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주곡리장승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나라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마을 제사. 1992년 10월 28일에‘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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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나라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마을 제사. 1992년 10월 28일에‘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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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덕
정의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나라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마을 제사. 1992년 10월 28일에‘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나라와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마을 제사. 1992년 10월 28일에‘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주곡리장승제는 [마을](/topic/마을) 어귀의 장승배기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지낸다.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겨지며, 장승제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마을의 안과태평을 빈다.

주곡리장승은 장승배기로 부르는 마을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남녀 장승이 마주보고 있는데, 마을 바깥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남장승, 오른쪽이 여장승이다. 남장승에는 ‘천하대[장군](/topic/장군)축귀신(天下大將軍逐鬼神)’, 여장승에는 ‘지하대장군축귀신(地下大將軍逐鬼神)’이라 먹으로 명문을 써 놓았다. 장승 옆에는 솟대를 함께 세우는데, 여기서는 솟대를‘짐대’ 또는 ‘오릿대’라 부른다. 주곡리에서는 장승과 솟대를 해마다 새로 깎아 묵은 것과 함께 세워두는 전통이 있어 10여 기의 장승과 솟대가 한 묶음으로 세워져 있다. 여장승 옆으로는 신목(神木)으로 여기는 참나무가 있고, 남장승 근처에는 장승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장승샘’이 있다.장승의 크기는 대개 2m 정도로, 남장승이 여장승에 비해 좀 더 체구가 크다. 남장승은 머리에 [사모](/topic/사모)(紗帽)를 쓰고, 눈을 부라리고 있으며 턱에는 묵선(墨線)으로 긴 수염을 그려놓았다. 여장승은 [족두리](/topic/족두리)를 쓰고, 역시 눈을 부라리고 있으나 남장승에 비해서는 덜 위압적인 모습이다. 장승의 코는 양쪽 뺨 부위를 깊게 파서 자연스럽게 도드라[지게](/topic/지게) 만들었고, 이빨은 끌로 쪼아서 직사각형의 형태로 표현해 놓았다.

주곡리장승제는 정월 초삼일에 제비(祭費)마련을 위한 걸립과 [제관](/topic/제관)선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논산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면서 논산시로부터 제비의 일부를 보조받고 있지만,장승제의 제비는 전통적으로 [농악](/topic/농악)패가 집집마다 돌며 걸립을 해서 마련한다. 제관으로는 제주·[헌관](/topic/헌관)·축관 및 제의를 보조하는 좌집사·우집사를 선정한다. 전에는 유사를 별도로 두어 제물을 포함한 제반 사항을 주관하게 했으나 근래에는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준비한다.

제의 당일 오전에는 주민들이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장승과 짐대를 만들 나무를 베고, 또 다른 패는 제장(祭場)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장승목으로는 조선송[紅松]만을 쓰며, 천하대장군(남장승)은 ‘우람하게 보이려고 배가 불룩 나온 놈’을 선호하고, 지하대장군(여장승)은 ‘배가 나오면 거만하고 드센 것처럼 보이니까 다소곳하게 배가 들어간놈’을 선호한다. 짐대는 가늘며 길고 곧은 소나무를 장대로 하고, 오리 머리를 만들 기역(ㄱ) 자 모양의 나뭇[가지](/topic/가지)도 함께 준비한다. 제장을 청소할 때 장승샘도 함께 깨끗이 쳐내며, 청소가 끝나면 장승배기 일대 사방에 [금줄](/topic/금줄)을 둘러친다. 금줄 한 가운데에는 황사(黃砂)로 정방형의 제단을 만든다. 금줄 앞·뒤의 길 양편으로는 세 무더기씩, 총 열두무더기의 [황토](/topic/황토)를 펴 놓는다.

오후에는 장승과 짐대를 깎아 장승배기에 세운다. 장승은 먼저 낫으로 소나무의 흰 속살이 드러날 때까지 껍질을 말끔하게 벗겨낸 다음 붓으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린 후에 톱과도끼를 이용해서 전체적인 형상을 조각한다. 머리와 얼굴 부위는 정과 끌, [망치](/topic/망치) 등을 이용해 보다 세밀하게 조각하며, 명문을 쓸 배 부위는 편편하게 깎는다. 조각이 끝나면 붓으로 눈과 귀, 이빨, 사모관대의 문양을 그려주고, 배 부위에 명문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topic/무리)한다. 짐대는 오리와 장대로 구성되는데, 장대는 가늘고 긴 나무의 껍질만 벗겨 그대로사용한다. 오리머리는 기역(ㄱ) 자 모양의 소나무 가지를 그대로 이용해서 껍질을 벗긴 후 한 쪽을 주둥이 형태로 납작하게 깎고 붓으로 눈과 깃털모양을 그려주면 완성된다. 오리의 몸통이 되는 네모난 널판 조각은 앞뒤로 구멍을 뚫어 앞에는 오리머리를, 뒤에는 장대를 꽂는 용도로 쓴다. 이 몸통에 오리머리와 장대를 연결하면 짐대는 완성되는데,이를 두고 주민들은 “짐대 위에 오리를 올려 놓는다”고 말한다. 장승과 짐대를 깎는 내내 한쪽에서는 농악을 치며 장승깎기를 격려하고, 장승과 짐대가 완성되면 농악패를 앞세우고 장승을 세우러 간다. 이들이 장승배기에 도착하면 묵은 장승들보다 맨 앞자리에 새 장승을 세우고 다시 잘 동여매 놓는다.

장승제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지낸다. 제물은 팥시루떡·돼지머리·삼색실과·포·탕·메 등을 쓰며, 길 한복판에 임시로 마련한 황토제단에 진설한다. 장승제 절차는 유교식 제의를 따라 [분향](/topic/분향)-강신-[초헌](/topic/초헌)-[독축](/topic/독축)-[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소지올리기의 순으로 진행되며, 제관은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에 [유건](/topic/유건)을 쓰고 제를 진행한다. 소지는 마을의 대동소지를 시작으로 각 집에서 소지를 올린다. 전에는 유사가 유사소지를 올린 후 마을 전체의 가가호호(家家戶戶) 소지를 올렸으나 요즘은 각반의 반장들이 해당 반원들의 소지를 올린다.

소지올리기가 끝나면 금줄을 풀어서 장승의 몸통에 감아둔다. 제관은 제물의 일부를 떼에서 [한지](/topic/한지)에 싼 후 남녀 장승의 몸통에 매달아 두는데, 이를 ‘[헌식](/topic/헌식)(獻食) 드린다’고 한다. 장승샘에는 별도로 생미역을 준비했다가 바친다. 또 제관은 바가지에 장승샘의 물과 제물 일부를 섞어 마을 바깥을 향하여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은 물러가고 부귀영화만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외치며 뿌리는데, 이를 ‘[해물리기](/topic/해물리기)’라 한다.

한편 매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묵은 장승이 많이 쌓이면 장승제를 지내고 난 후 썩고 문드러진 장승을 골라내어 소각을 하기도 한다. 모든 의례를 마치면 즉석에서 [음복](/topic/음복)을 하고, 농악을 치며 한바탕 신명나게 노는 것으로 장승제는 마무리 된다.
참고문헌충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
한국의 [마을](/topic/마을)제당3 (국립민속박물관, 1998)
논산 주곡리장승제의 지속과 변화 (유병덕, 역사민속학22, 역사민속학회, 2006)
한국의 마을신앙 상 (국립민속박물관, 2007)
내용주곡리장승제는 [마을](/topic/마을) 어귀의 장승배기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지낸다.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겨지며, 장승제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마을의 안과태평을 빈다.

주곡리장승은 장승배기로 부르는 마을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남녀 장승이 마주보고 있는데, 마을 바깥에서 보았을 때 왼쪽이 남장승, 오른쪽이 여장승이다. 남장승에는 ‘천하대[장군](/topic/장군)축귀신(天下大將軍逐鬼神)’, 여장승에는 ‘지하대장군축귀신(地下大將軍逐鬼神)’이라 먹으로 명문을 써 놓았다. 장승 옆에는 솟대를 함께 세우는데, 여기서는 솟대를‘짐대’ 또는 ‘오릿대’라 부른다. 주곡리에서는 장승과 솟대를 해마다 새로 깎아 묵은 것과 함께 세워두는 전통이 있어 10여 기의 장승과 솟대가 한 묶음으로 세워져 있다. 여장승 옆으로는 신목(神木)으로 여기는 참나무가 있고, 남장승 근처에는 장승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장승샘’이 있다.장승의 크기는 대개 2m 정도로, 남장승이 여장승에 비해 좀 더 체구가 크다. 남장승은 머리에 [사모](/topic/사모)(紗帽)를 쓰고, 눈을 부라리고 있으며 턱에는 묵선(墨線)으로 긴 수염을 그려놓았다. 여장승은 [족두리](/topic/족두리)를 쓰고, 역시 눈을 부라리고 있으나 남장승에 비해서는 덜 위압적인 모습이다. 장승의 코는 양쪽 뺨 부위를 깊게 파서 자연스럽게 도드라[지게](/topic/지게) 만들었고, 이빨은 끌로 쪼아서 직사각형의 형태로 표현해 놓았다.

주곡리장승제는 정월 초삼일에 제비(祭費)마련을 위한 걸립과 [제관](/topic/제관)선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논산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면서 논산시로부터 제비의 일부를 보조받고 있지만,장승제의 제비는 전통적으로 [농악](/topic/농악)패가 집집마다 돌며 걸립을 해서 마련한다. 제관으로는 제주·[헌관](/topic/헌관)·축관 및 제의를 보조하는 좌집사·우집사를 선정한다. 전에는 유사를 별도로 두어 제물을 포함한 제반 사항을 주관하게 했으나 근래에는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준비한다.

제의 당일 오전에는 주민들이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장승과 짐대를 만들 나무를 베고, 또 다른 패는 제장(祭場)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장승목으로는 조선송[紅松]만을 쓰며, 천하대장군(남장승)은 ‘우람하게 보이려고 배가 불룩 나온 놈’을 선호하고, 지하대장군(여장승)은 ‘배가 나오면 거만하고 드센 것처럼 보이니까 다소곳하게 배가 들어간놈’을 선호한다. 짐대는 가늘며 길고 곧은 소나무를 장대로 하고, 오리 머리를 만들 기역(ㄱ) 자 모양의 나뭇[가지](/topic/가지)도 함께 준비한다. 제장을 청소할 때 장승샘도 함께 깨끗이 쳐내며, 청소가 끝나면 장승배기 일대 사방에 [금줄](/topic/금줄)을 둘러친다. 금줄 한 가운데에는 황사(黃砂)로 정방형의 제단을 만든다. 금줄 앞·뒤의 길 양편으로는 세 무더기씩, 총 열두무더기의 [황토](/topic/황토)를 펴 놓는다.

오후에는 장승과 짐대를 깎아 장승배기에 세운다. 장승은 먼저 낫으로 소나무의 흰 속살이 드러날 때까지 껍질을 말끔하게 벗겨낸 다음 붓으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린 후에 톱과도끼를 이용해서 전체적인 형상을 조각한다. 머리와 얼굴 부위는 정과 끌, [망치](/topic/망치) 등을 이용해 보다 세밀하게 조각하며, 명문을 쓸 배 부위는 편편하게 깎는다. 조각이 끝나면 붓으로 눈과 귀, 이빨, 사모관대의 문양을 그려주고, 배 부위에 명문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topic/무리)한다. 짐대는 오리와 장대로 구성되는데, 장대는 가늘고 긴 나무의 껍질만 벗겨 그대로사용한다. 오리머리는 기역(ㄱ) 자 모양의 소나무 가지를 그대로 이용해서 껍질을 벗긴 후 한 쪽을 주둥이 형태로 납작하게 깎고 붓으로 눈과 깃털모양을 그려주면 완성된다. 오리의 몸통이 되는 네모난 널판 조각은 앞뒤로 구멍을 뚫어 앞에는 오리머리를, 뒤에는 장대를 꽂는 용도로 쓴다. 이 몸통에 오리머리와 장대를 연결하면 짐대는 완성되는데,이를 두고 주민들은 “짐대 위에 오리를 올려 놓는다”고 말한다. 장승과 짐대를 깎는 내내 한쪽에서는 농악을 치며 장승깎기를 격려하고, 장승과 짐대가 완성되면 농악패를 앞세우고 장승을 세우러 간다. 이들이 장승배기에 도착하면 묵은 장승들보다 맨 앞자리에 새 장승을 세우고 다시 잘 동여매 놓는다.

장승제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지낸다. 제물은 팥시루떡·돼지머리·삼색실과·포·탕·메 등을 쓰며, 길 한복판에 임시로 마련한 황토제단에 진설한다. 장승제 절차는 유교식 제의를 따라 [분향](/topic/분향)-강신-[초헌](/topic/초헌)-[독축](/topic/독축)-[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소지올리기의 순으로 진행되며, 제관은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에 [유건](/topic/유건)을 쓰고 제를 진행한다. 소지는 마을의 대동소지를 시작으로 각 집에서 소지를 올린다. 전에는 유사가 유사소지를 올린 후 마을 전체의 가가호호(家家戶戶) 소지를 올렸으나 요즘은 각반의 반장들이 해당 반원들의 소지를 올린다.

소지올리기가 끝나면 금줄을 풀어서 장승의 몸통에 감아둔다. 제관은 제물의 일부를 떼에서 [한지](/topic/한지)에 싼 후 남녀 장승의 몸통에 매달아 두는데, 이를 ‘[헌식](/topic/헌식)(獻食) 드린다’고 한다. 장승샘에는 별도로 생미역을 준비했다가 바친다. 또 제관은 바가지에 장승샘의 물과 제물 일부를 섞어 마을 바깥을 향하여 “[잡귀잡신](/topic/잡귀잡신)은 물러가고 부귀영화만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외치며 뿌리는데, 이를 ‘[해물리기](/topic/해물리기)’라 한다.

한편 매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묵은 장승이 많이 쌓이면 장승제를 지내고 난 후 썩고 문드러진 장승을 골라내어 소각을 하기도 한다. 모든 의례를 마치면 즉석에서 [음복](/topic/음복)을 하고, 농악을 치며 한바탕 신명나게 노는 것으로 장승제는 마무리 된다.
참고문헌충남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1)
한국의 [마을](/topic/마을)제당3 (국립민속박물관, 1998)
논산 주곡리장승제의 지속과 변화 (유병덕, 역사민속학22, 역사민속학회, 2006)
한국의 마을신앙 상 (국립민속박물관, 2007)
역사주곡리는 조선시대 이래 청주 양씨(淸州 楊氏)를 중심으로 그 서족(壻族)인 함평 이씨(咸平 李氏),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세거해 온 곳이다. 청주 양씨의 입향조는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신도안에서 이주한 양춘건(楊春健, 1448~1509)이다.

주곡리장승제의 유래는 청주 양씨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양춘건이 정착하여 [마을](/topic/마을) 어귀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고 해마다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위하여 제사를지낸 것이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임진왜란 때 밤중에 마을을 침입하려던 왜군이 장승을 마을 사람으로 알고 총을 쏘며 지체하는 동안 주민들이 무사히 피란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장승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해서 장승제를 더욱 극진하게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주곡리 출신으로서 향선생(鄕先生)으로 존경을 받던 숙인재(熟仁齋) 양치호(楊致灝, 1871~1944)가 전염병이 창궐하자 장승을 만들고 [축문](/topic/축문)을 지어 제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 주곡리에는 장승의 기원과 관련해 부하의 아내를 탐하여 부하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은 장모(張某) 정승(政丞)과 관련한 [일화](/topic/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장 정승의 악행이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그를 능지처참하고 본보기로 그의 형상을 나무로 깎아 거리에 세워 두었는데 이것이 변질되어 장승(將丞)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전과 달리 문헌상 기록으로는 1938년에 발간된 『[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釋奠·祈雨·安宅)』(朝鮮の 鄕土神祀 第二部)의 「수호제(守護祭)」편에 주곡리장승제 축문이 충남 논산의 ‘장승제 축문’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유일하다. 이 축문에는 마을 이름은 나와 있지만 현재 주곡리에 전래되는 숙인재 선생이 지었다는 축문과 성씨별 순서·문구가 거의 동일하여 주곡리장승제의 축문이라고 보기에 [무리](/topic/무리)가 없다. 주곡리장승제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단정하기 힘들지만 정황상조선시대 이래 전승되어 왔을가능성이 높다.

근현대 들어서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와 [새마을운동](/topic/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장승제가 중단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두 시기는 국가적으로 전통 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타파하려던 때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림법을 빌미로 목장승을 만들어 세우는 것을 금지하는 등 억압이 있었고, 1970년대에는 도로 확장 등 새마을운동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장승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일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파로 한때 목장승은 철거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장방형의 돌, 1970년대에는 시멘트로 각각 장승을 만들어 장승제를 지속해 왔다. 시멘트장승은 몇 년 못 가서 다시 목장승으로 대체되었다. 당시 세운 석장승과 시멘트장승은 아직까지 목장승과 함께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주곡리장승제가 논산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면서 장승제에 대한 마을 안팎의 관심과 위상도 높아졌다. 1992년에 ‘주곡리 향토유적 보존회’를 결성하고, 2003년에는 해체된 마을 동계를 재결성하여 장승제를 주관하는 등 마을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계속하고 있다.
역사주곡리는 조선시대 이래 청주 양씨(淸州 楊氏)를 중심으로 그 서족(壻族)인 함평 이씨(咸平 李氏),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세거해 온 곳이다. 청주 양씨의 입향조는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신도안에서 이주한 양춘건(楊春健, 1448~1509)이다.

주곡리장승제의 유래는 청주 양씨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양춘건이 정착하여 [마을](/topic/마을) 어귀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고 해마다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위하여 제사를지낸 것이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임진왜란 때 밤중에 마을을 침입하려던 왜군이 장승을 마을 사람으로 알고 총을 쏘며 지체하는 동안 주민들이 무사히 피란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장승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해서 장승제를 더욱 극진하게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주곡리 출신으로서 향선생(鄕先生)으로 존경을 받던 숙인재(熟仁齋) 양치호(楊致灝, 1871~1944)가 전염병이 창궐하자 장승을 만들고 [축문](/topic/축문)을 지어 제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 주곡리에는 장승의 기원과 관련해 부하의 아내를 탐하여 부하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은 장모(張某) 정승(政丞)과 관련한 [일화](/topic/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장 정승의 악행이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그를 능지처참하고 본보기로 그의 형상을 나무로 깎아 거리에 세워 두었는데 이것이 변질되어 장승(將丞)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전과 달리 문헌상 기록으로는 1938년에 발간된 『[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釋奠·祈雨·安宅)』(朝鮮の 鄕土神祀 第二部)의 「수호제(守護祭)」편에 주곡리장승제 축문이 충남 논산의 ‘장승제 축문’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유일하다. 이 축문에는 마을 이름은 나와 있지만 현재 주곡리에 전래되는 숙인재 선생이 지었다는 축문과 성씨별 순서·문구가 거의 동일하여 주곡리장승제의 축문이라고 보기에 [무리](/topic/무리)가 없다. 주곡리장승제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단정하기 힘들지만 정황상조선시대 이래 전승되어 왔을가능성이 높다.

근현대 들어서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와 [새마을운동](/topic/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장승제가 중단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두 시기는 국가적으로 전통 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타파하려던 때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림법을 빌미로 목장승을 만들어 세우는 것을 금지하는 등 억압이 있었고, 1970년대에는 도로 확장 등 새마을운동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장승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일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파로 한때 목장승은 철거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장방형의 돌, 1970년대에는 시멘트로 각각 장승을 만들어 장승제를 지속해 왔다. 시멘트장승은 몇 년 못 가서 다시 목장승으로 대체되었다. 당시 세운 석장승과 시멘트장승은 아직까지 목장승과 함께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주곡리장승제가 논산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면서 장승제에 대한 마을 안팎의 관심과 위상도 높아졌다. 1992년에 ‘주곡리 향토유적 보존회’를 결성하고, 2003년에는 해체된 마을 동계를 재결성하여 장승제를 주관하는 등 마을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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