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대잠도(大岑島)에 위치했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을 모신 [사당](/topic/사당). 일명 ‘소정방사’로 기록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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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강성복 |
정의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대잠도(大岑島)에 위치했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을 모신 [사당](/topic/사당). 일명 ‘소정방사’로 기록되기도 한다. | 위치와 형태 | [사료](/topic/사료)에 등장하는 소도독사는 대흥의 대잠도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잠도는 현재 대흥에서 사용되는 지명이 아닐 뿐만 아니라 소도독사는 조선시대에 폐허가 되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조선 초기 소도독사를 언급한 때에는 지금의 봉수산 동쪽(앞)에 작은 규모의 [사당](/topic/사당)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대잠도는 바다에 실재한 섬이 아니라 섬처럼 오롯이 솟은 봉우리 또는 유사시 물에 잠겨 있어 섬처럼 보이는 지형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충남 공주시의 씨악섬이나 전북 무주군의 앞섬[前島]․뒷섬[後島], 금산군의 섬동[島村] 등이 좋은 본보기이다. 이러한 지리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대잠도의 위치를 비정하면 무한천변의 송지연(宋池淵) 일대로 추정된다. 송지연은 봉수산 동쪽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사료에 기록된 소도독사와 방향이 일치하고 있으며, 두 개의 시냇물이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홍수가 나면 연못 주변이 마치 물에 떠 있는 우산(섬)처럼 보였다고 한다. 실제 소도독사를 읊은 시에는 연못 주변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울창한 숲으로 에워싸여 있어 유사시 섬이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송지연은 1960년대 예당저수지가 조성되면서 모두 물속에 잠기는 바람에 더 이상 소도독사의 자취를 추적하기 어렵다. | 정의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대잠도(大岑島)에 위치했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을 모신 [사당](/topic/사당). 일명 ‘소정방사’로 기록되기도 한다. | 위치와 형태 | [사료](/topic/사료)에 등장하는 소도독사는 대흥의 대잠도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잠도는 현재 대흥에서 사용되는 지명이 아닐 뿐만 아니라 소도독사는 조선시대에 폐허가 되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조선 초기 소도독사를 언급한 때에는 지금의 봉수산 동쪽(앞)에 작은 규모의 [사당](/topic/사당)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대잠도는 바다에 실재한 섬이 아니라 섬처럼 오롯이 솟은 봉우리 또는 유사시 물에 잠겨 있어 섬처럼 보이는 지형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충남 공주시의 씨악섬이나 전북 무주군의 앞섬[前島]․뒷섬[後島], 금산군의 섬동[島村] 등이 좋은 본보기이다. 이러한 지리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대잠도의 위치를 비정하면 무한천변의 송지연(宋池淵) 일대로 추정된다. 송지연은 봉수산 동쪽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사료에 기록된 소도독사와 방향이 일치하고 있으며, 두 개의 시냇물이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홍수가 나면 연못 주변이 마치 물에 떠 있는 우산(섬)처럼 보였다고 한다. 실제 소도독사를 읊은 시에는 연못 주변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울창한 숲으로 에워싸여 있어 유사시 섬이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송지연은 1960년대 예당저수지가 조성되면서 모두 물속에 잠기는 바람에 더 이상 소도독사의 자취를 추적하기 어렵다. | 내용 | 소도독사에 대한 국행제(國行祭)의 전통은 조선 초기까지 지속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소정방의 신호(神號)는 고려시대 이래 ‘대잠도호국지신(大岑島護國之神)’으로서 나라의 수호신으로 숭앙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1437년(세종 19) 삼월 열사흗날에 대대적인 국가의 제사[祀典]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진다. 이때 소도독사는 ‘대잠도호국지신’이라고 쓴 위판에서 ‘호국’ 두 자를 삭제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로써 소도독사의 신격은 ‘대잠도지신’으로 격하되어 단지 고을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게 된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에서 대잠도의 소정방은 정녕 호국신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대흥현조에는 “고려 때에는 봄가을로 사신을 보내어 향과 [축문](/topic/축문)을 내려 치제했으나 지금은 다만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소도독사의 제향은 조선 세종 이후에는 국행제가 폐지되고 대흥으로 부임하는 지방관이 주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기에 소정방은 소도독사와 별도로 대흥의 성황신으로도 떠받든 징후가 포착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대흥현 사묘조에는 “성황사는 봉수산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사당](/topic/사당)의 신으로 위한다. 본읍에서 춘추로 치제한다”라고 하여 소정방을 성황신으로 숭배했을 개연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소도독사의 제향이 대흥의 읍민들에게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즉 소도독사는 고려 때 ‘대잠도호국지신’으로 봉작되고, 나라에서 춘추로 향축을 내렸을 정도로 중요한 제향이었다. 따라서 오랜 세월 소도독사의 제향을 지켜본 읍민들은 소정방에 대한 외경심을 갖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고을의 수호신이라는 신앙 관념이 자리하게 되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이 점차 확산되어 결국 대흥의 성황신으로도 숭앙받았을 개연성이 있다. 더욱이 소정방은 백제 멸망의 주역으로서 일세를 풍미한 장수인 데다 백제부흥군의 최후 거점인 임존성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인물이기에 성황신으로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정방을 성황신으로 받든 것은 조선 초기에 국한된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설에 기인한 것이지 관아에서 소정방의 [위패](/topic/위패)를 공식적으로 설치했다고 간주하기가 어렵다. 세종 때 유교적 통치 이념을 강화할 목적으로 국가의 제사를 정비한 [마당](/topic/마당)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성황사의 주인으로 [봉안](/topic/봉안)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대흥군읍지(大興郡邑誌)』사묘조에 “성황신 소정방을 본읍에서 춘추로 제사했다고 하나 지금은 폐지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로써 소정방이 성황신이라는 관념은 대흥에서 17세기 이전에 이미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관찬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나『호서읍지(湖西邑誌)』,『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등에 성황사의 위치만 기록되었을 뿐 소정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성황신 소정방에 대해 세종의 [사전](/topic/사전) 정비 때 유사한 기능을 지닌 사묘를 통폐합하면서 소도독사가 성황사에 [합사](/topic/합사)된 결과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대잠도지신’으로 강등된 소도독사는 비록 국가의 제사에서는 배제되었을지라도 여전히 대흥으로 부임하는 지방관이 제향을 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중종 26년에 교촌리로 유배를 온 이약수가 봉령산 동쪽의 소도독사를 목격했듯이 늦어도 16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세종의 사전 정비 이후에도 소도독사가 한 세기 이상 존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도독사가 성황사에 흡수 통합되었다고 간주하기에는 [무리](/topic/무리)가 있다. 즉 소도독사는 관찰사 송겸이 시로 남겼듯이 성황사와는 무관하게 16세기 중엽까지 존속되다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 내용 | 소도독사에 대한 국행제(國行祭)의 전통은 조선 초기까지 지속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소정방의 신호(神號)는 고려시대 이래 ‘대잠도호국지신(大岑島護國之神)’으로서 나라의 수호신으로 숭앙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1437년(세종 19) 삼월 열사흗날에 대대적인 국가의 제사[祀典]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진다. 이때 소도독사는 ‘대잠도호국지신’이라고 쓴 위판에서 ‘호국’ 두 자를 삭제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로써 소도독사의 신격은 ‘대잠도지신’으로 격하되어 단지 고을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게 된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에서 대잠도의 소정방은 정녕 호국신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대흥현조에는 “고려 때에는 봄가을로 사신을 보내어 향과 [축문](/topic/축문)을 내려 치제했으나 지금은 다만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소도독사의 제향은 조선 세종 이후에는 국행제가 폐지되고 대흥으로 부임하는 지방관이 주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기에 소정방은 소도독사와 별도로 대흥의 성황신으로도 떠받든 징후가 포착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대흥현 사묘조에는 “성황사는 봉수산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사당](/topic/사당)의 신으로 위한다. 본읍에서 춘추로 치제한다”라고 하여 소정방을 성황신으로 숭배했을 개연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소도독사의 제향이 대흥의 읍민들에게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즉 소도독사는 고려 때 ‘대잠도호국지신’으로 봉작되고, 나라에서 춘추로 향축을 내렸을 정도로 중요한 제향이었다. 따라서 오랜 세월 소도독사의 제향을 지켜본 읍민들은 소정방에 대한 외경심을 갖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고을의 수호신이라는 신앙 관념이 자리하게 되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이 점차 확산되어 결국 대흥의 성황신으로도 숭앙받았을 개연성이 있다. 더욱이 소정방은 백제 멸망의 주역으로서 일세를 풍미한 장수인 데다 백제부흥군의 최후 거점인 임존성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인물이기에 성황신으로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정방을 성황신으로 받든 것은 조선 초기에 국한된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설에 기인한 것이지 관아에서 소정방의 [위패](/topic/위패)를 공식적으로 설치했다고 간주하기가 어렵다. 세종 때 유교적 통치 이념을 강화할 목적으로 국가의 제사를 정비한 [마당](/topic/마당)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성황사의 주인으로 [봉안](/topic/봉안)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대흥군읍지(大興郡邑誌)』사묘조에 “성황신 소정방을 본읍에서 춘추로 제사했다고 하나 지금은 폐지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로써 소정방이 성황신이라는 관념은 대흥에서 17세기 이전에 이미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관찬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나『호서읍지(湖西邑誌)』,『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등에 성황사의 위치만 기록되었을 뿐 소정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성황신 소정방에 대해 세종의 [사전](/topic/사전) 정비 때 유사한 기능을 지닌 사묘를 통폐합하면서 소도독사가 성황사에 [합사](/topic/합사)된 결과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대잠도지신’으로 강등된 소도독사는 비록 국가의 제사에서는 배제되었을지라도 여전히 대흥으로 부임하는 지방관이 제향을 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중종 26년에 교촌리로 유배를 온 이약수가 봉령산 동쪽의 소도독사를 목격했듯이 늦어도 16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세종의 사전 정비 이후에도 소도독사가 한 세기 이상 존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도독사가 성황사에 흡수 통합되었다고 간주하기에는 [무리](/topic/무리)가 있다. 즉 소도독사는 관찰사 송겸이 시로 남겼듯이 성황사와는 무관하게 16세기 중엽까지 존속되다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 역사 | 소도독사가 [사료](/topic/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고려사(高麗史)』권56「지리지」홍주 대흥현조이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의 소정방 [사당](/topic/사당)이 대잠도에 있다. 춘추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소도독사의 제향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치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소도독사는 16세기 중엽까지 대흥에 존속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기묘사화 때 피화를 당한 이약수(李若水)가 1531년(중종 26) 대흥에 유배를 왔다가 소도독사를 찾은 감회를 읊은 시에 “소[장군](/topic/장군)사당이 대흥 봉령산(鳳靈山)에 있다. 봉령산 동쪽에 오래된 사당이 있으니 노수(老樹)가 하늘을 찌르고 연기와 구름 뒤덮였네. 당시의 호령(號令)은 뇌성벽력처럼 빠르고, 오늘의 위성(威聲)은 초목을 불태우네”라고 노래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소도독사는 당시까지도 건재하였다. 그러나 불과 20여 년이 흐른 뒤에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겸(宋謙)은 소정방사당이 무너져 내린 황량한 모습을 목도하고 “봉수산 앞 부서진 작은 집, 연못 주위는 적막한데 수목만 무성하네. 황량한 사당은 다만 소장군 받들던 표식일 뿐, 무너진 성첩 여기가 임존성인 줄 누가 알리”라고 하여 무너져 내린 사당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 두 편의 시로 짐작건대 소도독사의 제향은 사실상 16세기 중엽에 중단되고, 그 사당마저 방치되어 폐허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 역사 | 소도독사가 [사료](/topic/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고려사(高麗史)』권56「지리지」홍주 대흥현조이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의 소정방 [사당](/topic/사당)이 대잠도에 있다. 춘추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소도독사의 제향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치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소도독사는 16세기 중엽까지 대흥에 존속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기묘사화 때 피화를 당한 이약수(李若水)가 1531년(중종 26) 대흥에 유배를 왔다가 소도독사를 찾은 감회를 읊은 시에 “소[장군](/topic/장군)사당이 대흥 봉령산(鳳靈山)에 있다. 봉령산 동쪽에 오래된 사당이 있으니 노수(老樹)가 하늘을 찌르고 연기와 구름 뒤덮였네. 당시의 호령(號令)은 뇌성벽력처럼 빠르고, 오늘의 위성(威聲)은 초목을 불태우네”라고 노래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소도독사는 당시까지도 건재하였다. 그러나 불과 20여 년이 흐른 뒤에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겸(宋謙)은 소정방사당이 무너져 내린 황량한 모습을 목도하고 “봉수산 앞 부서진 작은 집, 연못 주위는 적막한데 수목만 무성하네. 황량한 사당은 다만 소장군 받들던 표식일 뿐, 무너진 성첩 여기가 임존성인 줄 누가 알리”라고 하여 무너져 내린 사당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 두 편의 시로 짐작건대 소도독사의 제향은 사실상 16세기 중엽에 중단되고, 그 사당마저 방치되어 폐허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 지역사례 | 소정방을 고을의 수호신으로 모신 또 하나의 사례는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topic/장군)리에 있는 삼장군당(三將軍堂)이다. [마을](/topic/마을) 서쪽 삼정산 [장군봉](/topic/장군봉) 정상에 자리한 이 당은 세 장군을 모신 까닭에 유래된 이름이다. 여기에서 지칭하는 삼장군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유신을 비롯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그의 부장(部將)인 이무(李茂)장군이다. 세 장수는 김유신이 장군리 넓은 들판에서 처음 당나라 군사를 맞이할 때 조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세 장군을 잊고 지냈는데 고려 때 장군봉 인근에서 사람과 [가축](/topic/가축)이 변을 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를 괴이하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까닭을 알아보니 세 장수의 고마움을 모르고 제사도 올리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사공씨가 나라에 상소하여 삼장군당을 짓고 매년 단오에 관민이 합심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삼장군당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군위현 사묘조에 그 사적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김유신사는 효령현 서악(西岳)에 있다. 속칭 삼장군당이라고 한다. 해마다 단오가 되면 현의 수리(首吏)가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역기(驛騎)에 깃발과 북을 달고 신을 맞이하면서 거리를 누빈다. 허주의 시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 장수는 서성(西城)의 주인이라 했는데 그 풍속이 지금까지 내려오니 그 사연이 분명하구나. 해마다 단옷날을 어기지 아니하니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면서 신의 뜻을 위로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삼장군당의 제향은 읍민들을 거느린 우두머리 관리가 깃발을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신을 맞이하는 거리행진을 벌였고, 수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고 온갖 잡희(雜戱)가 베풀어지는 성대한 지역축제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 백제 이후의 예산과 임존성 (김갑동, 백제문화 2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99)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여름 (국립민속박물관, 2005) 성황신 소정방과 대흥 (변동명, 역사학연구 30, 호남사학회, 2007) 高麗史, 牛泉遺稿, 大東地志, 大興郡邑誌, 東國院宇錄, 世宗實錄,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練藜室記述, 俎豆錄, 增補文獻備考, 대흥 소도독사와 읍치 성황사 (강성복, 백제연구 49,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9) | 지역사례 | 소정방을 고을의 수호신으로 모신 또 하나의 사례는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topic/장군)리에 있는 삼장군당(三將軍堂)이다. [마을](/topic/마을) 서쪽 삼정산 [장군봉](/topic/장군봉) 정상에 자리한 이 당은 세 장군을 모신 까닭에 유래된 이름이다. 여기에서 지칭하는 삼장군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유신을 비롯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그의 부장(部將)인 이무(李茂)장군이다. 세 장수는 김유신이 장군리 넓은 들판에서 처음 당나라 군사를 맞이할 때 조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세 장군을 잊고 지냈는데 고려 때 장군봉 인근에서 사람과 [가축](/topic/가축)이 변을 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를 괴이하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까닭을 알아보니 세 장수의 고마움을 모르고 제사도 올리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사공씨가 나라에 상소하여 삼장군당을 짓고 매년 단오에 관민이 합심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삼장군당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군위현 사묘조에 그 사적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김유신사는 효령현 서악(西岳)에 있다. 속칭 삼장군당이라고 한다. 해마다 단오가 되면 현의 수리(首吏)가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역기(驛騎)에 깃발과 북을 달고 신을 맞이하면서 거리를 누빈다. 허주의 시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 장수는 서성(西城)의 주인이라 했는데 그 풍속이 지금까지 내려오니 그 사연이 분명하구나. 해마다 단옷날을 어기지 아니하니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면서 신의 뜻을 위로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삼장군당의 제향은 읍민들을 거느린 우두머리 관리가 깃발을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신을 맞이하는 거리행진을 벌였고, 수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고 온갖 잡희(雜戱)가 베풀어지는 성대한 지역축제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 백제 이후의 예산과 임존성 (김갑동, 백제문화 2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99)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여름 (국립민속박물관, 2005) 성황신 소정방과 대흥 (변동명, 역사학연구 30, 호남사학회, 2007) 高麗史, 牛泉遺稿, 大東地志, 大興郡邑誌, 東國院宇錄, 世宗實錄,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練藜室記述, 俎豆錄, 增補文獻備考, 대흥 소도독사와 읍치 성황사 (강성복, 백제연구 49,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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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 제주도 안덕면 당신본풀이의 구비전승적 위상 | 김헌선 | 1996 | 국립민속박물관 | 광양당제 | 강정식 |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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