 조선시대 양천현아(陽川縣衙)가 있던 곳이었다. 가양동성황제가 민간 차원에서 시작되었는지 국가 차원의 제사로 출발하였는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성황사재성남산(城隍祠在城南山)”이라는 기록과 대부분의 읍치성황사(邑治城隍祠)가 읍성 내부에 위치하는 특성에 비추어 가양동성황제가 조선시대 때 일정기간 국행제의 대상으로 존재하다가 민간화 과정을 밟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황제가 전승되는 강서구 가양동에는 가마동, 고양리([괭이](/topic/괭이)말), 향교동(읍내리), 하마피(하마비), 성줏물(성재정), 탑산(공암리), 후포리(뒷개), 마곡리(원마곡, 마개)라는 여덟 개의 자연[마을](/topic/마을)이 있었다. 이 가운데 향교동(읍내리)에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양천현아가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김포군 양동면사무소, 양천향교, 향천초등학교, 우체국, 금융조합 등 기관이 있었다. 고양리, 성줏물, 하마피, 후포리, 탑산, 향교동, 마곡리 등 자연마을은 도시화되면서 마을 간 경계가 희미해지고 가양동과 마곡동이란 행정구역에 포함되었다. 강서구 가양동 읍내마을의 성황제는 제의 명칭이 성황제로 표현되고 있으나 당에 모셔진 신격(神格)은 도당할머니로 표현되는 여성신령이다. 이 신격은 이웃 마곡동 후포마을도당제의 제사 대상인 도당할아버지와 부부관계로 알려져 있다. 이 두 마을 제사는 제의 실행에서 일종의 위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위계는 강서구 가양동의 성황제를 지낸 뒤에야 마곡동 후포마을의 도당제를 지내는 것으로 표출된다.마곡동 후포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탑산마을의 동제도 가양동 읍내마을의 성황제가 끝나야만 지낼 수 있었다. 이는 읍치성황제인 가양동 읍내마을 성황제가 다른 마을들의 제사에 비해 종교적 우위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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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문화사 | 제주도무속자료사전 | 현용준 | 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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