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63[번지](/topic/번지) 덕릉[마을](/topic/마을)에 위치한 산신각으로, 마을공동체 신앙을 위한 제의 장소. 1996년 12월 24일에 ‘경기도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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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김지욱 |
정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63[번지](/topic/번지) 덕릉[마을](/topic/마을)에 위치한 산신각으로, 마을공동체 신앙을 위한 제의 장소. 1996년 12월 24일에 ‘경기도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63[번지](/topic/번지) 덕릉[마을](/topic/마을)에 위치한 산신각으로, 마을공동체 신앙을 위한 제의 장소. 1996년 12월 24일에 ‘경기도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덕릉[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수락산 산신을 산신각에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 드리는 제의는 산제라고 한다. 제의는 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에 지낸다. 정월 초하루와 시월 초하루에 날을 잡으며, 초사흘을 넘지 않기 위해 날을 잡는 당일이 제일(祭日)이 될 수도 있다. 날짜가 길어지면 부정을 타는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초사흗날 이내로 정하며, 부정이 있으면 그 달 제사는 거른다. 어떤 해에는 마을에 초상이 나서 제를 거르기도 하지만 마땅한 [화주](/topic/화주)가 없어서 제를 거르기도 하였다. 제일이 정해지면 화주 한 명과 축관을 선정한다. [제관](/topic/제관)은 따로 선출하지 않고 산신제에 참여하는 동네 모든 사람이 제관이 된다. 몸이 깨끗한 사람을 화주로 선정한 뒤 그날 마을방송으로 화주가 선정되었음을 알린다. 이 마을의 제사는 1980년대 말부터 많이 간소화되었다. 제사비용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낸다. 산신제에 참여하는 가구는 36가구이지만 이곳에서 살다가 나간 10가구 정도가 산신제 비용을 내고 있다. 예전에는 자루를 지고 다니면서 한 집에 한 되씩 쌀을 걷었다. 현재는 제비를 제사 전에 걷지 않고 화주로 선정된 사람이나 이장이 먼저 비용을 지불하고 제가 끝난 뒤 가구 수만큼 나누어서 받는다. 이 마을에서는 산신이 영험하여 제물을 준비할 때부터 조심하여야 한다는 금기가 전한다. 화주가 집에서 떡을 찌거나 메를 지을 때 나오는 쌀뜨물은 산제사가 끝날 때까지 소에게 먹일 수 없었다. 제사를 끝내기 전 먹이면 그 사람이 벌을 받았다고 하며, 떡[방아](/topic/방아)도깨끗한 여자들이 와서 쌀을 빻고 백설기를 쪄야 한다. 제물 종류에서도 금기가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산제 제물에 [사과](/topic/사과)를 절대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과일은 사과를 제외한 [대추](/topic/대추), 밤, 곶감 등을 올린다. 산적, 북어포, 쇠머리, [삼색나물](/topic/삼색나물)([미나리](/topic/미나리), 무, 숙주), 튀각, 후추, 탕, [새옹](/topic/새옹)메 두 솥을 올린다. 술은 약주로 준비한다. 제물 준비는 과거 화주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은 뒤에 했지만 1996년부터 마을회관에서 한다. 마을회관 뒤에는 산신제 음식을 준비하던 마을 [우물](/topic/우물)이있다. 지금도 제일 전날 우물을 품고 우물에 금줄을 두른 다음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황토를 마을회관 문 앞에 뿌려 놓는다. 밤 10~11시 사이에 산신각으로 준비한 제물을 [가지](/topic/가지)고 올라간다. 제물 내용은 정월과 시월이 같다. 제의 절차는 유교식으로 이루어진다. 제물을 진설한 뒤 술을 한 잔 부어 놓고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절을 한다. 이어서 [축문](/topic/축문)을 읽고 잔을 올린 다음 절을 하고 물러난다. 소지는 가구당 집 소지를 올린다. 산신각 제사가 끝나면 새옹메와 삼색나물을 들고 나와서 산제당 울타리 밖에 있는 돌 제단에 올려놓은 뒤 삼배를 올리고 제사를 끝낸다. 1996년 이전만 해도 축문 없이 제를 지냈다. 1996 년에 산신각이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 전주 이씨 시제(時祭)를 담당하는 어른을 찾아가 축문의 기본 틀을 받아 왔다. 산제에 참여하는 인원은 정월과 시월에 차이가 있다. 정월 산제에는 명절을 맞아 고향에 온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시월에는 참석 인원이 많아야 열 명 남짓이다. 산제가 끝나면 밤에 마을회관에 사람들이 모여 [음복](/topic/음복)하고 아침에 산제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주면서 결산도 함께한다. 화주나 이장이 먼저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떡을나누어 주면서 돈을 받는다. 덕릉마을에서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노나매기친다’라고 하고, ‘산신각 노나매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의 산제는 1980년대 말부터 간소화되기는 했지만 단잔단배에 축문과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산신당에 본제를 올리고, 제당 밖에 있는 제단에도 간단하게 제물을 올리는 절차이다. 이러한 제의 내용은 전통적인 무속의 산신신앙과 불교, 유교 의례의 요소가 융화되어 조선시대에 형성된 전형적인 마을공동체 신앙의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현재이 마을의 안쪽 골짜기에는 599년에 지어진 수락산 흥국사가 있으며 1950년쯤에는 산신제와 도당굿을 함께 행하던 큰 마을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약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참고문헌 | 남양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 1999) 남양주시지 3 (남양주시지편찬위원회, 2000) 경기도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현지조사 (2010년 6월 2일) | 내용 | 덕릉[마을](/topic/마을) 사람들은 수락산 산신을 산신각에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 드리는 제의는 산제라고 한다. 제의는 매년 음력 정월과 시월에 지낸다. 정월 초하루와 시월 초하루에 날을 잡으며, 초사흘을 넘지 않기 위해 날을 잡는 당일이 제일(祭日)이 될 수도 있다. 날짜가 길어지면 부정을 타는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초사흗날 이내로 정하며, 부정이 있으면 그 달 제사는 거른다. 어떤 해에는 마을에 초상이 나서 제를 거르기도 하지만 마땅한 [화주](/topic/화주)가 없어서 제를 거르기도 하였다. 제일이 정해지면 화주 한 명과 축관을 선정한다. [제관](/topic/제관)은 따로 선출하지 않고 산신제에 참여하는 동네 모든 사람이 제관이 된다. 몸이 깨끗한 사람을 화주로 선정한 뒤 그날 마을방송으로 화주가 선정되었음을 알린다. 이 마을의 제사는 1980년대 말부터 많이 간소화되었다. 제사비용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낸다. 산신제에 참여하는 가구는 36가구이지만 이곳에서 살다가 나간 10가구 정도가 산신제 비용을 내고 있다. 예전에는 자루를 지고 다니면서 한 집에 한 되씩 쌀을 걷었다. 현재는 제비를 제사 전에 걷지 않고 화주로 선정된 사람이나 이장이 먼저 비용을 지불하고 제가 끝난 뒤 가구 수만큼 나누어서 받는다. 이 마을에서는 산신이 영험하여 제물을 준비할 때부터 조심하여야 한다는 금기가 전한다. 화주가 집에서 떡을 찌거나 메를 지을 때 나오는 쌀뜨물은 산제사가 끝날 때까지 소에게 먹일 수 없었다. 제사를 끝내기 전 먹이면 그 사람이 벌을 받았다고 하며, 떡[방아](/topic/방아)도깨끗한 여자들이 와서 쌀을 빻고 백설기를 쪄야 한다. 제물 종류에서도 금기가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산제 제물에 [사과](/topic/사과)를 절대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과일은 사과를 제외한 [대추](/topic/대추), 밤, 곶감 등을 올린다. 산적, 북어포, 쇠머리, [삼색나물](/topic/삼색나물)([미나리](/topic/미나리), 무, 숙주), 튀각, 후추, 탕, [새옹](/topic/새옹)메 두 솥을 올린다. 술은 약주로 준비한다. 제물 준비는 과거 화주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은 뒤에 했지만 1996년부터 마을회관에서 한다. 마을회관 뒤에는 산신제 음식을 준비하던 마을 [우물](/topic/우물)이있다. 지금도 제일 전날 우물을 품고 우물에 금줄을 두른 다음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황토를 마을회관 문 앞에 뿌려 놓는다. 밤 10~11시 사이에 산신각으로 준비한 제물을 [가지](/topic/가지)고 올라간다. 제물 내용은 정월과 시월이 같다. 제의 절차는 유교식으로 이루어진다. 제물을 진설한 뒤 술을 한 잔 부어 놓고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절을 한다. 이어서 [축문](/topic/축문)을 읽고 잔을 올린 다음 절을 하고 물러난다. 소지는 가구당 집 소지를 올린다. 산신각 제사가 끝나면 새옹메와 삼색나물을 들고 나와서 산제당 울타리 밖에 있는 돌 제단에 올려놓은 뒤 삼배를 올리고 제사를 끝낸다. 1996년 이전만 해도 축문 없이 제를 지냈다. 1996 년에 산신각이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 전주 이씨 시제(時祭)를 담당하는 어른을 찾아가 축문의 기본 틀을 받아 왔다. 산제에 참여하는 인원은 정월과 시월에 차이가 있다. 정월 산제에는 명절을 맞아 고향에 온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시월에는 참석 인원이 많아야 열 명 남짓이다. 산제가 끝나면 밤에 마을회관에 사람들이 모여 [음복](/topic/음복)하고 아침에 산제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주면서 결산도 함께한다. 화주나 이장이 먼저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떡을나누어 주면서 돈을 받는다. 덕릉마을에서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노나매기친다’라고 하고, ‘산신각 노나매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의 산제는 1980년대 말부터 간소화되기는 했지만 단잔단배에 축문과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산신당에 본제를 올리고, 제당 밖에 있는 제단에도 간단하게 제물을 올리는 절차이다. 이러한 제의 내용은 전통적인 무속의 산신신앙과 불교, 유교 의례의 요소가 융화되어 조선시대에 형성된 전형적인 마을공동체 신앙의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현재이 마을의 안쪽 골짜기에는 599년에 지어진 수락산 흥국사가 있으며 1950년쯤에는 산신제와 도당굿을 함께 행하던 큰 마을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약 2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참고문헌 | 남양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 1999) 남양주시지 3 (남양주시지편찬위원회, 2000) 경기도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현지조사 (2010년 6월 2일) | 역사 | 덕릉[마을](/topic/마을)산신각 정면에 걸린 [현판](/topic/현판)에는 1882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 이전에 있던 산신각은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이 현판에는 대동질(大同秩), 당현(塘峴), 순화궁(順和宮)의 제목 아래 산신각을 새로 지을 당시 비용을 추렴한 사람들의 명단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마을의 산신각은 낡고 허물어져 1996년 경기도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완전 보수를 거쳐 지금의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 역사 | 덕릉[마을](/topic/마을)산신각 정면에 걸린 [현판](/topic/현판)에는 1882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 이전에 있던 산신각은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이 현판에는 대동질(大同秩), 당현(塘峴), 순화궁(順和宮)의 제목 아래 산신각을 새로 지을 당시 비용을 추렴한 사람들의 명단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마을의 산신각은 낡고 허물어져 1996년 경기도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완전 보수를 거쳐 지금의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 형태 | 덕릉[마을](/topic/마을)산신각은 마을 어귀 오른쪽(동쪽)의 낮은 야산 위에 있으며, 서쪽을 정면으로 보고 자리 잡고 있다. 산신각이 지어진 산 위에서 보면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마을회관 뒤쪽에서 10m 정도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덕릉마을은 조선시대 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묘 덕릉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신각은 약 972㎡의 대지에 한 칸 크기의 목조[기와집](/topic/기와집)으로 지었다. 가로 4m, 세로 6m의 낮은 시멘트 [기단](/topic/기단) 위에 정면 350㎝, 측면 300㎝ 크기의 방을 뒤쪽으로 앉히고 정면 왼쪽과오른쪽에 지름 90㎝의 [기둥](/topic/기둥)을 330㎝ 간격을 두고 세워 앞부분을 비운 전당후실(前堂後室)형이다. [지붕](/topic/지붕)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으로 [기와](/topic/기와)를 얹고 [단청](/topic/단청)을 그려 큰 사찰의 산신각처럼 규모 있게잘 지었다. 전당 전면에는「 산신각」이라고 쓴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고, 맞은편에는 상량기를 적은 현판을 걸어 두었다. 후실의 전면은 여섯 쪽의 [판벽](/topic/판벽)과 [판문](/topic/판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책거리](/topic/책거리), 꽃, 쌍화문 등으로 단청을 하였다. 뒷벽의 윗부분에는 단청색 바탕에 담뱃대를 입에 문 흰 호랑이와 마주보고 앉아 담뱃불을 붙여 주는 흰 토끼 그림을 그렸다. 산신각 주변에는 철 구조물로 울타리를 쳐 놓았으며, 울타리 밖에 산신각을 정면으로 두고 윗면이 너른 돌을(가로 115㎝, 세로 93㎝, 두께 50㎝) 두 개 겹쳐 제단을 마련해 놓았다. 산신각 내부에는 높이 90㎝, 폭 60㎝의 나무선반을 왼쪽·오른쪽·정면의 삼면으로 설치해 제단을 만들고 정면에 산신도를 모셨다. 소장된 제구(祭具)는 없으며, 신체(神體)로는산신도를 모시고 있다. 산신도는 제당 정면에 가로 170㎝, 세로 120㎝의 액자에 걸어 두었다. 산신도의 중앙에 [망건](/topic/망건)을 쓰고 흰 수염을 기른 산신이 부채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산신의 오른쪽 뒤로 선도낭자(仙桃娘子)와 두 명의 동자가 서있고 한 명의 다승(茶僧)이 앉아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다. 산신의 왼쪽으로는 호랑이 한 마리가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다. 현재 산신도는 도난을 우려하여 마을에서 별도로 보관하고, 산신당에는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어 두었다. 마을에서는 이 그림을 오래전 흥국사 주지인 범화 스님이 그렸다고 알고 있다. 흥국사에도 똑같은 산신도가 있었지만 예전에 도난을 당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도를 산신각 탱화라고 부른다. | 형태 | 덕릉[마을](/topic/마을)산신각은 마을 어귀 오른쪽(동쪽)의 낮은 야산 위에 있으며, 서쪽을 정면으로 보고 자리 잡고 있다. 산신각이 지어진 산 위에서 보면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마을회관 뒤쪽에서 10m 정도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덕릉마을은 조선시대 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묘 덕릉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신각은 약 972㎡의 대지에 한 칸 크기의 목조[기와집](/topic/기와집)으로 지었다. 가로 4m, 세로 6m의 낮은 시멘트 [기단](/topic/기단) 위에 정면 350㎝, 측면 300㎝ 크기의 방을 뒤쪽으로 앉히고 정면 왼쪽과오른쪽에 지름 90㎝의 [기둥](/topic/기둥)을 330㎝ 간격을 두고 세워 앞부분을 비운 전당후실(前堂後室)형이다. [지붕](/topic/지붕)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으로 [기와](/topic/기와)를 얹고 [단청](/topic/단청)을 그려 큰 사찰의 산신각처럼 규모 있게잘 지었다. 전당 전면에는「 산신각」이라고 쓴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고, 맞은편에는 상량기를 적은 현판을 걸어 두었다. 후실의 전면은 여섯 쪽의 [판벽](/topic/판벽)과 [판문](/topic/판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책거리](/topic/책거리), 꽃, 쌍화문 등으로 단청을 하였다. 뒷벽의 윗부분에는 단청색 바탕에 담뱃대를 입에 문 흰 호랑이와 마주보고 앉아 담뱃불을 붙여 주는 흰 토끼 그림을 그렸다. 산신각 주변에는 철 구조물로 울타리를 쳐 놓았으며, 울타리 밖에 산신각을 정면으로 두고 윗면이 너른 돌을(가로 115㎝, 세로 93㎝, 두께 50㎝) 두 개 겹쳐 제단을 마련해 놓았다. 산신각 내부에는 높이 90㎝, 폭 60㎝의 나무선반을 왼쪽·오른쪽·정면의 삼면으로 설치해 제단을 만들고 정면에 산신도를 모셨다. 소장된 제구(祭具)는 없으며, 신체(神體)로는산신도를 모시고 있다. 산신도는 제당 정면에 가로 170㎝, 세로 120㎝의 액자에 걸어 두었다. 산신도의 중앙에 [망건](/topic/망건)을 쓰고 흰 수염을 기른 산신이 부채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산신의 오른쪽 뒤로 선도낭자(仙桃娘子)와 두 명의 동자가 서있고 한 명의 다승(茶僧)이 앉아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다. 산신의 왼쪽으로는 호랑이 한 마리가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다. 현재 산신도는 도난을 우려하여 마을에서 별도로 보관하고, 산신당에는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어 두었다. 마을에서는 이 그림을 오래전 흥국사 주지인 범화 스님이 그렸다고 알고 있다. 흥국사에도 똑같은 산신도가 있었지만 예전에 도난을 당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도를 산신각 탱화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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