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충남 서산시 부춘산(富春山) 최고봉인 [옥녀봉](/topic/옥녀봉)에 얽힌 지역 수호신 옥녀로 인해 계승되는 산신제. |
---|---|
mp3Cnt | 0 |
wkorname | 상기숙 |
정의 | 충남 서산시 부춘산(富春山) 최고봉인 [옥녀봉](/topic/옥녀봉)에 얽힌 지역 수호신 옥녀로 인해 계승되는 산신제. | 유래 및 역사 | 부춘산의 최고봉인 [옥녀봉](/topic/옥녀봉)은 산세가 마치 왕(聖旺山)을 모시고 있는 시녀(옥녀봉)와 그 앞에 [장군](/topic/장군)([장군봉](/topic/장군봉))이 시립하고 있는 모습으로, [풍수](/topic/풍수)지리설에서는 옥녀가 [거문고](/topic/거문고)를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고 부른다. 『서산군지(瑞山郡誌)』 「산악(山岳)」에서 “부춘산은 [산맥이](/topic/산맥이) 성왕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뻗어 본 면 온석리(溫石里)를 경유하여 동문리(東門里)에 이르러 부흥산(富興山)이 된다. 산 아래에는 공자묘가 있고 여기서 세 지맥으로 나뉜다. 한 지맥은 서남쪽을 향하여 비스듬히 뻗어나가 동문리 읍내리(邑內里)에서 솟아 오른 부춘산[北主山] 옥녀봉이 서산군 치소의 뒷산이다…… (중략) …… 이 산은 백사와 청송 사이에 기암절벽이 들쭉날쭉 솟아 천연의 공원을 형성하였고, 조망이 툭 트였다. 옛날에 풍수가가 이르기를 ‘이 산은 장지(葬地)로 괜찮은 곳이 있으니 옥녀탄금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또한 많이 이 산에 올랐다”고 하고 있다. 「고적(古蹟)」 [일화](/topic/일화)(逸話)조에서는 “현 군청 뒷산을 부춘산 북주산이라 하고 그 최고봉을 옥녀봉이라고 한다. 옥녀봉 아래에 음택 [길지](/topic/길지)가 있는데 군 뒷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장지를 꾸미지 못한다. 미신을 좋아하는 자들이 혹 밤에 와서 몰래 [매장](/topic/매장)하면 읍에 반드시 전염병이 돈다고 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이다. 1925년 봄에 읍인들이 많이 장질부사(腸窒扶斯, 장티푸스)에 감염되자 서로 도모하기를‘필시 북주산에 누군가 몰래 매장을 한 것이다’ 하고 가서 수색해 파내 버렸다”라고 나온다. 비록 매우 이치 없는 일이라고 부언했지만 이장(移葬)을 하자 비로소 괴질이 사라졌다. 이후 20개 읍·면에서 각기 옥녀의 목상을 만들어 당에 모셨다. 고물(古物)조에는 “불당과 목상은 군청 뒤 옥녀봉 위에 있다. [기와](/topic/기와) 수십 조각으로 작은 집을 만들고, 집안에 수십 개의 목상을 안치했다. 동문리와 읍내리 사람들이 매년 음력 정월 14일마다 제사를 베풀고 복을 빈다. 예전에 일본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박사가 참고하기 위한 물품으로 그중 한 개를 [가지](/topic/가지)고 가서 도쿄 이과대학에 두었다. 불당 아래 여단(癘壇)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옥녀제는 국태민안, 시화연풍, 안과태평, 소원성취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산신제이다. 옥녀는 선녀를 일컫는 말이며, 선녀는 인간 속세를 떠나 하늘에 산다. 옛날부터 옥녀 전설이 심어 주는 충효정신은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고, 주민들은 옥녀봉을 신성시하며 옥녀제를 계승해 왔다. 일제는 옥녀제를 항일의 [산실](/topic/산실)로 보고 산신당을 부수는 등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으며, 도리이 류조가 옥녀제에 쓰이는 목각을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주민들은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옥녀제를 몰래 지내면서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광복 후 당을 다시 짓고 제를 올려왔으나 갑작스러운 외래문화의 유입과 새[마을](/topic/마을)운동 등으로 미신 타파라 하여 이 제의는 송두리째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 제1회 서산문화제 전야제 때(10월 길일) 처음으로 옥녀제를 지냈다. 그러나 이것도 곧 궐사(闕祀, 제사를 지내지 않음)되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 서산 지역 관가에 불상사(불명예 퇴직, 횡사 등)가 잦아지자 1989년에 당시 윤영복 부춘동 동장과 김현구 서산문화원 원장이 주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옥녀제를 재현하였다. 1990년 2월 서산 지역의 유림 계통 인사들이 모여 모경회(慕敬會)를 조직하여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옥녀봉 산정 국기게양대 밑에 제단을 설치하고 40여 명의회원이 유가식으로 제향하게 되었다. 2000년 서산문화제가 없어지고 대신 해미읍성역사체험축제가 개최되었지만 2004년부터 축제의 전야제 행사에서 제외되기 시작한다. 현재는 매년 정기적으로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모경회 주관으로 제의를 지낸다. | 내용 및 특징 | 서산시 소재지의 북쪽에 위치한 뒷산 부춘산은 부춘동에 속한다. 1989년 [1월 1일](/topic/1월1일) 서산군이 서산시로 승격되면서 읍내동과 갈산동을 관할하는 행정동명은 부춘동이 되었다. 산이름은 주산(主山), 북산, 주산, 북주산, 부춘산으로 변천되어 왔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87m이고, 중심 봉우리가 있는 곳은 해발 142m이다. 서산시는 [배산임수](/topic/배산임수)(背山臨水)로 배치되었고, 동쪽에 해발 668m의 가야산맥이 서북쪽으로 길게 휘돌아 가다가 뭉쳐져 남향한 부춘산이 있는 곳에 서산 시[가지](/topic/가지)가 자리 잡는다. 부춘산은 풍부한 유적과 다양한 체육기구를 갖춘 이 지역의 명소로서 면적은 약 32㏊이고, 1991년 3월 26일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옥녀봉](/topic/옥녀봉)은 전국 각지 여러 곳에 있다. 서산과 태안 지역만 하여도 무려 10여 개나 된다. 그러나 부춘산 옥녀봉 전설은 우리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는 애틋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현재 모경회 회원 30여 명이 주축이 되어 매년 정월 열나흗날 오후 2시 30분쯤 옥녀제를 지낸다. 옥녀제 사흘 전에 제단 앞에 [황토](/topic/황토)를 3~6 무더기 놓아 부정한 자가 지나가지 않도록 경계하고,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제관](/topic/제관)은 다섯 명으로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가리지 않고 선정하고, 선정한 이후 특별한 금기사항은 없다. 원래 전통적인 [마을](/topic/마을)에서는 생기복덕을 따져 제관을 1~3명 선정하고, 이들은 금기를 따른다. 그러나 행정당국과 관련된 시·읍·면 단위 동신제는 직책으로 제관이 결정되며, 금기도 임의적인 성격을 띤다.[제복](/topic/제복)으로는 [유건](/topic/유건)을 쓰고 하늘색 [도포](/topic/도포)를 입지만 일상적인 복장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매년 제향을 통해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시 중심 제의로 [초헌](/topic/초헌)관에 시장, [아헌](/topic/아헌)관에 시의회 의장, [종헌](/topic/종헌)관에 모경회 회장, 축관에 모경회 회원 등이 선정된다.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 성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제수는 팥시루떡, 돼지머리, 과일, 곶감, 밤, [대추](/topic/대추), 북어포, 술, 향, 촛불 등이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제차는 강신-초헌-[독축](/topic/독축)-아헌-종헌-소지 순으로 진행된다. 제비는 서산시 지원금 200만 원 외에 모경회에서 분기별로 1만 원을 내는 회비에서 30만원을 보탠다. 제사 뒤에는 [음복](/topic/음복)만 할 뿐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행사를 치르지 않는다. 동신제는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최근 참가 인원이 행정 단위 대표들만 모이는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시 행정당국의 재정적 지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행정단위별 동신제가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나 반면 지역주민의 주도와 참여는 희박하다. 더욱이 모경회를 비롯하여 동신제 주관자가 거의 60대 이상 노인이다 보니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젊은이들의 참여가 시급한 실정이다. 옥녀는 나라를 지켜 주는 충(忠)의 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孝)의 신, 주민의 소망과 안녕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서산 지역 주민들의 민간신앙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옥녀봉 전설은 대략 세 가지로 집약된다. 1. 눈 속에서 고사리를 꺾는 소녀 : 옛날 옥녀봉 밑에 젊은 부부가 단란하게 살았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내려와 영롱한 구슬 한 개를 이들 부부에게 주었다. 그뒤 태어난 옥녀는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병들어 부녀의 정성에도 효험 없이 죽고 말았다. 옥녀의 슬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몇 년 뒤 새어머니를맞았다. 새어머니는 데려온 딸만 사랑하고 옥녀에게는 온갖 궂은일을 시키며 구박만 하였다. 어느 해 겨울 새어머니는 옥녀에게 고사리가 먹고 싶다며 당장 뜯어오라고 시켰다. 옥녀가 눈 덮인 부춘산에 올라 고사리를 찾아 헤매며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산골짜기에서 향기가 났다. 그곳에는 선녀들이 온갖 나비와 함께 춤추고 있으며, 갖가지 꽃이피어 있고,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리고 고사리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사리를 정신없이 꺾고 있는 옥녀에게 한 선녀가 다가와 한 줌의 고사리를 [바구니](/topic/바구니)에넣어 주자 바구니가 가득 찼다. 옥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새어머니는 딸과 함께 부춘산으로 올라가 욕심이 생겨 과일을 따려고 손을 뻗쳤다. 그때 뇌성과 함께 눈보라를 동반한 회오리바람이 모녀를 둘둘 휘감아 산 아래쪽으로 내동댕이쳐서 죽게 했다. 옥녀는 선녀를 따라 천상으로 인도되었다가 [옥황상제](/topic/옥황상제)로부터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부춘산에 내려와 주민의 재앙을 막아 주고 소원을 들어 주는 산신령이 되었다. 2. 광산에 흐른 피 : 조선시대 때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이 왜병들에게 재물을 약탈당하고 죽임을 당하던 시기였다. 옥녀봉에 노다지가 묻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어느 일본 사람이 땅속 깊이 파 들어갔으나 노다지는커녕 석탄 부스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때 다시 예쁜 처녀를 생매장하면 금맥을 찾을 수 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이 일본 사람은 가난한 집의 딸을 돈 몇푼 주고는 강제로 옥녀봉으로 끌고 올라갔다. 처녀를 묻으려고 일꾼들이 [괭이](/topic/괭이)로 땅을 파자 피가 나왔다. 모두들 산신령인 옥녀의 몸을 건드린 탓이라 여기고 넋을 잃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더니 뇌성이 울리며 산봉우리에서 준엄한 음성이 들려왔다. 부춘산의 신령인 옥녀는 일본 사람에게 일본의 조선 침략, 조선 광산 약탈,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생매장 등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산봉우리에 옥녀를 호위하던 한 천사가 칼로 일본 사람의 목을 쳐 죽였다. 이후 사람들은옥녀봉을 신성시하고, 옥녀가 지역 주민들에게 안녕과 평안을 가져오고 재난을 막아 주는 수호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3. 당을 지으시오 : 서산지역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평화로웠다. 그런데 어느 해 가뭄과 전염병이 만연하여 모든 사람의 생기를 빼앗아 갔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기진맥진해졌다. 이 즈음 옥녀봉 아래에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노인의 꿈에 옥녀가 나타나 옥녀봉에 당을 지으시오. 그럼 흉년도 질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라고 계시했다. 이튿날 노인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을 짓기로 하였다. 주민들은 당을 지어 제를 지내고 날을 잡아 큰 굿을 행하자 가뭄과 질병이 사라지고 풍년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옥녀봉의 당제는 해마다 이어져 갔다. 어느 해 다시 전염병이 돌고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주민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긴 철장을 만들어 옥녀봉 아래에서ㅋ터 정상까지 땅을 찔러 암장한 묘를 찾아 파내니 사망자가 생기지 않았다. 이후 20개 읍·면에서 각기 옥녀의 목각을 만들어 당에 모시고 제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이곳(특히 옥녀봉)에 묘를 쓰면 묘 임자는 부귀영화를 누려도 주민들에게는 재난과 질병이 온다고 구전된다. | 참고문헌 | 서산의 민속문화 (서산시지 편찬위원회, 서산시, 1988) 서산의 전설 (최주연, 서산문화원, 1995) 부춘산과 [옥녀봉](/topic/옥녀봉) (이은우, 서산의 문화 14, 서산향토연구회, 2002) 서산군지 상·하1926년 서산군지 번역판 (이매창, 서정석역, 서산문화원, 2005) 서산의 부춘산 옥녀봉 문화사산책 (이영하, 서산의 문화 17, 서산향토연구회, 2005) 서산의 지명사 (이은우, 서산시, 2005) | 정의 | 충남 서산시 부춘산(富春山) 최고봉인 [옥녀봉](/topic/옥녀봉)에 얽힌 지역 수호신 옥녀로 인해 계승되는 산신제. | 유래 및 역사 | 부춘산의 최고봉인 [옥녀봉](/topic/옥녀봉)은 산세가 마치 왕(聖旺山)을 모시고 있는 시녀(옥녀봉)와 그 앞에 [장군](/topic/장군)([장군봉](/topic/장군봉))이 시립하고 있는 모습으로, [풍수](/topic/풍수)지리설에서는 옥녀가 [거문고](/topic/거문고)를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고 부른다. 『서산군지(瑞山郡誌)』 「산악(山岳)」에서 “부춘산은 [산맥이](/topic/산맥이) 성왕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뻗어 본 면 온석리(溫石里)를 경유하여 동문리(東門里)에 이르러 부흥산(富興山)이 된다. 산 아래에는 공자묘가 있고 여기서 세 지맥으로 나뉜다. 한 지맥은 서남쪽을 향하여 비스듬히 뻗어나가 동문리 읍내리(邑內里)에서 솟아 오른 부춘산[北主山] 옥녀봉이 서산군 치소의 뒷산이다…… (중략) …… 이 산은 백사와 청송 사이에 기암절벽이 들쭉날쭉 솟아 천연의 공원을 형성하였고, 조망이 툭 트였다. 옛날에 풍수가가 이르기를 ‘이 산은 장지(葬地)로 괜찮은 곳이 있으니 옥녀탄금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또한 많이 이 산에 올랐다”고 하고 있다. 「고적(古蹟)」 [일화](/topic/일화)(逸話)조에서는 “현 군청 뒷산을 부춘산 북주산이라 하고 그 최고봉을 옥녀봉이라고 한다. 옥녀봉 아래에 음택 [길지](/topic/길지)가 있는데 군 뒷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장지를 꾸미지 못한다. 미신을 좋아하는 자들이 혹 밤에 와서 몰래 [매장](/topic/매장)하면 읍에 반드시 전염병이 돈다고 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이다. 1925년 봄에 읍인들이 많이 장질부사(腸窒扶斯, 장티푸스)에 감염되자 서로 도모하기를‘필시 북주산에 누군가 몰래 매장을 한 것이다’ 하고 가서 수색해 파내 버렸다”라고 나온다. 비록 매우 이치 없는 일이라고 부언했지만 이장(移葬)을 하자 비로소 괴질이 사라졌다. 이후 20개 읍·면에서 각기 옥녀의 목상을 만들어 당에 모셨다. 고물(古物)조에는 “불당과 목상은 군청 뒤 옥녀봉 위에 있다. [기와](/topic/기와) 수십 조각으로 작은 집을 만들고, 집안에 수십 개의 목상을 안치했다. 동문리와 읍내리 사람들이 매년 음력 정월 14일마다 제사를 베풀고 복을 빈다. 예전에 일본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박사가 참고하기 위한 물품으로 그중 한 개를 [가지](/topic/가지)고 가서 도쿄 이과대학에 두었다. 불당 아래 여단(癘壇)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옥녀제는 국태민안, 시화연풍, 안과태평, 소원성취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산신제이다. 옥녀는 선녀를 일컫는 말이며, 선녀는 인간 속세를 떠나 하늘에 산다. 옛날부터 옥녀 전설이 심어 주는 충효정신은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고, 주민들은 옥녀봉을 신성시하며 옥녀제를 계승해 왔다. 일제는 옥녀제를 항일의 [산실](/topic/산실)로 보고 산신당을 부수는 등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으며, 도리이 류조가 옥녀제에 쓰이는 목각을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주민들은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옥녀제를 몰래 지내면서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광복 후 당을 다시 짓고 제를 올려왔으나 갑작스러운 외래문화의 유입과 새[마을](/topic/마을)운동 등으로 미신 타파라 하여 이 제의는 송두리째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 제1회 서산문화제 전야제 때(10월 길일) 처음으로 옥녀제를 지냈다. 그러나 이것도 곧 궐사(闕祀, 제사를 지내지 않음)되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 서산 지역 관가에 불상사(불명예 퇴직, 횡사 등)가 잦아지자 1989년에 당시 윤영복 부춘동 동장과 김현구 서산문화원 원장이 주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옥녀제를 재현하였다. 1990년 2월 서산 지역의 유림 계통 인사들이 모여 모경회(慕敬會)를 조직하여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옥녀봉 산정 국기게양대 밑에 제단을 설치하고 40여 명의회원이 유가식으로 제향하게 되었다. 2000년 서산문화제가 없어지고 대신 해미읍성역사체험축제가 개최되었지만 2004년부터 축제의 전야제 행사에서 제외되기 시작한다. 현재는 매년 정기적으로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모경회 주관으로 제의를 지낸다. | 내용 및 특징 | 서산시 소재지의 북쪽에 위치한 뒷산 부춘산은 부춘동에 속한다. 1989년 [1월 1일](/topic/1월1일) 서산군이 서산시로 승격되면서 읍내동과 갈산동을 관할하는 행정동명은 부춘동이 되었다. 산이름은 주산(主山), 북산, 주산, 북주산, 부춘산으로 변천되어 왔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87m이고, 중심 봉우리가 있는 곳은 해발 142m이다. 서산시는 [배산임수](/topic/배산임수)(背山臨水)로 배치되었고, 동쪽에 해발 668m의 가야산맥이 서북쪽으로 길게 휘돌아 가다가 뭉쳐져 남향한 부춘산이 있는 곳에 서산 시[가지](/topic/가지)가 자리 잡는다. 부춘산은 풍부한 유적과 다양한 체육기구를 갖춘 이 지역의 명소로서 면적은 약 32㏊이고, 1991년 3월 26일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옥녀봉](/topic/옥녀봉)은 전국 각지 여러 곳에 있다. 서산과 태안 지역만 하여도 무려 10여 개나 된다. 그러나 부춘산 옥녀봉 전설은 우리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는 애틋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현재 모경회 회원 30여 명이 주축이 되어 매년 정월 열나흗날 오후 2시 30분쯤 옥녀제를 지낸다. 옥녀제 사흘 전에 제단 앞에 [황토](/topic/황토)를 3~6 무더기 놓아 부정한 자가 지나가지 않도록 경계하고,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제관](/topic/제관)은 다섯 명으로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을 가리지 않고 선정하고, 선정한 이후 특별한 금기사항은 없다. 원래 전통적인 [마을](/topic/마을)에서는 생기복덕을 따져 제관을 1~3명 선정하고, 이들은 금기를 따른다. 그러나 행정당국과 관련된 시·읍·면 단위 동신제는 직책으로 제관이 결정되며, 금기도 임의적인 성격을 띤다.[제복](/topic/제복)으로는 [유건](/topic/유건)을 쓰고 하늘색 [도포](/topic/도포)를 입지만 일상적인 복장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매년 제향을 통해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시 중심 제의로 [초헌](/topic/초헌)관에 시장, [아헌](/topic/아헌)관에 시의회 의장, [종헌](/topic/종헌)관에 모경회 회장, 축관에 모경회 회원 등이 선정된다.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 성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제수는 팥시루떡, 돼지머리, 과일, 곶감, 밤, [대추](/topic/대추), 북어포, 술, 향, 촛불 등이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제차는 강신-초헌-[독축](/topic/독축)-아헌-종헌-소지 순으로 진행된다. 제비는 서산시 지원금 200만 원 외에 모경회에서 분기별로 1만 원을 내는 회비에서 30만원을 보탠다. 제사 뒤에는 [음복](/topic/음복)만 할 뿐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행사를 치르지 않는다. 동신제는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최근 참가 인원이 행정 단위 대표들만 모이는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시 행정당국의 재정적 지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행정단위별 동신제가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나 반면 지역주민의 주도와 참여는 희박하다. 더욱이 모경회를 비롯하여 동신제 주관자가 거의 60대 이상 노인이다 보니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젊은이들의 참여가 시급한 실정이다. 옥녀는 나라를 지켜 주는 충(忠)의 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孝)의 신, 주민의 소망과 안녕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서산 지역 주민들의 민간신앙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옥녀봉 전설은 대략 세 가지로 집약된다. 1. 눈 속에서 고사리를 꺾는 소녀 : 옛날 옥녀봉 밑에 젊은 부부가 단란하게 살았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내려와 영롱한 구슬 한 개를 이들 부부에게 주었다. 그뒤 태어난 옥녀는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병들어 부녀의 정성에도 효험 없이 죽고 말았다. 옥녀의 슬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몇 년 뒤 새어머니를맞았다. 새어머니는 데려온 딸만 사랑하고 옥녀에게는 온갖 궂은일을 시키며 구박만 하였다. 어느 해 겨울 새어머니는 옥녀에게 고사리가 먹고 싶다며 당장 뜯어오라고 시켰다. 옥녀가 눈 덮인 부춘산에 올라 고사리를 찾아 헤매며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산골짜기에서 향기가 났다. 그곳에는 선녀들이 온갖 나비와 함께 춤추고 있으며, 갖가지 꽃이피어 있고,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리고 고사리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사리를 정신없이 꺾고 있는 옥녀에게 한 선녀가 다가와 한 줌의 고사리를 [바구니](/topic/바구니)에넣어 주자 바구니가 가득 찼다. 옥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새어머니는 딸과 함께 부춘산으로 올라가 욕심이 생겨 과일을 따려고 손을 뻗쳤다. 그때 뇌성과 함께 눈보라를 동반한 회오리바람이 모녀를 둘둘 휘감아 산 아래쪽으로 내동댕이쳐서 죽게 했다. 옥녀는 선녀를 따라 천상으로 인도되었다가 [옥황상제](/topic/옥황상제)로부터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부춘산에 내려와 주민의 재앙을 막아 주고 소원을 들어 주는 산신령이 되었다. 2. 광산에 흐른 피 : 조선시대 때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이 왜병들에게 재물을 약탈당하고 죽임을 당하던 시기였다. 옥녀봉에 노다지가 묻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어느 일본 사람이 땅속 깊이 파 들어갔으나 노다지는커녕 석탄 부스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때 다시 예쁜 처녀를 생매장하면 금맥을 찾을 수 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이 일본 사람은 가난한 집의 딸을 돈 몇푼 주고는 강제로 옥녀봉으로 끌고 올라갔다. 처녀를 묻으려고 일꾼들이 [괭이](/topic/괭이)로 땅을 파자 피가 나왔다. 모두들 산신령인 옥녀의 몸을 건드린 탓이라 여기고 넋을 잃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더니 뇌성이 울리며 산봉우리에서 준엄한 음성이 들려왔다. 부춘산의 신령인 옥녀는 일본 사람에게 일본의 조선 침략, 조선 광산 약탈,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생매장 등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산봉우리에 옥녀를 호위하던 한 천사가 칼로 일본 사람의 목을 쳐 죽였다. 이후 사람들은옥녀봉을 신성시하고, 옥녀가 지역 주민들에게 안녕과 평안을 가져오고 재난을 막아 주는 수호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3. 당을 지으시오 : 서산지역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평화로웠다. 그런데 어느 해 가뭄과 전염병이 만연하여 모든 사람의 생기를 빼앗아 갔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기진맥진해졌다. 이 즈음 옥녀봉 아래에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노인의 꿈에 옥녀가 나타나 옥녀봉에 당을 지으시오. 그럼 흉년도 질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라고 계시했다. 이튿날 노인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을 짓기로 하였다. 주민들은 당을 지어 제를 지내고 날을 잡아 큰 굿을 행하자 가뭄과 질병이 사라지고 풍년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옥녀봉의 당제는 해마다 이어져 갔다. 어느 해 다시 전염병이 돌고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주민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긴 철장을 만들어 옥녀봉 아래에서ㅋ터 정상까지 땅을 찔러 암장한 묘를 찾아 파내니 사망자가 생기지 않았다. 이후 20개 읍·면에서 각기 옥녀의 목각을 만들어 당에 모시고 제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이곳(특히 옥녀봉)에 묘를 쓰면 묘 임자는 부귀영화를 누려도 주민들에게는 재난과 질병이 온다고 구전된다. | 참고문헌 | 서산의 민속문화 (서산시지 편찬위원회, 서산시, 1988) 서산의 전설 (최주연, 서산문화원, 1995) 부춘산과 [옥녀봉](/topic/옥녀봉) (이은우, 서산의 문화 14, 서산향토연구회, 2002) 서산군지 상·하1926년 서산군지 번역판 (이매창, 서정석역, 서산문화원, 2005) 서산의 부춘산 옥녀봉 문화사산책 (이영하, 서산의 문화 17, 서산향토연구회, 2005) 서산의 지명사 (이은우, 서산시, 2005) |
---|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한국 전통 꽃일에 관한 연구 | 오춘희 | 1984 | 국립문화재연구소 | 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경상도 | 2005 | 한국무속학회 | 동해안 무집단 지화의 문화적 의미 | 윤동환 | 20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